65화.
네모난 묘비들이 서로 어느 정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연고 없는 이들이 잠든 이 추모의 땅은 누구도 발길 하는 이가 없었으나 푸릇한 잔디가 빼곡한, 엑젤리스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이었다.
바닥에 묻힌 인간의 양분을 빨아먹고 자란 잔디는 발목을 간지럽힐 만큼 높이 자라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걷는 그들의 주변으로 밤 중의 손님을 환영하듯 반딧불이가 모여들었다. 고향에선 반딧불을 모아 밤에 조명으로 쓰곤 했던 제인이 엉덩이를 노랗게 빛내는 그 벌레들의 틈바구니에서 걸음을 멈췄다. 눈 앞에 펼쳐진 그 노란 불빛의 움직임을 감상하며 잠깐의 향수를 즐기던 그녀는 뒤에서 나는 인기척에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내 뒤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했을 텐데.”
팔을 붙잡혀 반딧불 사이를 끌려 나온 제인이 다시 녹스의 뒤를 따라 걸었다. 왜 매번 나를 데리고 돌아다니는 것인지, 왜 당신이 있는 4층으로 나를 옮겼는지, 왜 내 다리를 자르지 않은 것인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눈앞의 새카만 등은 언젠가 느꼈던 것처럼 여전히 거대한 벽 같았다.
“풀벌레가 많으니 조심해.”
녹스는 늘 명백한 경멸이 담긴 시선을 보냈지만, 종종 건네는 말은 예전처럼 다정히 들리기도 해서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경계하는 마음이 커져 갔다.
계절이 바뀌어 감에 따라 해가 점점 일찍 떨어지고 있었다. 반딧불이 말고는 의지할 빛도 없는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남아있는 오솔길을 따라 녹스가 천천히 걸어갔다. 제인의 걷는 속도를 고려한 발걸음이었지만, 그녀는 그런 사소한 배려를 알지 못했다.
“여긴 추모의 땅이라 불리는 공동묘지야.”
커다란 공동묘지의 중간쯤, 어느 묘비의 앞에 섰을 때 녹스가 뜬금없이 설명을 시작했다.
“엑젤리스에 아무 연고도 없는 자들은 죽어서 이곳에 묻히게 되지.”
그 설명의 의미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를 깨달았다. 제인은 발 앞에 놓인, 비교적 깨끗한 묘비를 손으로 쓸었다.
「 델단 」
죽음으로 떠난 망자에게 축복을 빌어 주는 문구도 없이, 단 두 글자의 이름만 써진 묘비가 썰렁해 보였다. 모든 묘비가 빼곡히 오와 열을 맞추었지만, 이상하게도 델단의 옆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그 자리가 조만간 인신 공양으로 사라질 비예단의 자리라는 건 녹스와 측근 몇 명을 제외하곤 모르는 사실이었다.
제인은 비예단의 예비 묏자리에 무릎 꿇고 앉아 비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햇살 같은 머리카락도, 깊게 파인 보조개도 모조리 이 밑에 묻혀 썩어간다고 생각하니 그의 보기 흉했던 마지막 발악이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델단은 그대의 친구라 했지.”
귓가를 스치는 바람에 제인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마치 죽음을 추모하러 온 유족처럼 둘은 비석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
“마지막은 썩 보기 좋게 끝나지 않았지만.”
녹스의 의도가 무엇이든, 고인을 그리워하는 제인에겐 마치 시비처럼 들려왔다. 그는 함께 있는 시간 내내 같은 태도여서, 제인은 매번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억지로 대화를 강요한다면 뭐라도 말을 꺼내기야 하겠으나, 녹스는 그녀가 대답하지 않으면 않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오늘도 말이 없군.”
소통의 부재는 둘 사이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목숨줄을 쥐고 있는 인간과 함께 있는 제인의 탓도, 의도를 모르겠는 녹스의 탓도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속내를 낱낱이 밝히지 않아 일어난 당연한 적막이었다.
“고맙습니다.”
말이 없다 종용당한 것 때문인지 제인이 웅얼거렸다. 그녀의 속에 있던 말이 나온 거였기에 억지로 꺼낸 감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녀의 말을 듣고도 녹스가 대답이 없었다. 같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둘은, 같이 있는 모습조차 낯설었다.
제인이 몰래 녹스를 훔쳐보았다. 항상 여유로운 미소가 무늬처럼 그려져 있던 유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궁금했다. 그때의 그 모습이 연기였는지, 아니면 지금의 모습이 연기인 것인지. 마네가 가짜인지, 녹스가 가짜인지.
“괜찮다면….”
밤바람과 함께 실려 온 녹스의 변덕이 함께 식사라도 하겠냐고 묻을 뻔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늘 미세하게 떨고 있는 제인을 보고 찰나의 변덕을 바로잡은 그가 아까부터 같은 자세로 앉아있는 제인을 일으켜 세웠다.
“이만 들어가지.”
아쉬운 작별인 것처럼 들어가자는 말끝이 흐렸다. 제인도 델단의 묘지를 떠나는 게 못내 아쉬웠다. 제인은 그 외로운 묘비를 떠나면서 비예단에게 델단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당신 형의 죽음을 추모하는 게 당신만 있다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세상에 혼자 남은 사람들끼리 느끼는 동질감과 비슷한 동정이었다. 제 코가 석 자인데도 제인은 남을 걱정했다.
* * *
오랜만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누운 녹스는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그는 몰랐지만, 그 가벼운 즐거움은 제인이 자신과 함께하는 내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는 데에서 나온 만족감이었다. 마음 한쪽으론 죄책감을 닮은 감정이 들기도 했으나, 그래도 이곳은 엑젤리스였다. 누구도 자신의 행동을 막을 수 없었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무거웠던 책임감이 이럴 땐 다행이구나. 내일은 어디를 함께 가면 좋을까.
그는 제인이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발목을 붙잡으면서도, 그녀를 위하고 있었다.
녹스에겐 보호였겠지만, 제인에겐 억압이었던 모든 행동이 그녀에겐 어떻게 느껴질지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선 제인과의 거리도 중요했기에 내린 선택적 이기였다. 벗어낸 늑대 가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어 버려 이제는 완벽한 비밀이 된 자신의 정체성. 그 정체성은 늘 자신을 혼란스럽게 했지만 알 수 없는 소속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소속의 일원을 만나게 되었으니 절대로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그는 편안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잠에 빠지자마자 꿈에 시달렸다. 지금보다 훨씬 앳된 모습의 녹스는 새까만 가면을 갑옷처럼 쓰고 있지도 않았고, 그렇게 무감각한 아이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어른스럽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재수 없는 애’였다.
그 아이가 당연한 절차처럼 아버지를 따라 목검을 쥐었다. 평소와 똑같은 악몽의 전조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이 그날, 전쟁터에서 느꼈던 불행의 전조와 같이 느껴졌다. 온몸을 스며들다 못해 꿈속을 뒤흔드는 예감은 현실과 무의식의 괴리를 서서히 흐려지게 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불렀다. 또 노스어의 전쟁에 참전하라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 집을 떠나기 며칠 전, 아버지를 볼 생각에 즐거워하는 녹스에게 형이 찾아왔다.
‘녹스, 네가 죽을까 봐 걱정돼.’
여전히 눈물 많고, 정 많고, 부드럽고, 연약한 형, 마네는 동생의 걱정에 한숨도 못 자 눈 밑이 퀭했다. 안된다는 녹스의 만류에도 마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죽을 리가 없다며 큰소리를 쳐도, 반드시 돌아온다고 각서를 써 준다 해도 절대.
결국, 녹스와 마네는 함께 낯선 노스어로 향했다. 마네는 가는 길 내내 추워지는 날씨에 노스어 인들을 이해한다는 멍청한 소리를 했다. 춥고 척박한 땅이라면, 우리의 땅을 탐낼만하다면서, 싸우지 않고 다 같이 살면 좋을 텐데. 하는 등의 소리로 병사들의 사기를 꺾었다.
전쟁터에서 활약해 아버지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겠다는 녹스의 목표는 시체 냄새가 진동하고, 땅에 스며든 피가 질퍽거리는 땅을 밟자 금세 망상이 되었다. 몇 번의 전투에도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살생의 경험은 그를 주눅 들게 했다. 형은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가자고 설득했지만, 자존심만 강했던 녹스는 형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겁먹고 두려워 검을 놓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각에서 기습하는 적들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마다 형은 멀리서 지원 사격을 해 주었다.
‘언제 활을 다 배웠대?’
‘그냥, 어깨너머 배웠지.’
명중률이 꽤 높아 녹스가 감탄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녹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검을 쥐고 있었고, 마네는 훌륭한 백발백중의 활 솜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내게 정신 차리라는 천둥 같은 아버지의 외침이 들렸다. 겁먹은 모습이 그렇게 티가 났나? 아, 아예 정신을 놓고 있었구나. 형이 다시 제 손에 검을 쥐여 주었다. 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기 위해, 형에게 우습게 보이지 않기 위해 이건 훈련이다, 이건 꿈이다, 암시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