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지킬 것들이 많아지면 사람은 두려워하기 마련이잖아요. 당신도 소중한 게 있죠?”
의사가 베개 밑에 어설프게 숨겨져 반쯤은 튀어나온 스노우 볼을 가리키며 말하자 제인이 베개 끝을 잡아당겨 보이지 않게 가렸다.
“그걸 지키려면 건강해 져야 해요.”
아이를 대하는 기술이 능숙해 보이는 그는 제인을 달래가며 진찰을 마쳤다. 겉보기엔 잠을 못 잔 것처럼만 보였지만, 확실히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도통 입을 열지 않는 제인 덕에 의사는 건강검진을 하러 온 사람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를 훑고 있었다.
“열이 조금 있고….”
가져온 종이에 그녀의 몸 상태를 꼼꼼히 기록하던 중, 하얀 소매 끝이 팽팽하게 펴졌다. 제인이 소심하게 잡아당겼다가 그가 쳐다보자 후다닥 손을 숨겼다.
“저, 저희는 원래 인간보다 체온이 높아서….”
겨우 말문을 연 제인이 버겁게 말을 끌었다. 의사는 그 짧은 순간에도 그녀가 말하는 중간중간 계속 침을 삼키는 걸 확인했다.
“목이 아픈가요?”
“아, 목에 뭔가 걸려서….”
“이물감이 느껴진다거나 얼얼한 통증이 오진 않고요?”
“…음.”
한번 트인 입은 진료를 수월하게 만들었다. 처음엔 가벼운 열을 동반한 목감기라고 예상했지만, 그녀의 몸 상태는 단순한 목감기라고 하기엔 수상한 점이 많았다. 음식의 맛이 쓰게 느껴지고, 속이 거북하며, 시야가 흐려진다. 제인이 말하는 걸 빠짐없이 적어낸 그는 종합적 판단을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 뒤 진료 가방을 챙겨 들었다.
짐작 가는 것이 있어 바로 보고를 올리지 않고 급히 본인의 방으로 돌아온 의사는 학생 시절 읽었던 책을 꺼내 들었다. 손때가 타 너덜너덜해진 표지에 ‘독에 의한 중독’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 * *
레이스 백작가. 귀족 간의 정치 싸움에 밀려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한 그 엘리트 가문은 수도에서 도망치는 것보다 새로운 시도를 선택했다. 아버지를 따라 학자의 길을 걸으려던 지금의 레이스 백작은 고리타분한 학문을 파는 대신 보석 시장에 뛰어들었다. 있는 줄도 몰랐던 뛰어난 사업 수완은 어느새 수도에 ‘레이스’라는 새로운 보석 브랜드를 만들어 냈고, 비로소 사교계에 큰 입지를 다지게 된 레이스 백작의 야망은 재물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명예가 필요했고, 마침 그에겐 미색이 뛰어난 외동딸이 있었다. 금지옥엽 큰 백작의 딸 율리나는 아버지의 계획대로 개국공신 가문의 차남과 약혼을 하게 되었다. 백작은 약혼 상대가 차남이라는 게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물러터진 장남과 비교했을 때 나중에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나마 위로했다. 그래서 로드게릭스의 부자가 노스어로 지원을 간다고 했을 때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반드시 명예를, 자랑거리를 들고 와라. 로드게릭스 가문은 충분히 그럴만한 위신이 있었다.
조국의 병사들이 귀환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레이스 백작은 돈을 듬뿍 바른 파티를 준비했다. 미래의 사돈이자 이번 전쟁에 톡톡히 공을 치렀을 로드게릭스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파티는 율리나의 약혼자가 아비를 죽인 죄로 작위를 박탈당했다는 가십거리로 채워졌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에 그는 며칠간 내리 술독에 빠져 살았다.
로드게릭스 가문을 지지하던 귀족들은 사교계에 영향력이 커진 레이스 백작에게 함께 탄원서를 제출하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 썩은 동아줄을 잡고 있다간 제 손까지 썩어 버릴까 지레 겁먹은 탓이었다. 율리나는 아버지가 자신의 약혼자를 돕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밤낮을 울었다.
그녀가 탈수로 실신하고 나서야 소중한 외동딸이 정략결혼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녹스는 이미 멀리 떠나버린 뒤였다. 백작은 딸이 슬픔에 빠져 무기력해지는 걸 원치 않았고, 율리나가 마음을 추스르자 바로 사업을 가르쳤다. 버릴 건 빨리 버리고 챙길 건 많이 챙겨야 바보 소리를 안 듣는단다. 사람에게 정을 붙이지 마라, 냉정해야 성공하는 법이란다, 일에 몰두하면 모든 게 잊힌단다,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단다, 얘야.
그렇게 서서히 성숙해지고 영악해진 레이스 가문의 외동딸, 율리나는 어느덧 혼기가 가득 찬 아가씨가 되었다. 그녀는 세상을 숫자로만 바라보는 냉혈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 속에선 여태 백마 탄 자신의 왕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반나절을 초조하게 앉아 있었더니 없던 습관이 생겼는지 비예단은 바른 자세로 앉아 있으면서도 다리를 흔들거렸다. 종종 무릎이 테이블에 부딪혀 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이보다 더 어울리는 때가 또 있을까, 지은 죄 때문에 그는 차분히 앉아 기다리는 이 시간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등을 받쳐 주는 푹신한 소파도 가시방석 같았고, 차분한 이 공기도 모두 자신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비예단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인 녹스는 아침 댓바람부터 할 이야기가 있다고 사람을 불러 놓고 보란 듯이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하는 척이었지만. 그나마 말을 붙일 상대였던 셰이단은 ‘주인님께서 급히 확인하셔야 할 사안이 있으니 잠시 앉아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정 없게 말하곤 진작 방을 나가 버렸다.
처음엔 급한 일이라길래 당연히 이해했지만, 누가 서류 몇 장을 5시간 가까이 보고 있는단 말인가. 불편한 윗사람과 언제까지인지 기약도 없이 같은 방에 있어야 한다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비예단은 귀족의 업무가 무엇인지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기에 잠자코 기다릴 뿐이었다. 언제쯤 끝나는지 궁금했어도, 녹스에게 물어볼 용기는 없었던 비예단은 주변을 둘러보며 시간을 죽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저자 순으로 꽂혀 있는 꽉 찬 책장, 내려앉은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러그, 책상과 마주 보고 있는 벽걸이 자명 시계,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옷걸이와 사용한 지 오래되어 보이는 벽난로.
모든 게 정갈하고 반듯한 이 방이 녹스와 무척 잘 어울렸다. 몇 번이고 확인한 자명 시계가 벌써 정오가 됐다며 소란스럽게 굴었다. 여태 종이가 팔락대는 소리를 제외하면 자신의 침 삼키는 소리, 소파가 바르작대는 소리뿐이 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에 본인 것이 아닌 소음이 나자 비예단은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이더니 결국 사레에 들렸다.
“으흑, 컥…!”
볼품없는 기침 소리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어지자, 보다 못한 녹스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꾸역꾸역 기침을 참는 게 안쓰러웠는지 책상 위에 있는 찻잔을 들고 와 건네주었다. 덥석 붙들고 한입에 털어 넣은 비예단은 그제야 진정이 됐는지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손등으로 문지르곤 감사합니다, 하고 쥐어짜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저, 다 마셔 버렸는데….”
곤란한 얼굴로 찻잔을 거꾸로 들어 털고 있는 비예단은 예전과 전혀 달라 보이는 게 없었다. 여전히 소극적이고, 여전히 저자세였다.
“신경 쓰지 말게, 오래 기다리게 했군.”
눈뜨자마자 집무실로 끌려와 여태 보고 있는데도 단 한 번을 벗지 않은 검은 가면은 거의 녹스와 한 몸인듯했다. 비예단은 계속 목을 가다듬는 와중에도 안 답답한가? 싶은 원초적인 호기심이 들었고, 당연한 순서처럼 그날의 대화가 떠올랐다.
‘내 외모가 남들 보기에 유약한지라, 그런 게 필요할 때도 있으니.’
하지만 자신은 이미 녹스의 얼굴을 한 차례 본데다, 그에게 어느 정도 신뢰를 받고 있다고 여겼는데도 계속 쓰고 있는 걸 보면 그 이유 말고도 다른 의미가 담겨있을 거라 추측했다.
녹스가 상석에 앉아 몸을 기댔다. 아침부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아침 기도 중이었던 자신을 불러왔는지 몰라도 드디어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과 함께 추상적이던 초조함이 덜컥 겁으로 변모했다. 혹시 누군가 정원에 제초제를 뿌린 게 자신이라고 이른 걸까, 그 죄를 물으려는 걸까. 태연하게 보이려 해도 자꾸만 억지로 미소 지은 입꼬리와 눈 밑이 파르르 떨려왔다.
“왜 잘못이라도 한 얼굴을 하곤.”
다정한 목소리에 뼈가 있었다. 그 가시를 발견하고 발라내던 비예단이 마치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슬며시 눈알을 굴려 녹스를 살폈다.
“농담일세.”
역시 아무도 모르는 건가? 비예단이 티 나게 안도했다. 그걸 몰라볼 리 없는 녹스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가 안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미 창고를 관리하는 하인에게서 그날 있었던 일을 모두 전달 받았던 녹스는 그런 비예단의 모습이 하찮다 못해 귀엽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 하실 말씀이라는 건….”
“그대가 요즘 제인에게 음식을 가져다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로챈 녹스가 요점을 꺼냈다. 이유를 묻는 말에 순간, 비예단의 얼굴이 찡그려졌고, 그 모든 찰나를 녹스는 하나씩 관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