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이상하지 않습니까?”
녹스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빼내며 대답했다.
“이상하긴 해.”
“…그게 전부인가요?”
“사랑이 식었을 수도 있지 않나.”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대답하는 녹스의 말에도 셰이단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제인을 신경 쓰는 이유는 동정심, 연민……. 그런 결이 아니었다. 비예단이 나쁜 마음을 먹었을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계속해서 심란하게 굴던 그는 결국 녹스에게 일에 방해된다며 축객을 당하고 말았다.
녹스가 관심이 없다면, 직접 알아낼 심산으로 머리를 굴렸다. 제인의 방 창문을 막아 버리는 탓에 그녀를 감시했던 헤티아도 더는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녀가 있을 기사 숙소로 향했다.
“제인이요?”
오후가 되어도 부재이던 헤티아가 저녁 식사 시간에 나타났다. 셰이단도 곧 녹스의 식사를 준비하러 가봐야 하는 터라 헤티아를 만나자마자 급히 용건부터 꺼냈다.
“아무래도 요즘 근황은 모르시겠죠?”
당연히 모를 거라는 전제를 깔고 묻는 말에 헤티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모른다고 누가 그래요?”
“…네?”
손을 옆구리에 올리고 어이없다는 듯 말하는 헤티아의 태도에 셰이단은 더 당황했다.
“그야 창문이 막혔지 않습니까.”
헤티아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옆 방, 비어 있던데요?”
돌로 된 벽이다 보니 구멍을 뚫고 볼 수는 없었지만, 하루종일 벽에 귀를 대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헤티아는 자기가 알아낸 정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게 기뻤는지,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그게 대장의 곁에 가장 오랜 시간 있는 셰이단이었기에 꺼내 놓을 수 있었다.
“한참 말이 없길래 나간 줄 알았더니,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던 거더라고요. 근데 그 여자, 비예단인가 뭔가 하는 그 애가 가져다 주는 밥 먹고 나서 부 터 좀 안 좋아 보이데요? 식기 치우는 하녀가 와서 계속 괜찮냐고 묻는 거 같던데.”
“언제부터요?”
“좀 됐죠. 일주일은 넘었어요.”
역시. 셰이단은 이상하다고 여긴 점이 풀리는 기분에 묵은 체증이 내려갔지만, 또 다른 궁금증이 쌓였다. 비예단은 제인을 좋아하는 걸로 아는데, 그게 아니었나. 한참을 헤티아를 세워 놓고 눈을 굴리던 셰이단이 깨달은 듯 손가락을 튕겼다. 어쩌면, 자기 형이 죽은 게 제인의 탓이라 생각하고 복수를 계획하는 걸지도 몰랐다.
“저, 근데 집사님. 저번부터 봤었는데 그 은발 남자는 누구예요? 대장님이랑 같은 은발이던데.”
후련한 느낌에 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던 셰이단이 그 말에 다시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그건 궁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도움을 구하러 왔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얼굴이 싹 굳은 채 냉정하게 대답하는 그 때문에 어느 상황에도 능청을 부리던 헤티아가 얼떨결에 알았다 대답했다. 다급히 가는 뒷모습을 보니 대장한테 보고하러 가는듯했다. 단물만 빼먹고 버리네, 참나. 헤티아는 똥 밟았다고 생각하며 다시 숙소 식당으로 향했다.
방해된다고 내쫓았던 셰이단이 다시 돌아오자 녹스가 짜증이 가득 담긴 손짓으로 서류를 넘겼다. 셰이단도 원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여 최대한 요점을 정리해 빠르게 말했다.
“비예단이 제인에게 복수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예단이 가져다 준 식사를 먹고 건강이 급속도로 안 좋아진 게 확실하니까요.”
음식에 독이라도 타는 걸까.
셰이단은 비예단이 그녀를 죽이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마음속으로 거의 확정을 지은 상태였지만 죽이려면 한 방에 죽였지, 굳이 그렇게 천천히 시간을 두는 이유를 몰랐다. 벌써 며칠이나 됐다던데.
“흠, 복수할 때까지만이라도 엑젤리스에 남아있겠군.”
애초에 제인을 데려온 이유는 비예단을 붙잡아 놓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었다.
“어차피 그 사제를 잡아 두려고 들여놓은 포대 자루인데, 상관없지 않나.”
녹스는 구태여 신경 쓰지 않으려 하는 게 눈에 보였다. 진지하게 고민 중인 셰이단을 흘긋 본 녹스가 그냥 두라는 의미로 넌지시 말했다. 더는 자신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비예단이 그럴 성격은 아니어 보였는데, 혹시나 걱정되는 마음에 말씀드렸습니다.”
녹스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셰이단은 자신이 너무 과민반응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말대로 더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그럴수록 점점 그 미궁이 또렷해졌다. 순박한 시골 소년인 비예단이 그런 마음을 먹었을 리 없는데,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 * *
마네는 져가는 노을을 보며 벤치에 기대 한 줌 남은 햇빛을 받고 있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려 했었는데, 눈을 감으니 계속 그 여자가 신경 쓰였다.
아프다고 했던가. 방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는데 마음이 아프면 몰라도 몸이 아플 일은 또 뭐람.
쫓아내려고 해도 끊임없이 끄집어내지는 생각에 머리는 쉴 틈이 없었다. 걱정이 되다가도 짜증이 났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접근했었는데, 이젠 자주보다 보니 정이 들어 그런 것인지 바보같이 당하는 꼴을 보기가 싫었다. 결국, 벤치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요즈음 익숙해진 곳으로 향했다.
“오늘도 오셨네요.”
제인이 곧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마네를 반겼다. 억지로 졸음을 참고 있다는 걸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일정도 없는데 왜 저렇게 애를 쓰며 잠을 참는 건지 궁금했다.
“…당신이 왔다는 건 지금은 밤이라는 거고요.”
딱딱하게 막혀있는 창문을 습관적으로 바라본 제인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졸리면 자도 되는데, 내가 방해했나 봐.”
이만 나갈까? 하고 뒷걸음질을 치려는 마네를 제인이 붙잡았다.
“오늘 온종일 잔 거 같은데, 잠깐이라도 깨어 있을래요.”
“하루 종일 잤어?”
피로가 가득 낀 얼굴이 도통 온종일 잔 사람의 모습으론 보이지 않았다.
“몸이 좀 안 좋은가 봐요.”
비예단이 가져다 준 음식에 문제가 있을 거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제인이 순수하기 그지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의든 타의든 몇 번이나 잘린 손가락과 찢어진 상처를 붙여 준 사람이 자신을 해칠 거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눈에 눈물이 고일 만큼 하품을 한 제인이 뺨을 몇 번 때리며 잠에서 깨기 위해 노력했다.
“…성에 유능한 사제가 있다고 하던데, 그 사람은 별말 안 해?”
마네가 은근히 비예단을 화두에 올렸다.
“음, 능력을 쓸 때마다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는데 고작 졸려 하는 사람한테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부작용? 황당하리만치 순진하고 배려심 깊은 대답에 마네가 헛숨을 들이켰다. 체력적으로 힘에 부칠 수는 있겠으나, 사제들이 치유 능력을 발휘하는데 부작용이 있다고 보고된 사례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신의 권능을 빌어 사용하는 힘인데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비예단이 능력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 그녀에게 굳이 사실을 전해 줄 필요는 없었다. 오해든 뭐든 좋으니, 그가 ‘일부러’ 안 해준다고 여기게 해주고 싶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하던 그는 문득 새로운 접근이 떠올랐다.
“이종들에겐 그런 게 있나 보네? 사제한테는 그런 부작용이 있을 리가 없는데. ”
제인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인간들은 모르는, 이종들의 약점을 함부로 공개할 순 없는 노릇인데, 설마 묻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어…. 보통은.”
뭐라 둘러댈까 고민하는 게 눈에 선했다. 결국, 그녀는 에둘러 표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제약이 있기도 해요.”
마네가 가진 이종들에 대한 호기심은 탐구의 영역보다 좀 더 깊어 보였다. 물속에서 숨 쉴 수 있는 종족이 있대! 라고 한다면 보통은 ‘신기하다.’ 수준에서 끝나겠지만, 그는 집요하게 얼마나 오래 가능하냐고 묻을 것 같았다. 주변에 이종이 있다더니, 각별한 사이였나? 제인은 그가 알고 있는 이종이 궁금했다. 더 정확히는, 무슨 사이였는지가 궁금했다.
“알고 있다는 그 이종은…. 어떤데요?”
마네가 가면처럼 씌우고 있던 미소를 단단하게 굳혔다. 대답을 꺼리는 건 아닌 모양인지, 입술을 달싹이긴 했지만, 뭐라 말할지 고민되는 모양이었다.
“그냥, 평범해.”
긴 고민 끝에 내놓은 답은 기운 빠지는 것이었다. 좀 더 알고 싶은데, 비몽사몽 한 기운이 없던 용기를 불어 넣었는지 제인이 떼를 쓰듯 계속해서 질문을 꺼내놓았다. 그 이종은 고향에 가고 싶어 하지 않냐 했더니 이미 고향에 살고 있다 답하고, 사냥꾼들이 위험하지 않냐는 질문엔 감히 그럴 생각도 못 할 것이라 답했다. 마네가 대답하면 할수록 제인은 점점 더 호기심에 빠졌다.
“어디서, 뭐하면서 살고 있는데요?”
계속해서 적당히 둘러대는 마네에게 지친 그녀가 반쯤은 포기하는 심정으로 물은 마지막 질문엔 답이 돌아오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인간들이랑 살고 있어.”
당연한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노예로서 살고 있겠지, 그러니까 인간인 당신과 교류가 있었던 게 아니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아무리 졸음 속에 얻은 용기라도 차마 거기까진 어려웠다. 따지는 말 대신에 심통 가득한 그녀의 얼굴이 마네에게 핀잔을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