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비예단은 예정된 연습 장소에 제초제를 뿌리는 대신 화단에 자라있는 식물들을 손으로 쥐어뜯기 시작했다. 풀잎을 따라 기어오르는 벌레를 손으로 눌러 죽인 뒤 다시 살려 내거나, 뭉친 흙을 부신 뒤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기도 했다. 그의 능력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애초에 선함과 악함으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구분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신을 믿느냐, 그것만이 신의 권능을 사용하는 자가 지켜야 할 규율이었다.
비예단은 제초제가 섞인 물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제 방에 보관하기로 했다. 소분하여 제인의 식사에 섞어줄 요량이었다. 제인이 아팠으면 했다. 죽지 않을 만큼 아파서 자신을 필요로 했으면 했다. 어차피 그녀가 죽더라도 자신이 옆에 있으니 걱정은 없었다. 비예단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소중한 게 없다면 만들면 되지. 제인도 곧 내가 소중해질 거야. 서로를 소중히 여기기 위해 지금 행하는 짓들은 모두 필요악이야. 비예단은 끝없는 자기 합리화로 전혀 죄책감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
* * *
밤새 자신을 괴롭히던 개인적인 감정을 겨우 털어낸 녹스가 마음을 가다듬으며 집무실에 도착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으나, 이미 뻣뻣하게 서 있는 두 남자가 그보다 먼저 도착해있었다.
“주인님! 급한 일정이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이제 오시면 어떡합니까?”
셰이단이 잔소리를 거듭하다 말고 한숨을 뱉었다. 유유자적 걸어가 의자에 앉은 녹스는 옆에서 뭐라 떠들던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수도에서 사절단이 오는 게 그렇게 큰일인가?”
이마에 힘줄이 돋을 만큼 참고 있는 셰이단은 서류를 들이밀었다.
“이래도 큰일이 아닌가요?”
코르도 가올테 백작 사망 건으로 조사차 방문하니 심문에 성실하게 임해주길 바란다는 내용과 함께 황제의 직인이 찍혀져 있었다. 이 대륙에 발붙이고 사는 이라면 결코 가벼이 넘길 일은 아니었다.
“다 예상한 일일세.”
“인간 노예를 거래했다는 서류도 함께 동봉했는데, 이 정도까지 개입이 올 정도면 심각한 겁니다.”
“별 수 없지.”
“그럼 대체 왜 그 고생을 하면서 가올테한테 서명하라고 한 겁니까?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될 거라 예상하셨으면서.”
뭘 믿고 이렇게 태연하실까. 가지고 있는 거라곤 죄다 불법 점거에다 불법 점유면서. 셰이단이 입밖에는 꺼낼 수 없는 불만을 속으로 씹으며 불리한 상황을 파훼할 방법을 떠올렸다. 수도에서 개입이 있을 거라곤 예상했지만, 황제 폐하가 직인을 찍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셰이단이 골머리를 앓는 신음을 냈다.
“지금 이미 오고 있을 텐데, 절대 못 막습니다.”
“절대라는 말은 없어.”
파수대 단장은 대장과 집사가 이렇게 말다툼을 하는 모습이 신기한지 상황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 성에서 녹스를 이렇게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셰이단밖에 없었다.
“네, 노스어 탈영병들이 내려오고 있는 병사들을 싹 쓸어 버리길 기도하는 방법도 있겠죠.”
어린 나이부터 제 아버지가 주인을 섬기는 모습을 봐오면서 자란 셰이단은 뼛속 깊이 주인을 존경하는 마음을 새겼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예전에나 지고한 귀족 신분이었지, 지금의 녹스는 파면당한 귀족. 정치계에선 평민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과거 로드게릭스 가문의 후손이 살아 있다는 걸 아니꼽게 보는 수도 귀족들이 아직도 많이 있을 텐데 까딱해서 실수라도 한다면 녹스는 귀족 살해죄로 사형당할 수도 있었다.
비록 녹스의 아버지와 친분이 깊었던 황제가 그를 눈감아주고 있다곤 해도, 조사를 위해 사절단을 보낼 정도면 황제조차 귀족의 등쌀에 못 이기는 상황이라고 짐작되었다. 녹스만 사형당하겠는가, 엑젤리스 모두가 반역자 신세가 될지도 몰랐다.
“원래 적은 적으로 몰아내는 법이지.”
파수대 단장이 이쯤 되어 자신은 왜 여기 불러왔는지에 대해 생각할 무렵, 이미 과도한 스트레스에 반쯤은 공황인 셰이단을 두고 녹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대가 할 일이 아주 막중해.”
“예, 명령만 내리신다면 완벽히 해내겠습니다.”
이미 한 차례 도망가는 노예, 제인을 붙잡은 이력이 있는 파수대 단장은 기세등등하게 명령을 기다렸다.
“수도의 사절단이 바람 협곡에 발을 디딘다면 충분히 알아듣게 위협하게.”
“…예?”
그러나 녹스가 내린 명령은 황제의 병사들에게 활을 겨누라는 명령이었다. 단장은 잘 못 들은 건 아닌지 멍청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인님!”
참다 참다 터진 셰이단이 한쪽 팔로 단장을 막아서며 녹스의 말에 반박했다.
“정말 반역자 집단이라도 꾸리실 생각입니까?”
“조만간 황제로 즉위한다면 내 그대들에게 자리 하나씩 약속하지.”
이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온다니, 셰이단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가 엑젤리스의 운영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하더라도 이건 분명 선을 넘은 직무 태만이었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납니다!”
“노스어 탈영병에게 기도라도 하게, 셰이단.”
녹스에게 명령을 번복할 마음은 없었다. 결국, 주인의 고집을 꺾지 못한 그들은 한 명은 넋을 놓아 버린 채로, 다른 한 명은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짊어진 채로 패배를 인정했다.
방에 혼자 남은 녹스도 셰이단의 말이 모두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수도의 사절단을 공격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그는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마음은 없었지만, 말을 잘 듣고 싶지도 않았다.
“황제 폐하….”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목소리를 지탱하는 건 명백한 적개심이었다. 지금보다 철없던 시절의 녹스는 황제가 자신의 가문, 로드게릭스의 원수라고 여겼었다. 자신의 가족을 오직 버리는 패로만 쓰려고 했던 아버지의 오랜 친구. 아버지를 살아 돌아올 리 없는 전쟁터에 내몰고, 검이라곤 잡아 본 적 없는 형의 출전까지 허락한 이 땅의 지고하신 황제 폐하, 아버지의 죽음을 그저 한 개인의 실수와 우발적 사고라며 불명예스러운 죽음으로 처리한 미친 노인네. 지금이야 분노가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다만, 그래도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 유치한 복수의 감정으로 황제의 병사들을 공격할 심산이냐 묻는다면 절대 아니라고 할 순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기사와 그 가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것이었다. 실수나 사고 따위가 아니었다. 녹스는 황제가 한 번이라도 그때 당신의 결정이 틀렸다는 생각을 들게 할 수 있다면, 반역죄든 뭐든 기꺼이 단두대에 목을 내밀어 줄 심산이었다.
* * *
제인은 의사를 접견했다. 병든 닭처럼 침대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찾아온 의사는 공손히 진단을 해봐도 괜찮겠냐 물었다. 하얀색 가운을 입은 그는 엑젤리스에서 막 정신을 차렸을 때 처음 만났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때의 기억이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그런지, 그녀는 그 하얀 가운이 서서히 자신에게 걸어올 때부터 이미 그날의 기억에 사로잡혔다.
“그럼 잠시 맥을 짚겠습니다.”
중지 손가락에 옆면에 굳은살이 박힌 손이 하얀 손목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그제야 의사는 제인이 겁을 먹은 상태라는 걸 알아챘다. 하긴, 처음 만남이 그랬으니 내 인상이 안 좋을 법도 하구나. 의사도 그날 녹스가 찾아와 깽판을 쳤던 기억이 스치면서 덜덜 떨고 있던 제인이 떠올랐다.
“그렇게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희끗한 머리가 군데군데 나 있는 그는 단단히 박힌 팔자주름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무표정을 하고 있어도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의사의 다독임에도 전혀 떨림이 멈추지 않자 맥을 짚던 손을 떼었다. 제인을 진료하라고 명령한 사람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선 어디가 안 좋은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아야 하는데, 이런 상태로라면 한마디도 못들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땐 많이 놀라셨죠? 처음 오신 날.”
그는 하얀 이불 위에 진료 가방을 풀어놓으며 이야기도 천천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게 진찰을 하라고 명령하신 분은 그날 봤던, 그 검은색 가면을 쓴 분이세요.”
“엑젤리스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엔 거칠어도 알고 보면 참 따뜻한 사람들이에요. 물론 아닌 사람도 몇 있겠지만.”
의사는 절대 이종에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거나 하진 않았다. 그 또한 평범한 인식을 가진, 이종을 옹호하거나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평생 가져본 적이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제인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말을 주절이는 건, 그저 그녀가 자신의 치료를 필요로 하는 환자이기 때문이고, 날개가 다친 새를 주워다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정도의 호의일 뿐이었다.
“엑젤리스는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꾸린 마을이에요. 모두 빼앗겨서 남은 것이라곤 없었지만, 그럼에도 또다시 손에 쥐고만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날이 서 있는 사람들이 마련한 마을.”
제인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묻는 것처럼 뚱한 얼굴로 꼼지락대는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속으론 그의 욕을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제 소중한 걸 다 빼앗은 인간들이 그딴 걸 논하다니, 웃기기 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