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56)화 (56/95)

56화.

“이 램프에 백 일 동안 소원을 빌고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가 이뤄 줄게요.”

대신 다른 결말을 내놓았다. 허무맹랑한 소리였지만 장난처럼 꺼낸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내 소원이 뭔 줄 알고?”

마네의 눈에 순간 진지하게 빛이 띄었다가 다시 장난기 가득하게 바뀌었다.

“장난, 장난. 어제는 재미있었어?”

“재미있었어요. 신기한 것도 많고.”

“너만 원한다면 그 정돈 내가 언제든 해줄 수 있는데.”

‘언제든.’ 그 말은 마치 마법처럼 느껴졌다. 답답했던 저주를 풀어주고, 꼼짝없이 감옥에서 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준 마네라면 그런 마법 정도는 손쉽게 부릴 수 있을 것처럼.

“말만 잘 듣는다면 말이야.”

“저는 당신들이 말하는 짐승이 아니에요.”

어쩌면 동경하는 느낌으로 그를 바라보던 제인이 한숨 섞인 말을 뱉었지만,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뱉는 것도 이 사람 앞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처지가 비탄스러웠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하지만 세상이 그렇잖아. 노예는 보호자가 필요한 게 이 나라의 법이니까.”

“인간들이 만든 엉터리 법이니까요.”

마네의 말도, 제인의 말도 틀린 것은 없었다. 인간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 땅에서 인간이 군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소수의 인원이 그 법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것도 맞는 일이었으니까. 어쩐지 무거워진 대화 주제가 자신이 지나치게 몰입한 탓이라고 생각한 제인이 다른 궁금했던 걸 물었다.

“다른 이종들은 아무도 없나요?”

“글쎄, 가장 최근에 본건 전쟁터 용병들?”

“그들은 자발적으로 인간을 돕는 거예요?”

모리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종 용병들에게 살해당했다던 부모님들,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 한다던 이종들. 한 번도 그렇게 포악한 종족을 본 적 없었던 제인이 호기심이 가득한 어투로 물었다.

“아니. 이종 용병들이 속해 있는 길드가 있는데, 말만 용병이고 사실은 그 길드 소속 노예들.”

“아….”

제인은 그럼 그렇지, 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나보단 제인이 이종들에 대해 더 많이 알 텐데.”

“그건 그렇죠.”

“그럼, 궁금한 거 물어봐도 돼?”

이 질문을 위해 여태 기다려왔다는 듯, 몸을 제인에게 기울인 마네가 그녀의 말 한마디에 집중하고 있었다.

“제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긍정의 대답을 받은 마네는 다행이라며 속삭이곤, 천천히 입을 뗐다.

“늑대 이종도 있어?”

그 질문을 듣자마자 제인의 머릿속엔 검은 늑대가 그려졌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하루 두 끼 제공되는 제인의 식사는 비예단이 직접 식당에서 받아 들고 올라갔다. 며칠이 지속되니 주방장도, 하녀들도 모두 익숙해진 상태였고 제인 또한 불만이 없었다.

“오늘은 다 안 먹어요?”

제인은 아침 식사의 절반가량을 남기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요즘 들어 급속도로 몸이 안 좋아진 것인지, 속이 더부룩하고, 피로해 계속 잠이 쏟아졌다. 식기를 치우러 온 하녀가 놀랄 정도로 그녀의 안색은 나빠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먹어봐요.”

비예단이 다시 제인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 줬지만, 힘없이 떨어트렸다. 최대한 시늉이라도 해야 그가 기분 나쁘게 하지 않을 텐데, 도저히 그럴 힘이 안 났다. 졸린 탓인지 서서히 눈이 감겼다. 제인은 그렇게 밥을 먹는 와중에 지쳐 쓰러진 것처럼 잠에 빠졌다.

비예단은 충분히 걱정할만한 상황에서도 만족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당장 치유를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없어진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기는커녕, 광장에서 다친 아이를 모른척했던 것처럼 제인을 외면했다.

“음….”

태연히 제인의 이마에 손을 짚는 그는 전과는 전혀 다른 성정의 사람이 되어있었다. 소심하고 낯가리는 소년에서 감정이 결여된 어른으로 성장한 것처럼, 그는 신을 모시는 사람인데도 아픈 생명을 외면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바꾸어 놨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너무나 많았다. 가장 최근 하나뿐인 가족을 잃은 아픔과 18년간 부모 대신 자신을 챙겨 주던 신전 사람들과 이웃들에 대한 배신감, 불타버린 부모의 마지막 유품, 그리고 가슴 따가운 첫사랑까지.

그는 사춘기 소년처럼 마음에 태풍이 휘몰아치다가도 지평선이 보이는 바다처럼 잔잔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본성을 숨겼던 건지, 상황이 사람을 바꾼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본인은 자신이 변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비예단은 식기를 식당에 돌려준 뒤 양초를 챙겨 다시 제인의 방으로 향했다. 마네가 제인의 침대 쪽으로 당겨 놓았었던 의자에 앉았다. 눈을 뜰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있을 심산이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눈만 끔뻑거리며 자는 제인을 바라보는 모습은 꽤 섬뜩했다.

어두운 방 안에 녹색 눈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제인이 고르게 내뱉는 숨, 꿈을 꾸고 있는지 움찔거리는 눈매, 종종 우물대는 입술을 감시라도 하듯 꼼꼼히 지켜보았다. 누군가 그 광경을 지켜보았더라면 소름이 끼쳤을 게 분명했다. 몇 시간 동안이나 정자세로 앉아 자는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모습은 확실히 수상했다.

“으음….”

“아, 일어났어요?”

제인이 또다시 흐리멍덩해진 시야를 쫓아내기 위해 눈을 비볐다. 시력이 나빠진 것처럼 모든 게 뭉뚱그려져 보이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옆에 아직도 비예단이 있는걸 보고 당황한 그녀는 곧 사과하는 것처럼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잠든 게 미안한 눈치였다.

“괜찮아요. 피곤했을 수도 있죠.”

“제가 얼마나 잠든 거예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이 방에서 알 방법은 없었다. 비예단은 대충 얼버무리며 삼십 분? 하고 중얼거리더니, 본론을 꺼냈다.

“형이랑은 많이 친했어요?”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들은 뜬금없는 질문에 말문이 막힌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이종만 아니었더라도 각별한 사이가 되었을 거라 장담했다.

“그렇구나.”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입술을 핥은 비예단은 속상해 보였다. 그는 제인이 형보다 자신과 더 오래 알고 지냈음에도, 자신이 해준 게 더 많음에도 둘 사이에 벽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못내 서운했다. 형이 죽은 건 정말 슬픈 일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예를 들면, 질투에 빗대어 표현할 수 있는 음습한 마음이었다.

“델단은 좋은 사람이었어요.”

비록 마지막에 날 버렸지만.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혈육을 잃은 사람에게 구태여 할 필요가 없는 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예단은 제인이 삼켜 버린 말들을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형이랑 저는 닮았어요.”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지만, 비슷한 말을 고르다 보니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비예단의 속내를 제인은 알지 못했다.

“왜 못 알아봤나 싶을 만큼 닮았어요. 델단이랑.”

얼떨결에 맞장구친 제인은 곰곰이 그의 얼굴을 뜯어봤다. 폐가에 갇혀있을 때의 비예단을 떠올린다면, 분명 델단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을 제외하고도 옛날, 그가 가졌던 소년의 느낌은 형과 닮아있었다.

“그러니까 형이 보고 싶을 땐 날 봐도 돼요.”

하지만 지금의 비예단은 달랐다. 순박한 눈도, 살짝 올라가 있던 입꼬리도 없이 완전 다른 사람 같았다. 제인은 가족을 잃은 사람의 일시적인 좌절감 혹은 우울감 때문에 변한 거라 여겼다. 그 원인이 자신한테 있을 거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 * *

셰이단은 주방장과 하녀장을 통해 최근 비예단의 이상한 점을 보고받았다. 구태여 식사를 가져다주는 것은 짝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호감을 얻기 위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지만, 식기를 가져갈 때까지 문 앞에서 지켜보는 건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이상한 점이었다.

심지어 제인의 문 앞을 지키는 경비에게 보고받기론, 오늘 4시간을 제인의 방에 있었다고 했다.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했는데 무려 4시간을, 그 아무것도 없고 컴컴한 방에서 무얼 했을까. 제 주인은 제인과 비예단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지 않아 했지만, 이것만큼은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뭐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셰이단의 보고를 들은 녹스의 대답은 냉소적이다 못해 추웠다. 전혀 관심도 없다는 식의 대답이었다.

“하녀에게 듣기론 제인의 건강이 안 좋아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경비병들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겁에 질려 도망갈 것 같았던 비예단이 직접 식사를 들고 가 경비가 지키고 있는 문 앞을 지나쳐서 그녀에게 밥을 가져다 줬다.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나와서, 기어코 식기를 가져가는 하녀가 들릴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렸다. 비예단이 식사를 가져다 준 뒤로 제인의 몸이 계속해서 안 좋아졌다. 누가 봐도 수상한 정황이었다.

“그래.”

하지만 녹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삼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추리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셰이단은 왠지 김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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