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62)화 (62/95)

62화.

제인, 원랜 나만 알고 있었던 이름인데.

낯선 목소리를 통해 ‘제인’이라는 말을 듣자 속이 울렁거리다 못해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각하께서 제인에게도 잘해 주면 어쩌지, 제인의 구원자는 오로지 나여야 하는데, 제인에겐 나밖에 없어야 하는데. 제인 옆엔 나뿐이어야 하는데.

“…네.”

간신히 불쾌한 기분을 억누르고 대답했지만 어딘지 찝찝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럴 필요 없네. 잡일이나 도맡아 하기엔 그대는 귀중한 손님이 아닌가.”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다시 엑젤리스에 발붙인 이상, 녹스를 거스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예민한 주제에 입이 제멋대로 떠들었다. 그러나 일말의 이성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꺼내게 두진 않았다. 어차피 각하께서도 제인을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사 온 게 아니잖아요. 어차피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지 않나요? 이 정도는 아무 상관없지 않나요? 굳이 소유자를 따진다면 저 아닌가요? 눈썹이 점점 산처럼 솟는 모습이 그가 할 말을 다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다면 말해도 괜찮으니 말해 보게.”

타이르는 아버지처럼 녹스가 곧 터질 것 같은 비예단을 달랬다. 하지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속으로 삼킨 말은 할 수 없었다.

“날개, 제인의 날개를 복구하려면 몸 상태를 봐야 하니까요! 곁에서 잘 지켜보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거짓말. 신을 섬기고, 아픈 자를 치료하며, 인간과 이종의 평등을 논하던 소년은 그 마음속에서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비예단은 제인의 날개를 다시 돋게 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기껏 함께할 수 있게 됐는데, 형처럼 도망가게 둘 순 없지. 그것도 심지어 내 손으로 날개를 달아 주어서 말이야.

“능력에 문제는 없는 건가?”

거짓말은 기술이었다. 하면 할수록 늘지만, 해본 적이 없다면 어설픈 게 당연한 사교적 기술. 비예단은 얼마 전 셰이단에게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내곤 아차 싶었다.

“네.”

원래 비예단의 계획해 둔 대로라면 줄곧 능력이 불안정하다는 핑계를 대고, 제인의 날개 복구를 최대한 뒤로 미룰 생각이었는데, 벌써 들통나 버렸다. 어설픈 거짓말에 어설픈 실수가 겹쳐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거 다행이군.”

“늦게라도 각하께 도움 될 수 있어 다행이에요.”

또 뻔한 거짓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제법 능숙해진 것도 같았다. 그러나 녹스는 한 가지, 양치기 소년의 징후를 알아차렸다. 예전과는 달리 비예단이 어색하게 보인다 했더니, 그가 종종 눈을 두 번씩 연속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예상이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내게 도움이 되고 싶나?”

아주 짧은 침묵 뒤에 비예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그렇다면 사양 않고 도움받지. 정원의 꽃이 모두 시들었다는데, 그대가 가서 한 번 봐 주게. 아주 공들여 키운 거라 이대로 죽이기엔 아쉬워서.”

“물론이죠.”

두 번.

사람은 거짓말을 할 때 유독 자연스러워 보이고 싶어 했고, 비예단은 물론이라고 대답할 때 그러했다. 그가 공손히 인사를 한 뒤 집무실을 떠난 후에도 녹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도움이 되고 싶다는 게 거짓이 아니라는 점이 의문이었다.

* * *

정원을 다시 예전처럼 돌려놓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제인이 오밤중에 누군가와 함께 이 정원에서 놀고 있던 걸 목격한 이상, 그리고 그 뒷모습이 남자였던 이상 정원에 불을 지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형도 그렇고 그 누군지 모를 남자도 그렇고 왜 이렇게 다들 제인이게 들러붙는 것인지, 자신이 조금만 늦게 왔어도 이미 사랑의 도피를 하고도 남았을 거라 생각하니 차라리 형이 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떨떠름한 마음으로 정원에 도착하자 정원사가 불편한 자세로 쪼그려 앉은 채 헝겊으로 이파리를 닦고 있었다. 정원이 모두 쑥대밭이 되어있을 거란 상상과는 달리 멀쩡했다. 오히려 화사했다. 뭐지? 분명 제초제를 모조리 쏟아부었는데 왜 멀쩡하지? 비예단이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누구?”

정원사가 흙이 묻은 장갑으로 이마에 난 땀을 쓸어내며 건성으로 물었다.

“정원이 망가졌다고 들어서 도와드리려고….”

상황판단이 안 되어 우선 온 목적을 설명하자 정원사가 땀을 닦은 장갑을 흔들면서 됐다고 거절했다. 정원은 멀쩡하고, 녹스는 망가진 정원에 가보라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미 눈치챘다고 경고하는 걸까?

금발로 뒤덮인 작은 머리통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을 때, 정원사가 굽혔던 허리를 펴고 대답했다.

“삐쩍 마른 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어떤 미친놈이 제초제를 뿌리긴 했는데, 내가 밤새 닦았으니 이제 괜찮소. 이만 가봐요.”

애초에 제초제는 뿌려 놓고 짧으면 이틀에서 길면 사흘까지는 기다려야 효과가 있었다. 식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비예단은 홧김에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지만, 이유도 모른 채 실패했다는 이야길 전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이 부족했다곤 생각하지 않고 제초제가 이상하다고 믿었다. 그 하인이 날 못 믿고 다른 걸 줬나? 이왕 들킬 거였다면 정원이라도 망가트렸어야 했는데. 그럼 결국 그 제초제는 아무 소용도 없는 그냥 물이었나? 그럼 제인에게 먹여도 아무 쓸모도 없겠구나. 비예단의 지식이 부족한 탓에 제인은 제초제를 희석한 물을 먹어야 할뻔한 위기를 빠져나왔다.

* * *

제인을 진찰했던 의사는 의학서적을 다 확인하고 나서 완벽히 준비하고 녹스에게 보고하러 갔다. 이미 어떻게 말을 하면 좋을지 모두 대사를 생각해보았다. 요즘같이 곳곳에서 전투가 일어나는 시대에 의사는 나는 새도 떨어트릴 만큼의 권위를 가졌지만, 녹스의 앞에서만큼은 아니었다.

“대장님, 어제 진찰했던 환자의 증상에 대해 말씀드리려 하는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셰이단의 인도에 따라 녹스의 책상 앞까지 온 의사가 떨지 않고 말하려고 애썼다.

“어디가 안 좋나?”

“그게, 신전에서 사용하는 이테넬라에 의한 중독입니다.”

이테넬라. 녹스가 그 단어를 한 번 곱씹었다.

“치료할 수 없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안락사할 때 사용하는 약물인데, 소량 먹으면 몸이 마비되고 시야가 흐려지는 증상이 있거든요.”

진단을 설명하는 의사도 별 것 아니라는 듯 태연히 말했고, 전해 듣는 녹스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셰이단은 놀란 토끼 눈을 뜨고 있었다. 신전이 없는 엑젤리스에서 이테넬라를 구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별건 아닙니다. 마취용으로도 자주 사용하는 거라 해독만 해두면 크게 문제 될 일 없어요. 만약 죽이려 했다면 한꺼번에 투여했겠죠.”

셰이단의 반응이 너무 과하다 보니 근심을 덜어주려는 건지, 의사가 단단히 박힌 팔자주름을 사이로 편안한 미소를 보이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러나 셰이단은 엑젤리스에서 독살이 일어날뻔했다는 걸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용의자로는 비예단이 유력하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그의 부모가 자신과 동향이라 마음이 쓰이는 것인지, 안 그러던 아이가 갑자기 변해버린 모습이 안타까워 걱정되는 것인지 셰이단의 감은 눈 위로 짙은 그늘이 꼈다.

“해독제는?”

“예, 준비해 두었습니다.”

의사가 가방 겉주머니에 넣어둔 작은 유리병을 꺼내 흔들었다. 병의 반도 안 차 있는 노란색 액체가 넘실거렸다.

“그걸로 되겠나?”

그 액체를 노려보던 녹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슨 의미의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언뜻 들으면 걱정처럼 들렸다. 턱을 괸 그가 계속해서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애초에 이테넬라는 한 번에 물병 하나 정도는 먹어야 해서, 오죽하면 배 터져 죽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니까요.”

의사가 손으로 물병의 크기를 가늠하면서 ‘대충, 이 정도에요.’ 하는 게 족히 두 뼘은 넘어 보였다.

“당장 죽지는 않는단 소리군.”

“네, 이런 식으로 암살한다 쳐도 반년은 잡아먹을 겁니다. 그 전에 알아차리겠지만. 그런데 이테넬라를 어디서 구한 걸까요? 신전에서도 쉽게 구하기 힘든 건데.”

자신의 분야가 나와 유독 말이 많아진 의사가 설명을 잇다가 호기심을 비췄다. 잠자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녹스는 질문에 대답하기보단, 제 할 말을 먼저 전했다. 머뭇거리는 기색이 보였으나 늘 똑같은 무감정한 말투였다.

“이것도 같이.”

서랍에서 꺼내 든 건 작게 접은 쪽지였다. 의사는 그 쪽지가 진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약병과 함께 겉주머니에 챙겼다. 잘 넣었는지 두드려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슨 일이길래 대장이 이종에게 쪽지로 적어서 할 말이 있는지 알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무사히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뿐. 건강에 차도가 생기면 다시 보고하겠다는 의사의 말에 녹스는 필요 이상으로 매몰차게 거절했다. 비릿한 소독약 냄새가 옅어질 때쯤 셰이단이 조심스레 물었다.

“걱정되시는 거죠?”

여태 보여준 무관심한 반응들이 무색하게도 셰이단이 도출한 결론은 엉뚱했다. 그러나 주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의 의견은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었다. 녹스는 대답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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