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긴장하고 있는 환자에게 대뜸 ‘누군가 당신을 독살하려 합니다.’ 라거나 ‘당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같은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아 의사는 문 앞에서 말을 골랐다. 어떤 말이 충격이 덜하려나 고민 중, 어차피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잘 모르는듯하니 대충 얼버무리자고 결심했다.
“아무래도 인간이 먹는 음식들이 몸에 잘 안 맞는 것 같네요. 알레르기 반응일 수도 있고요.”
제인은 당연히 그가 하는 말들이 거짓일 거라는 상상도 못 한 채 쓸모없는 질문들에 성실히 대답했다.
“평소에 먹으면 피부가 가렵거나 두드러기가 난 적이 있나요?”
“아뇨, 어렸을 때 고향에서도 감자나 토마토 같은 건 늘 먹었어요.”
지성과 감성을 가진 생명체라면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했다. 경청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욱. 그리고 그건 제인에게도 통용되는 사실이었다. 기껏해야 의사와의 상담이었지만, 이런 사소한 질문을 해주고, 관심을 두는 사람이 있다는 걸로도 제인은 금세 말문이 트였다.
“고향에선 자연 그대로에서 자란 걸 드셨나요? 인간은 농작물에 비료며 약물이며 이것저것 많이들 뿌려요.”
얼핏 이종들이 나무 위나 땅굴을 파서 집을 짓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 의사가 어림짐작하며 물었다. 제인이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들에겐 미지의 구역인 이종에 대해 학문적 호기심이 일었지만, 못내 자중했다.
“처방한 약입니다. 지금 드시고, 속이 거북할 수 있으니 오늘 저녁은 금식입니다. 입이 마르거나 씁쓸하면 물은 한 잔 정도 마시면 좋아요. 식당엔 제가 말해 두겠습니다.”
한두 끼 굶는 건 일도 아니었던 제인은 바로 수긍했다. 그러나 처방 받은 약은 건네받고서도 바로 먹지 않고 망설였다. 그 의심의 눈초리를 보니 이대로 나간다면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버려질 게 뻔했다. 의사는 결국 그녀가 약병을 다 비울 때까지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나중에 먹으면 안 될까요?”
불쌍한 눈이 의사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자신을 치료해 주는 의사를 보는 눈이 아니라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 강도를 보는 눈이었다. 이런 시선을 받아 보다니. 의사가 어이없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 기분에 ‘허허.’하고 인자하게 웃었다.
“전 인간이고, 당신은 이종이지만….”
제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약병과 의사를 번갈아 쳐다봤다. 여태 이런 병에 든 건 많이 먹어본 경험이 있다. 붉은 보석을 얻기 위해 수없이 많이 독약을 억지로 마시고, 피를 토했던 몸에 기억된 공포가 다시 살아나려던 참이었다.
“지금은 그저 의사와 환자일 뿐입니다. 처방한 약을 믿기 힘들다면 절 믿어 보세요. 꽤 유능한 의사입니다.”
“…….”
제인은 그 말을 듣고도 한참을 고민하는 동안 의사는 그저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히려 그게 더 독촉되었는지, 그녀는 고민 끝에 결국 병의 마개를 열었다. 먹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쓴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인간이 약이라고 주는 것들, 그땐 억지로 입을 열었어도 이번만큼은 제인이 스스로 마셨다. 입안에 화한 느낌이 퍼졌다. 미지근한 액체가 식도로, 가슴으로, 배로 흘렀지만 아무 느낌도 없었다. 타들어 갈 것 같은 고통도 없고, 숨이 막히는 기분도 없었다.
“잘하셨어요. 그리고 이거.”
처방 약을 잘 먹은 것 치고는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해준 의사가 가방에서 꺼낸 곱게 접은 쪽지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 진료 가방을 다시 챙겨 들었다. 구두 밑창이 바닥을 두드리고, 문이 열렸다 닫혔다. 의사가 나감과 동시에 제인은 침대 위에 고스란히 올려진 쪽지를 주웠다.
비예단이나 마네가 보낸 것이라고 예상했고, 이왕이면 마네가 보낸 것이길 기대했다. 병을 내려놓을 새도 없이 한 손에 쥔 채 쪽지를 펼쳐보자 익숙한 필체가 보였다. 마네의 것이었다.
* * *
어김없이 식사 때가 되자 식당을 찾은 비예단은 주방장에게서 의사가 찾아와 3층 손님에겐 오늘 음식을 제공하지 말라 했다는 걸 전해 듣고 멍해진 느낌이었다. 늘 유능하다는 칭찬을 듣고 살아온, 어쩌면 아르모단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치유 사제인 저를 두고 의사를 불렀다니.
모독이라고 여겨질 만큼 기분이 나빴다. 정상적인 사고라면 능력이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배려하는 걸까, 정원에 제초제를 뿌리는 탓에 날 믿지 못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만도 했으나 비예단은 오직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야기를 전해 준 주방장에게 알겠다는 대답도 일절 하지 않은 채로 휙 돌아선 비예단은 그대로 방에 뛰어 들어갔다.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마치 직접 멸시를 당한 것처럼 불쾌했다. 의사가 제인의 손목에 손을 올려 맥을 짚고, 열을 재느라 이마를 만지고, 정성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진료를 했을 거라 생각하니 짜증이 치밀었다.
나도 못 잡아 본 제인의 손목을, 이마를 의사 나부랭이가 감히, 제까짓 게 뭔데 제인을…….
비예단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 부정적 감정들이 도저히 제어되지 않았다. 속을 뒤집고 두통을 일으키는 끔찍한 질투와 분노가 모두 자신의 것이라는 게 믿어지지도 않았다.
선(善)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덕목이자, 교양이고, 신이 가르치는 도덕이었지만, 그런데도 세상에 범죄가 만연하는 이유는 악(惡)이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었다. 비예단의 갸륵한 마음씨는 제인을 독차지하고 싶은 소유욕에 비해선 별 볼 일 없는 휴짓조각에 불과했다.
“의사가 아무리 해독제를 쏟아부어도 소용없을 텐데.”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비예단이 조소했다. 자신이 제인에게 단 한 번이라도 접촉할 수 있다면 해독제를 먹기 이전의 상태를 되돌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제인은 결국 서서히 에스텔라에 중독되어 일상생활에 문제가 생길 것이고, 자신은 옆에서 그녀의 몸 상태를 조절하며 평생을 함께할 것이었다. 누구든 자신이 정한, 이 운명을 어긋나게 할 순 없었다.
* * *
「 도망갈 수 있게 해 줄게.
함께 노을을 보던 그날, 그 시간.
-너의 구원자가 」
참 지독한 시련이었다. 모든 걸 체념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도 그 단단한 결심이 고작 이런 쪽지 하나에 흔들렸다.
마네는 전부 다 알잖아. 내가 이종이라는 것도, 이곳을 숨막혀 한다는 것도. 게다가 뭐든 해 줄 수 있다는 식으로 말했잖아. 날 지하 감옥에서 꺼내 주는 건 일도 아니라고 했잖아. 어쩌면, 그 사람이라면…….
달콤한 유혹이 들려온다. 그가 자신을 도망치게 해 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가 베푼 호의는 모두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도 이유 없는 호의일지도 몰랐다. 그 호의가 변덕이라도 좋았다. 이곳을 벗어나게 되는 순간 소리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가 변덕을 부릴 새도 없이 고향으로 떠나던, 이 삶을 끝내 버리던.
경비들은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방을 뛰쳐나온 제인을 붙잡지 않았다. 하녀도, 하인도 모두가 그녀를 안 보이는 척 취급했다. 델단과 도망치던 그 날과는 확실히 달랐다. 몰래 창문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당당히 문으로 걸어 나간 데다가, 자신을 붙잡으러 오던 경비들도 제재하지 않았다.
제인은 부푼 기대에 젖은 채로 기억을 더듬어 예전에 올랐던 절벽 사이의 계단을 찾았다. 좁디좁은 계단을 올라가는데, 앞에서 잡아 주는 사람이 없으니 한세월이었다. 종아리가 찌릿하게 저렸다. 절뚝거리면서도 꿋꿋하게 걸어가는 그녀의 얼굴엔 단연한 결의 마저 느껴졌다.
이 망할 다리, 이 빌어먹을 계단.
평소엔 해본 적 없는 욕을 속으로 끊임없이 지껄여 대는 와중에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려 모두 뒤로 쓸려갔다. 다 왔구나, 근 몇 년간 느껴본 적 없는 성취감에 뿌듯하다 못해 만족스러웠다. 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마네와 처음 왔을 때의 시간보다 훨씬 늦은 시간이었는지, 노을은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누군가는 밤을 검정이라고 표현하곤 했지만, 그건 틀린 말이었다. 제인은 짙은 남색의 어둠 아래에서 마네를 찾았다.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어디에 사로잡혀서 허상을 좇는지 모르겠다. 제인은 자신이 원래 이렇게 판단력 없고 충동적인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의 답은 ‘그럴 수밖에 없다.’였다. 제인은 여태 살면서 무언가를 직접 골라본 기억이 까마득했다. 곰곰이 생각해 봐야 겨우 기억이 나는 건, 15살 때, 고향에서 마지막으로 먹은 점심. 그 사소한 선택을 마지막으로, 내일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하는 정도의 선택도 없이 7년을 살았다.
그러니 지금 제인의 결정이 올바르지도 않고, 멍청할지라도 어쩔 수 없었다. 주면 주는 대로 먹고, 가라면 가는 대로 끌려다니면서 ‘생각’을 다룰만한 여건이 안되었으니까. 이제 와서 너 먹고 싶은 대로 점심 메뉴를 골라 봐라, 하면서 선택지를 준대도 그녀는 마다했을 것이다. 통제당하는 삶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이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 보면, 제인은 늘 목숨이 걸린 선택의 갈림길에서 외줄 타기를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이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선택지는 과연 진짜일까? 델단이 그렇게…. 죽어 버렸는데도 난 또 다른 인간을 믿어도 되는 걸까? 눈앞의 양자택일은 동전 던지기의 도박과도 같았다. 오로지 행운이 따라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