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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죽이기 (64)화 (64/95)

64화.

눈이 어둠 속에 적응되는 속도와 비슷하게, 제인의 머리에 먹구름이 서서히 끼어들어 걱정이 한층, 두 층 쌓여 갔다. 걱정이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 가지 않으면 두고두고 놓친 기회를 후회하면서 평생 오늘 주어진 이 쪽지를 떠올릴 테니,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빛바랜 희망을 좇으며 평생을 산다는 건 분명 괴로울 게 분명했다. 이게 어떤 함정이고, 기다리고 있는 게 어떤 지옥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 선택은 분명, 델단이 그녀를 잡아끌었을 때처럼 타의적인 게 아니라, 오로지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그래도, 정말 신이 있다면, 부디 낙원이 펼쳐져 있길, 걸어 올라온 이 좁고 높다란 계단이 부디 낙원으로 향하는 계단이길.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처음 왔을 때보다도 더 가파르게 변한 것 같은 계단을 모두 올라오자 심장이 목구멍으로 뛰쳐나와 그대로 입밖에 뱉을 수도 있을 만큼 뛰어댔다.

있는 힘을 모두 짜내 올라온 이 까마득한 절벽 위는 달이 더 가까이 보였다,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깝게. 둥근 달의 가운데에 검은색 음영이 뚜렷이 보였다. 달을 꼭 닮은 은발의 머리, 그가 즐겨 입는 고급스러운 질감의 셔츠, 발목이 살짝 보이는 검은색 바지, 늘 깨끗하게 닦여있는 구두. 모두 제인의 구원자, 마네였다.

“마네!”

손에 쥐고 뛰느라 땀에 젖고, 구겨진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올라오느라 헉헉대던 숨이 터질 듯이 폭발해 생각보다 크게 이름을 외쳤지만, 마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딜 보고 있는 거지?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제인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정리하지 못했던 모든 긴장감과 불신이 물밀 듯이 쓸려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 덕에 기꺼이 그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있는 힘을 모두 발휘해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한 걸음씩 옮겼다.

“늦었네.”

늘 듣던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탓하는 말투도, 혼내는 의미도 아니었다. 고민하다가 늦었다는 걸 사실대로 고백할까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가 구원자를 자처하길 원했으니, 제인은 그저 지금, 이 순간부터 마네를 믿으면 그걸로 되었다.

“하늘이 참 예뻤는데.”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머리카락이 밝게 뜬 달빛에 흐드러졌다. 거대한 달의 그림자 앞에선 그는 얼굴을 뒤덮은 새까만 가면을 벗어냈다. 검은 늑대의 가면이었다.

“당신….”

거대한 달을 등지고 제게 걸어오는 모습이 자신을 잡으러 온 신의 사자처럼 느껴졌다. 마음에선 도망가야 한다는 울부짖음이 들려왔지만, 몸을 돌고 있던 피가 순식간에 발끝으로 흘러내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네를 닮은, 마네와 똑같은 흰 손이 서서히 다가와 제인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몸에 붙어있으나, 좀처럼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팔이 그의 힘에 이끌려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말랑한 입술의 촉감이 손끝에 느껴졌다. 붉은빛을 띠면서도 차가운 입술이 마네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여섯 음절을 뱉었다.

“녹스 엑젤리스.”

제인은 그 보라색 눈을 똑똑히 마주했다. 태양보다 얕고 차가운 달 아래에서, 고뇌가 휘몰아치는 그 눈이 바람에 날아갈 듯 여린 몸을 꿰뚫자 제인의 머리가 차게 식었다. 그가 진짜 그녀의 구원이었고, 그의 사명이 그녀의 분수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면 완벽했다.

제인은 앞으로 더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고, 다시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임무를 완수했고 그의 앞에 주저앉은 짐승은 보기 좋게 길들여졌다.

“오느라 고생했어.”

마네의 부드러운 벨벳 같은 목소리가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이 상황에 닥치자 제인은 신기하게도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고, 그저 그 꼴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나 하나를 골려 먹기 위해 부단히도 애썼구나. 그래서 굳은 얼굴에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끈기에 박수를 보내 줘야겠군.”

늑대의 탈을 마네가 찬사를 보냈다. 휘어진 눈꼬리며, 살짝 짓고 있는 미소는 모두 전과 같았지만, 음성만큼은 싸늘했다.

“마네는….”

마네는 없던 거구나.

말을 차마 잇지도 못하고 제인이 무너졌다. 다리가 구겨지고 몸뚱이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허공에 붕 뜬 것처럼 한참이나 쏟아졌다. 그녀는 가장 밑바닥에서 그나마 위안을 찾았다. 오늘 여기까지 오지 않았더라면 줄곧 농락당했을 텐데, 지금이라도 진실을 알아서 다행이었다.

“다리를 잘라 버리겠다 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이 마네라고 한 적이 없었다. 혼자 착각하고 혼자 그 이름을 부른 건 자신이었다. 그러니 아무도 탓할 수 없었다. 델단이 제인을 인간이라 착각했던 것처럼, 제인도 녹스를 마네라고 착각했던 것뿐이었다.

“기억하나?”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녹스가 바닥에 주저앉은 제인에게 물었다. 그가 어떤 악질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어서 이런 일을 벌였는진 몰라도, 신은 제인의 편이 아니었고, 한 번 채워진 목줄은 어찌나 단단한지 이 정도의 발악으론 풀어지지 않았다.

겸허히 운명에 순응하는 게 제인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이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알량한데, 살고 싶은 의지는 녹아내린 촛농처럼 단단히 굳어 버렸다. 이미 한 줌 가루가 되어 사라진 자존심도, 언젠가 잃어버렸던 존엄도 박박 긁어 눈앞의 남자에게 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무덤덤하게 이야기하는 목소리에선 배신감도, 분노도, 슬픔도 느낄 수 없었다.

좀 더 불쌍하게 말해야 하는데.

제인의 머리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다 하기로 다짐했다. 그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것이든, 몸을 부숴서라도 그에게 보석을 쥐여주든 살아 있고 싶었다. 제인은 줄곧 죽음을 희망했으나, 기껏 죽음이 다가왔을 땐 삶을 갈망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아이러니했는지 용서를 구하는 말에 점점 실성한 웃음이 곁들여져 멈추지 않았다.

“하라는 건 뭐든 다 할게요,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어떻게든 눈물을 짜내서 자신이 황금알을 낳는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지만 메마른 호수는 가뭄이었다. 아무리 애써도 허무함엔 습기가 없다는 걸 깨닫고, 제인이 자해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팔뚝을 물어뜯기 시작한 모습은 오래전 녹스가 질색하며 싫어하던 짐승의 행동이었다.

그 짐승은 인간과 똑같은 이빨로 기어코 본인의 팔에 상처를 내었다. 많이는 아니었지만, 붉게 흘러나온 피는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제인의 팔을 벗어난 피가 바닥을 적시지 못하고 고체로 떨어졌다. 그 동그란 잇자국이 남은 팔을 녹스가 잡아챘다.

“그대는….”

타들어 가는 불꽃이 재로 돌아가는 것처럼, 제인을 부른 한마디가 매듭을 짓지 못하고 사라졌다. 무수히 많은 할 말들이 녹스의 입 끝을 맴돌다 괴로움으로 변모했다. 그가 무슨 심정인지, 왜 도망치려던 노예를 이토록 애가 닳게 바라보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 뭔가를 바라는 눈빛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비록 그게 보석은 아닐지라도, 기필코 옆에 두고 말겠다는 희미한 광기가 느껴졌다.

* * *

제인은 그 뒤로 4층의 빈방 하나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4층으로 옮긴 탓에 비예단은 더는 제인에게 식사를 전해줄 수 없었고, 주에 한두 번 제인의 날개를 재생하기 위해 감시가 붙은 상태로 30분가량을 만나는 게 전부였다.

비예단을 만난 이후엔 의사가 제인을 진찰했다. 이 과정이 자신을 경계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그는 매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제인의 등에 손만 올려놓고 그 시간을 버텼다. 나를 못 믿는 사람들에 대한 심통, 제인이 날개를 달아 주면 영영 도망가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직무유기였다.

녹스는 매일 제인을 데리고 성 곳곳을 탐방했다. 다리를 자른다고 엄포를 놓은 탓에 그가 올 때마다 두려웠던 제인은 이젠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끌려다녔다. 훈련소에 데려가 목검을 만지게 해 준다거나, 파수대가 있는 숲에 가서 한참을 구경시켜 준다거나, 책이 빼곡한 서재에 앉혀 놓는다거나 하는 등의 기이한 행동들은 성의 사용인부터 시작해서 기사들에게까지 퍼졌다.

어떤 이는 제인의 미모에 대장이 사랑에 빠졌다고 믿기도 했고, 제인이 현혹의 저주를 걸어 대장을 홀리게 했다고 믿기도 했다. 그 소문들이 사실일지 거짓일지는 오로지 그 염문의 대상자들만이 알고 있겠지만, 어림짐작하고 있던 사람은 있었다. 셰이단은 녹스의 이상한 행동에 많은 사람이 질문을 해와도 그저 곧 파수대의 일원이 될 이종에게 인간 사회를 훈련하는 것뿐이라고 일축했다.

셰이단은 그런 소문을 들을 때마다 늘 녹스에게 가서 성이 혼란스러우니 자중해 달라 전했지만, 그의 말이 통할 리 만무했다. 처음엔 건성으로라도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며칠이 지난 뒤엔 아예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제인이 녹스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고, 엑젤리스가 녹스에게 얼마나 큰 짐인지는 셰이단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대체 언제까지 제멋대로 굴 생각인지 답답했다. 집사의 복장이 터지는 줄도 모르는 녹스는 오늘 밤도 역시 제인의 방으로 향했다. 제인이 녹스에게 끌려다니는 것인지, 녹스가 제인에게 끌려다니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오늘은 어딜 가고 싶나?”

반복되는 기이한 그의 행동에 제인은 이미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어디를 가고 싶다거나, 좋아하는 반응을 보이면 또 도망가려 한다 여겨 가차 없이 자신을 죽일 거라 생각한 그녀는 매번 같은 질문을 받아도 입을 다물었다.

늘 침묵으로 일관해와 단 한 번도 목적지를 말한 적은 없었지만, 제인은 늘 새로운 곳을 구경하라는 목적으로 시험당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녀는 녹스가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풀어준 장본인이고, 큰 벌을 받아야 마땅한 짓을 저질렀음에도 관대하게 용서해 주었다는 사실은 망각하지 않았다. 그의 행동에 분명 이유가 있었는데, 그 이유를 아직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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