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왜, 넌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여기서 이렇게 사는 것보단 당연히 고향에 가고 싶지 않겠어요?”
제인이 기가 찬다는 말투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 얼빠진 얼굴에 마네가 여태 웃었던 것 중 가장 크게 웃었다.
“아, 미안. 내가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을 한 게 웃겨서.”
불만이 양 볼 가득 쌓여 뾰로통해져 있는 제인은 그새 마네와의 벽이 허물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럼 인간들과 지내면서 즐거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가 엉뚱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자의로 온 것도 아니고 끌려온 건데, 심지어 자유롭게 살던 자신을 노예로 만들어 버린 곳인데. 즐거웠던 적이 있을 리가 없잖아. 제인은 폭발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있을 리가….”
폭탄은 터지지 않았고, 잠잠해진 제인의 눈이 반짝였다. 글썽이는 눈물 탓이었다.
“델단…이랑 함께 했을 땐 즐거웠던 것도 같아요.”
마네는 그들의 사정을 다 알고 있었다. 비슷한 처지의 둘이 친분을 쌓았던 사이라는 것, 델단과 제인이 도망쳤던 일, 델단이 제인의 창문 앞 나무에서 자살한 사건부터 델단이 제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도.
“…구원자였겠지.”
마네가 혼잣말처럼 작게 읊조리자 제인이 동조했다.
“나를 구원하러 와 준 거라 여겼어요. 혼자 망망대해를 부유하는 나를, 지겨운 불행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 손을 내밀어 준 유일한 희망이라고….”
들고 있던 스노우 볼을 까닥이다가 힘겹게 나머지 말을 꺼냈다.
“내게 델단은 특별한 존재였는데, 그는 아니었던 거예요. 그가 알고 있던 나는 허상에나 존재했고, 델단은 그냥…….”
미친 사람이었어요.
마지막 말은 틀어막힌 울음에 삼켜져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기대와 실망은 비례하는 법이었다. 제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미치광이의 말에 믿음을 걸었고, 결국 제 마음에 상처를 낸 건 델단이 아닌 자신이었다. 마네는 그 절절한 고해에도 위로해 줄 마음은 없어 보였다. 대신 그는 또 다른 희망을 제인에게 심었다. 본디 희망이란, 절망을 양분 삼아 커지는 양날의 존재였다.
“나도 모두를 잃은 기억이 있어. 가족도, 주변 사람들도 내 손으로 다 망가트렸어.”
“….”
“잊고 싶었는데, 잊기 싫었어. 이럴 거면 차라리 혼자인 게 낫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혼자가 되니까 너무 무섭더라.”
마네가 아픈 기억들을 꺼냈다. 그 기억들은 마치 날카로운 파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꺼낼 때마다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파편과 기억이 뒤죽박죽 섞인 두서없는 말들은 모두 진실이었다.
“기억에 나마 남아 있던 내 소중했던 사람들을 꽃에 새겼었는데, 괜찮다면 같이 보러 갈래?”
그의 마음은 북받치는 감정에 뜨거웠을지언정, 손끝은 시렸다. 차가운 손을 홀린 것처럼 맞잡은 제인은 그와 함께 다른 세상처럼 느껴지던 문밖으로 나갔다. 피곤하다고 느꼈던 몸이 감각이 살아나듯 깨어났다. 답답한 방 안에서 질식해 죽어 가고 있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문 앞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그들의 외출을 보고도 묵인했다. 마네는 제인이 그들의 묵인과 침묵에 익숙해지길 바랐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있다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걸 깨닫길 바랐다.
제인은 비록 신발도 신지 않고 있었지만, 곱게 정돈된 정원의 땅은 말랑한 발바닥에 아무런 해도 가하지 못했다. 반쪽짜리 달이 뜬 정원의 밤은 저녁 내 꽃들에 물을 준 정원사 덕에 밤하늘처럼 반짝였다.
“이건 내 아버지.”
자신의 머리카락 색과 꼭 닮은 꽃을 가르치며 말하는 마네는 의외로 울적하지 않고 신나 보였다. 자신만의 비밀공간을 소개하는 것처럼 꽃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설명했다. 제인은 그중에서도 이름 없는 꽃이 있는지 물었다. 델단을 닮은 꽃을 찾는다면 꼭 기억해두고 싶었다.
“이건 어때?”
그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델단의 금발을 닮은, 아직 활짝 피지 않은 노란색 꽃을 가리켰다.
“마우툰이라는 꽃인데, 사막에서 자라는 귀한 품종이야.”
그 꽃은 나팔처럼 커다란 꽃망울을 견디기 버거웠는지, 아래로 고개를 축 늘어트리고 있었다.
“예뻐요. 마음에 들어요!”
제인이 주저앉아 그 무거워 보이는 꽃망울을 손바닥에 올려 놓고 밝게 웃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마네는 어쩌면 델단이 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델단이 죽은 덕에 제인이 그를 떠올리며 웃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내 지독한 생각을 하고 있다며 자신을 비난했다.
“이렇게 예쁜 꽃에 기억해 두고 싶은 사람 이름을 안 새겨 둔 거예요?”
제인의 질문에 마네는 말없이 미소로 대답했다. 마우툰 꽃은 활짝 핀 다음엔 꽃잎이 무거워 결국엔 모두 떨어뜨리고 마는 꽃이었다. 그 모습이 목을 매달고 죽어버린 델단을 닮아 골라 주었다는 걸, 굳이 그녀에게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제인이 꽃을 몇 번이고 쓰다듬은 뒤 마네에게 감사를 전했다. 마네는 제인을 보고 있지 않았다. 하늘에 휘영청 올라간 반쪽짜리 달을 감상 중이었다. 마네가 다시 주저앉아 있는 제인을 바라보았다. 눈이 반으로 접히면서 산뜻한 미소가 올라왔다.
“내가 구원자가 되어 줄 수도 있어.”
달빛이 후광처럼 비춰 그림자 진 그의 실루엣이 마치 전지전능한 신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혹은 구원을 위해 내려온 천사처럼, 그가 정원 사이에 앉아있는 제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원한다면.”
제인은 덥석 그 손을 잡았다. 독이 든 성배일수록 달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 * *
아침부터 모인 기사단장들은 각자의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주된 내용은 파수대가 발견한 시체에 대한 것이었다. 황무지에 시체를 버리고 달아나는 일이야 왕왕 있는 사건이었지만, 상황이 안 좋다 보니 모두가 진지한 대응을 원했다.
엑젤리스의 핵심 병력인 파수대는 직접 나서서 사건의 원인을 조사해야 한다고 청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주민들은 동요할 것이고, 그 동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초동 대응이 중요하다는 의견을 침을 튀겨가며 강력히 주장했다.
마법사들의 수장인 빅토르는 녹지화 사업을 잠시 축소하고 엑젤리스를 둘러싼 거대한 보호막을 생성하는 걸 연구하고 싶다고 의견을 냈다. 들이는 인력과 자원에 비교하면 효율성이 떨어져 빈번히 거절만 당했던 사안이었다.
그 회의에서 나온 안건들은 매번 반려를 당했던 내용들이 대부분이었음에도, 이번만큼은 녹스가 직접 허가를 내렸다. 그는 다들 걱정이 한참인 가운데에서도 여유로워 보였다. 어쩌면 정신이 다른데에 가 있는 걸 수도 있었다. 오래 함께해온 루이스라면 그의 상태를 쉽게 알아챌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루이스가 늦는군.”
집무실로 돌아온 녹스는 회의 안건들에 대해 고민하기보단, 루이스를 기다리느라 초조해하고 있었다. 이종에 관해선 잘 알려지지 않은 데다, 연구조차 꺼리는 분야이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책 한 권 수준으로 가볍게 접근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수족이나 다름없었던 루이스가 없으니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별일 없을 겁니다.”
셰이단은 의미 없는 맞장구를 치며 녹스에게 도착한 편지들을 분리하고 있었다.
율리나 레이스, 율리나 레이스….
오늘도 다섯 통에 달하는 편지가 도착해있었다. 녹스가 보면 괜히 심기가 불편할까 후다닥 찢어 버린 그의 손끝에 복숭아 향기가 남아있었다.
* * *
계속해서 신경 쓸 일이 자주 발생했던 녹스는 최근 들어 꿈자리가 사나웠다. 오늘도 반듯이 누워 잠들었던 그는 홀로 끙끙 앓고 있었다. 그리워 마지못한 가족이 나오는 꿈은 언제부턴가 악몽이 되었다.
매번 시작은 같았다. 아버지와 함께 검술 훈련을 하는 어릴 적 모습. 출구 없는 막다른 길목임을 알면서도 하염없이 도망칠 수밖에 없는 무의식의 공간. 오랜 세월 그토록 피하고 싶던,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순간을 마주해야만 하는 이 순환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디딘 바닥이 물렁했다, 단단했다, 삐걱거렸다. 걸어갈 수밖에 없는 이 길이 너무 힘들어서 고작 13살의 녹스는 울고 있었다.
심장에 칼이 꽂힌 듯, 벌떡 몸을 일으킨 녹스는 땀에 젖어 눅눅해진 몸이 바다에 가라앉은 난파선 같다고 생각했다. 온갖 금은보화를 가득 싣고 떠난 배가 단 한 번의 실수로 깊은 심해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자신도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가진 것들을 모두 내어 놓고 나서야 가치를 깨달았다. 겨우 목숨을 건진 선장이 심해에 파묻힌 금덩이를 아쉬워해 바다를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그도 똑같았다.
형이 외치던 목소리, 귓가에 느껴지는 바람, 검을 타고 손을 적시는 뜨거운 피. 눈을 뜨고 나서도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는 손바닥을 적신 땀이 혹시 피는 아닐지, 어둠 속에서 간신히 손을 확인 후에야 안심했다. 무거운 몸이 침대에 파묻혔다. 오랜만에 찾아온 농도 짙은 불행은 녹스를 무기력에 빠트렸다. 깨어나고서도 그 악몽을 떨쳐낼 수 없었던 건, 그것이 악몽이 아닌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삶을 짓밟고 올라선 악몽에 그는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하….”
내면에 담긴 불안함과 연약함이 한숨을 통해 형태를 갖추었다.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붙잡아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불안의 기원을 알 수 없어 더 불안했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 유난히 깊고 어두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비록 자신의 세계는 어두워도, 언젠가 밖으로 나간 다른 세상은 빛이 만연하길 바라며,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