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악몽에 잠을 설친 녹스는 결국 해가 비스듬히 떠오를 때쯤 방을 나서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무덤가로 향했다. 토막 나 흩어진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서 고른 장소였지만, 그곳엔 이미 손님이 와있었다.
“대장님.”
이제 곧 물들어갈 가을 낙엽과 잘 어울리는 붉은 머리, 해일러였다.
“그대가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로.”
고개 숙여 인사하는 해일러를 본 체도 안 하고 무덤가에 선 그는 2년 전, 그날의 겨울과 같은 모습이었다. 꼿꼿한 자세였지만 처연한 얼굴이 오늘도 여전히 쓰라려 보였다.
“산책하다가 잠시 들렀습니다. 여기만큼 조용한 데가 없어서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주군에 대한 불경한 마음이 선을 넘어갈 때쯤이면 늘 이곳에서 생각을 정리하곤 했던 해일러는 오늘 밤도 연민과 애정에 몸서리치다, 자신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무덤을 찾은 것이었다.
녹스가 찾아올 줄 몰랐던 해일러는 이만 자리를 비켜 줘야 할지 망설이다 결국 아슬아슬해 보이는 녹스의 곁에 있기로 했다. 한 걸음 물러서서 그가 침묵하는 걸 보고 있으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염없이 서 있는지 궁금해졌다. 대장이 세간의 소문대로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일지, 아니면 버려질까 상처를 숨기는 늑대일지 알고 싶었다.
“대장님은 여기 오시면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무것도.”
그 말도 역시 거짓이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수척해진 얼굴로 새벽께에 찾아온 가족의 묘, 슬픔에 잠긴 눈, 평소답지 않게 처진 어깨는 그가 과거의 마수에 붙잡혀 있다고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심란함과 고단함이 버무려진 노인의 표정과 닮아 있었다.
“옛날 일들을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녹스는 괜히 아는 척하며 까불지 말라고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런 데에 감정을 소모할 기력이 없었다. 풍성하게 맺힌 나뭇잎의 꽃봉오리가 바람에 쓸려 떨어지는 걸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도 여유가 부족했다. 밤은 그토록 긴데, 새벽은 너무 짧았다.
“난 그 일이 일어난 뒤론 단 한 번도 과거를 곱씹은 적이 없어.”
그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대강 알고 있었다. 직접 듣거나 신빙성 있는 사람으로부터 전해 듣지도 않았지만, 그를 알게 되면서 언젠가부터 알게 되었던 이야기, 늘 녹스의 뒤를 망령처럼 따라다니는 소문. 엑젤리스의 절대적 금기 중 하나였기에 짐작되었다. 혈육의 피를 손에 묻힌 날, 그는 그날을 말하고 있었다.
“짊어지기엔 너무 벅차다고 여겨 돌이켜 볼 수도 없었지.”
마음의 벽보다 더 높은, 거대한 악몽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일지, 녹스는 자신의 심정을 계속해서 주절거렸다. 이렇게까지 흐트러질 줄 몰랐는데. 아버지처럼 단단한 사람이 되기로 했는데. 어느 하나 아버지의 발치에도 따라가는 게 없었다. 녹스는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생기는 미약한 자기혐오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해일러는 어떻게든 그가 상처를 보듬길, 더는 나빠지지 않길 바랐다. 그런 감정에 휩쓸려, 남은 생마저도 무성한 소문 속의 주인공이 되지 않길 빌었다.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아직 늦지 않았을 거예요.”
경멸에 찬 눈매가 자신을 향하고 나서야 해일러는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과거를 모두 수용한다면 나아질 거라는 섣부른 생각 때문에 튀어나온 실언이었다. 그가 가진 상처의 깊이를 전부 헤아리지 못한 탓이기도 했지만, 세상천지에 제 가족을 죽이고 후회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었다.
“그러면?”
아까처럼 힘 빠진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느 때와 똑같이, 남을 비웃을 때나 내던 목소리였다.
“그러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건가?”
비웃음 섞인 말이 마치 자해처럼 들렸다. 해일러에게 묻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엔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만 가지. 오전에 수도에서 서신이 온다 했으니.”
단단한 외피를 갑옷처럼 두른 갑각류처럼, 그는 다시 가면 뒤에 숨고 싶었다. 이 의미 없는 실랑이를 지속하면 이 역겨운 죄책감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 같았다.
친족 살해자.
그 오명을 뒤집어쓰기로 했다면 그에 걸맞게 살아야 했다. 칼에 찔려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한겨울 벌판에 버려져도 얼어 죽지 않을 것처럼. 여태 그랬던 것처럼. 그가 선택한 삶이었다. 버티는 것도, 견디는 것도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 * *
제인은 어젯밤에 무리한 것인지, 잠에 빠져들어 한참을 깨어나지 못했다. 어쩌면 이 무료한 시간을 잠으로 보낼 수 있다는 게 행운일 수도 있었지만, 제인은 제 몸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확실해졌다고 여겼다. 그러나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몰랐다. 비예단에게 부탁하기엔 그의 능력에 대한 부작용을 몰랐고, 마네나 다른 이들에게 부탁하기엔 받은 게 너무 많아 염치가 없었다.
사경 같은 꿈속에서 헤매는 중, 잠을 깨우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군지 궁금해할 필요도 없이 비예단이었다. 자연스럽게 제인에게 인사를 하고 들어와 테이블에 쟁반을 올려놓고, 식기를 건네는 비예단은 누가 봐도 열성적으로 병간호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숟가락을 쥔 제인은 어제보다 좀 더 묽은 수프를 떠먹었다. 인위적으로 씁쓸한 맛에 기침이 나왔다. 억지로 먹는 게 아니라면 절대 스스로 먹지는 않을 맛이었다.
“왜 그래요?”
정말 이상하다는 듯 물어보는 비예단의 표정엔 일종의 강요가 담겨있었다. 요즘 종종 음식을 남긴 탓에 그가 불쾌했을 거라 여긴 제인은 고개를 젓고 꾸역꾸역 수프를 입에 털어 넣었다. 혀가 마비되고 입안이 아릴 만큼 이상했다.
인간들 음식은 원래 이런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본 적이 얼마 없어 맛의 기준을 알 수 없었던 제인은 선량한 미소를 띄고 있는 비예단이 설마 음식에 뭔가를 탔을 거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어디 안 좋아요?”
잔뜩 찡그린 제인의 얼굴을 보고 비예단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 그냥 몸이 조금 안 좋아서….”
“피곤한가 보네요.”
제인은 제 몸이 근래 들어 안 좋아진 이유가 그저 햇빛도 못 받고, 움직이지도 않아서라고 여겨 둘러대기 바빴다. 비예단도 더 캐물을 생각은 없는지 바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밤늦게까지 산책을 하니 그렇죠.”
숟가락을 들고 있던 손이 풀어졌다. 땡그랑. 하고 식기가 쟁반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렷다. 그 소리가 마치 신호탄인 것처럼 분위기가 싸해졌다. 밤에 나간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거긴 둘 뿐이었는데. 비예단의 의도인지 실수인지 모를 말 한마디에 이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늘은 끝까지 곁에 못 있어 줄 것 같아요. 일이 있어서.”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급히 자리를 떠나는 것까지도 수상했지만, 그는 자리를 옮겨 더 악질적인 계획을 준비했다.
* * *
“절대 분수대 있는 정원 쪽엔 뿌리지 마세요.”
창고 비품을 담당하는 하인은 몇 번이고 같은 말로 비예단에게 주의를 시키었다.
“네, 이게 제초제에요?”
능력이 돌아왔는지 본다면서 창고에서 제초제를 빌리는 비예단도 그의 경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은 설마 멀쩡하게 생긴 사제가 그런 짓을 저지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지, 굳이 그의 훈련을 지켜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통에 든 제초제를 낑낑대며 옮기던 비예단이 뒤를 돌아 하인에게 인사를 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이 넓은 마당에 혼자가 되었다. 자리를 비운 정원사, 손에 든 제초제 한 통. 그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하인이 주의하라고 경고하였던 정원으로 뛰듯이 달려나간 비예단은 뚜껑을 열고 제초제를 정원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콸콸 쏟아지는 제초제가 화려하게 가꿔진 꽃들을 적시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한 통을 다 쓴 비예단이 분수대로 다가가 빈 통에 물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누가 볼까 염려스러웠는지 야생의 초식동물처럼 주변을 살폈다.
무게가 느껴지자 다급히 들고 정원을 벗어났다. 양심의 가책인지, 아니면 제초제가 들어있던 양보다 물을 더 많이 담아서인지 아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일부러 경비병이 많이 있는 성문 앞을 지나 빨래터를 거쳐, 원래 예정된 자리였던 구석의 화단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통을 몇 번이나 떨어트려 모서리가 찌그러져 있었다. 그 덕에 많은 사람이 비예단을 목격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태어나 처음, 자의로 저지른 범죄는 생각보다 짜릿하고 콩닥거리는 일이었다. 목격자는 없는지, 완전 범죄인지는 몰랐다. 이런 어설픈 짓은 금방 들킬 거라고 예상도 해두었다. 그러나 어린 사제인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할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