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제인! 아침 식사예요.”
해가 떠서 모두가 움직이는 시간에도 씻지도 않은 채 여전히 침대에 앉아있는 제인은 귀족가의 막내딸처럼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시간이 아침인지, 밤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캄캄한 방에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비예단이 제 방에서 챙겨온 양초 몇 개에 불을 붙여 침대 탁상에 올려 두었다. 방이 환해지긴 했으나, 고작이었다.
“아침….”
가만히 들어보면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실제인지, 환청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어제 둘러본 반짝이던 야시장과 지금의 현실이 격차가 너무 컸던 탓에 제인은 평소보다 더 울적한 상태였다.
밥이 눈앞에 있어도 한 숟갈도 뜨지 않는 그녀는 비예단이 다 먹을 때까지 가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서야 수저를 들었다. 수프는 씁쓸했다. 입이 텁텁해서인가? 제인이 살짝 인상을 찡그리자 비예단은 저도 모르게 긴장을 했다. 그릇이 모두 비워진 걸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방은 어두운데.”
제인이 다 먹은 그릇을 치우고 옆에 두었던 스노우 볼을 들었다.
“이 안 만큼은 환하더라고요.”
밤새 스노우 볼을 흔든 모양인지, 자세히 보니 눈 밑이 퀭했다. 자신이 준 선물을 이토록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비예단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도 그는 밥을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느니, 편식하지 말아야 한다느니 하며 잔소리를 했다. 정작 뭔가를 먹어야 할 건 그동안 홀쭉해진 건 본인이었는데도, 제인이 무슨 금지옥엽 키운 자식이라도 되는 양 살뜰히 보살폈다.
한참을 혼자 떠든 비예단은 그녀가 피곤해하자 황급히 방을 나갔다.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겁지겁 나가는 통에 제인이 고맙다고 하는 인사도 듣지 못했다. 그렇게 급한 볼일이 있는 양 나간 비예단은 제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참을 제인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식기를 치우러 온 하녀는 왜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부러 모른척했다.
“실례합니다.”
하녀는 한쪽에 정갈히 정리된 쟁반을 들고 다시 식당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제인이 비틀거리지만 않았다면.
“괜찮으세요?”
이종에게 손을 대는 것이 찝찝한 모양인지 손길이 가다 멈추었다. 제인은 침대에 앉은 채로 고꾸라질 뻔했다가 도로 정신을 차리고 베개에 몸을 기댔다.
“어디 아픈 거예요?”
느닷없이 폐사라도 한다면 가장 마지막에 만난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게 뻔했으니, 내키지 않더라도 뭔가는 해야 했었다. 하녀가 멀찍이 떨어져 물었다.
“의사가 필요하세요?”
제인은 하녀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베개에 기댄 그녀는 금세 잠에 빠진 것처럼 쌕쌕대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녀는 잠들었구나, 팔자 좋네. 라고 생각하며 쟁반을 챙겨 나왔다. 비예단은 여전히 문 앞을 지키고 있었고, 나가는 자신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예전엔 순박한 시골 소년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사람이 꺼림칙하게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저녁 식사 시간에도 비예단은 식당을 내려왔다. 굳이 자신이 가져다 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제인의 식사 당번을 맡은 하녀는 계속해서 곤욕을 겪었다. 제인도 두 번이나 그가 방문하자 의문이 들었지만, 그릇을 다 비우는 걸 바라보는 그 진지한 얼굴에 묻기를 포기했다. 단순히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거라 여기려던 순간, 비예단이 방문을 나서기 전에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주는 건 먹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제인이 문가에 선 비예단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자고, 먹고… 사용인들은 그런 삶을 부러워해요. 제인, 당신은 귀족도 아닌데 그 부러움을 독차지하고 있어요.”
요컨대, 사용인들이 제인을 질투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안에 뭘 넣을지 몰라요. 벌레라면 다행이겠지만.”
선한 얼굴이었다. 근래 계속 날카로워 보였는데, 그 말을 할 때만큼은 선해 보였다. 하물며 예전에 모리나라는 하녀와 소동이 있었던 제인은 그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 * *
왜 이렇게 피곤하지? 비예단의 말대로 먹고 자는 것밖에 하는 게 없는데 계속 몸이 축축 처지고, 시야가 흐려졌다. 잠을 너무 많이 자서 두통이 일었다. 지금이 얼마나 됐을까. 올려 놓은 양초가 모두 녹아 단단히 굳어 있었다. 밤인지, 새벽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눈앞이 뿌옇게 변해 눈을 몇 번 비비자 시야가 좀 밝아지는 것도 같았다.
비몽사몽 한 상태로 앉아서 졸고 있을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렸다. 벌써 아침인가? 싶은 마음에 창문을 쳐다보았지만, 단단하게 막힌 나무판만 보일 뿐이었다. 턱이 빠지게 하품을 한 번 한 제인은 아직 배고프지도 않은데, 비예단이 보는 눈앞에서 다 먹을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못 먹겠다고 하면 되었지만 언젠가 들었던 말처럼, 뼛속까지 노예근성이 자리 잡은 제인은 거절 혹은 저항할 생각 따위 들지 않았다.
“제인?”
혼자 사경을 헤매는 것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비예단의 앳되고 가녀린 음성은 아니었다.
“야시장 구경 다녀왔다면서?”
“아….”
세 번째 노크가 울리고 곧장 열린 문 앞엔 마네가 서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그는 평소의 잔잔한 목소리가 아닌 밝은 느낌이 다분했다. 감옥에 있던 저를 꺼내준 게 그라는 걸 알면서도 감사함이 들기도 전에, 옆에 올려둔 스노우 볼을 황급히 숨겼다. 어색하게 뒷짐 진 모습에 마네가 고개를 빼내며 물었다.
“뭐길래 그렇게 허겁지겁 숨겨?”
고마운 마음과는 별개로, 뺏길까 봐 걱정되었다. 처음 가진 ‘내 것’을 허무하게 내어 주고 싶지 않았다.
“별거 아니에요.”
마네는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웃었다.
“뭐라 안 할게, 그냥 궁금해서.”
그 말에도 숨겨진 손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녀의 굳건한 손을 움직인 건 마네의 차분한 기다림 덕이었다.
“이거….”
조심스럽게 내민 손엔 반짝거리는 스노우 볼이 들려 있었다.
“스노우 볼이네. 야시장에서 사 온 거야?”
호기심을 가지는 마네의 모습에 신이 났는지 제인이 들고 있던 스노우 볼을 두어 번 흔들었다. 구체에 집중하고 있는 둘의 얼굴이 비쳤다. 이 사람은 어떻게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있는 걸까? 그녀가 유리에 비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의문을 품었다.
“이것도 있어요.”
높은 사람일 게 분명한데, 일어나는 일을 다 알고 있는 건 당연하겠지, 제인이 문득 든 의문을 애써 무시했다. 대신, 꽃다발을 자랑할 때처럼 숨겨 두었던 램프를 꺼냈다. 고물이나 다름없었던 그 램프는 밤새 이불로 닦아 내어 광택을 보였다.
“와, 멋지네. 이건 뭔데?”
마네가 건네받은 램프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괜히 과장되게 반응하자 제인은 덩달아 신나 말문이 트였다.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래요.”
“소원? 이 램프가?”
턱을 매만지는 그가 믿지 않는 눈치로 의심하자 제인은 이상하게 당황스러워하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백일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대요,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별로예요?”
잘 정돈된 머리와 햇볕에 그을린 적 없는 뽀얀 피부, 닿기만 해도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옷들. 그에게 이런 가짜 보석이 박힌 램프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은 마음에 어쩐지 그걸 내밀고 있는 자신의 손이 부끄러웠다. 제인은 쭈뼛거리는 손으로 램프를 도로 뒤에 감추었다.
“마음에 들어, 이런 고철에 대고 백일이나 말할 정도면 어떻게든 이루겠는 걸.”
베개 밑에 감추어 둔 램프를 도로 꺼내 제 옆에 올려 둔 마네는 간지러운 목소리로 고맙다고 속삭였다. 무엇에 대한 감사의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저도 고마워요.”
“일일이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나한텐 별거 아닌 일이니까.”
별거 아니라는 소리에 제인이 또 다른 욕심을 품었다. 표를 내고 싶진 않았지만, 그 눈이 자연스럽게 꽉 막힌 창문을 향했다.
“음…. 그건 안돼.”
죄지은 노예를 지하 감옥에서 꺼내 주는 것과 창문에 박힌 나무판자를 빼주는 것 중, 뭐가 더 어려운 부탁이냐 묻는다면 당연히 전자일 게 분명했는데도 마네는 단호히 안된다고 말했다.
“아직은 안돼.”
시무룩한 제인의 얼굴에 마네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을 정정했다.
“귀신이 나오거든.”
황당한 변명에 제인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구태여 네 방 창문 앞에 델단이 목을 매달았으니, 나무를 베어 버리기 전까진 안된다고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마네는 능청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이 램프를 나한테 주는 게 아니었다면, 무슨 소원을 빌고 싶어?”
무슨 소원을 빌고 싶냐고? 그녀가 원하는 건 너무도 많았다. 한 번도 입 밖에 꺼내 본 적 없는 말들이라 구체화를 하진 않았지만, 속에 담긴 것 중 갈망이 아닌 것들이 없었다.
“어제 즐거웠지?”
“….”
“가지고 싶은 거라도 있어? 고향에 가고 싶다거나.”
재미 삼아 물어본 질문에 깊게 고민하는 제인은 한참이 지나도 대답이 없다가 결심했다는 얼굴로 말했다.
“서로를 위해 주는 친구가 생기길 바라요.”
소원은 별것도 아니었다. 뭔가가 가지고 싶다거나 한다면 사줄 요량으로 물어봤던 마네는 이 여자가 그런 물욕적인 소원을 빌 리 없다는 걸 대답을 듣고 나서 깨달았다.
“친구, 친구라, 어려운 소원이네. 왜 하필 친구야?”
“그런 친구가 있으면….”
또 몇 분이나 뜸을 들이던 제인이 결국 아니라고 대답했다. 마네는 뒷말이 궁금해서 잔뜩 기대하고 있다가 진 빠진 얼굴로 입바람을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