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형 때문에 그래요?”
제인이 슬쩍 비예단을 살폈다. 죽은 가족을 떠올리면 그가 전처럼 슬퍼할까 봐 눈치를 본 것이었다. 그러나 비예단은 최소한, 울고 있지는 않은 얼굴로 형의 이름을 꺼냈다.
“델단…. 형이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제인은 델단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남기고 간 것들까지도. 느닷없이 찾아온 그 손님에 화들짝 놀라 숨어 버린 일, 처음 받아보는 꽃다발, 모리나라는 하녀에게 구박을 받을 때 구해 준 것, 처음 맛보는 달콤한 타르트, 진심 어린 관심과 따뜻한 위로까지도. 모두 떠올리면 가슴이 몽글해지는 추억들이었다.
“델단은 제 첫 친구였어요.”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에게 미소가 스며들었다. 세상에 혼자 있다고 생각했을 때, 델단이 와 주었어요. 그가 주었던 것들 모두 그에겐 별거 아니었을지 몰라도 제겐 대단한 거였어요. 그 이야기를 듣는 비예단은 어쩐지 마음이 거북했다. 안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까지…. 아리송한 마음은 질투였을 수도, 부러움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친해질 정도까진…. 아니지 않나요?”
결국, 못참고 퉁명스럽게 뱉은 말에도 제인은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 특유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처음 받아본 호의는 무척 달콤하더라고요.”
얼마나 친했는지, 얼마나 알고 지냈는지는 애초부터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남기고 간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델단이 떠난 지금은 오직 그가 남겨준 온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형은 원래 누구에게나 친절해요.”
어떻게든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형은 누구에게나 그렇다며 옛날 일을 꺼내었다. 마을에 있는 꼬질꼬질한 거지에게 몇 달 동안이나 음식을 제공했던 일, 가족이 아파 급히 돌아가야 한다는 사기꾼에게 돈을 빌려줬던 일, 이웃집 고양이가 집을 나가 같이 찾아 주다가 다칠뻔한 일. 비예단은 쉬지 않고 그가 선의로 베푼 바보짓을 늘어놓았다.
“델단은 정말 뼛속까지 좋은 사람이었네요.”
제인은 오랜만에 소리 내 웃었다. 그의 연대기를 듣고 있자니 좋은 마음으로 했던 게 어설픈 행동 탓에 망쳐진 것들이 대부분이라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분이 좀 나아졌어요?”
그런 순박한 사람이 나 때문에 죽었구나.
비록 그가 죽은 건 다양하고 복잡한 이유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자신도 일조했다는 마음에 심장이 뻐근할 만큼 아파졌다. 제인이 좋았다가, 우울했다가 하면서 요동치는 감정을 참느라 입꼬리가 비틀렸다. 결국, 이상한 얼굴을 하곤 눈을 감아 버렸다.
“델단은 내가 인간인 줄 알았대요.”
마음 쓰지 말라고 위로하기에도, 이종에 대한 차별이 만연한 이 세상에 관해 설명하기도 애매했다. 비예단은 결국 침묵을 선택했고 줄곧 이어지던 대화는 그렇게 정적이 찾아옴에 따라 끝났다.
“제가 인간이었더라면 그와 정말로 친구를 할 수 있었겠죠?”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아쉬움이 가득 담긴 물음이 튀어나왔다. 어쩌면 확인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었다면 그와는 친구가 될 수 있었겠지, 그렇다고 답해 주길 바랐다.
“형이 그리워요?”
원하는 대답이 아닌, 생뚱맞은 질문에 제인이 그를 바라보았다. 서서히 끄덕이는 고개가 강한 긍정을 보였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형은 내년쯤 돌아올 거예요.”
“…그게 무슨?”
죽은 사람이 돌아온다니? 인간들에게 그런 재주가 있었나? 제인이 놀란 탓에 몸을 움직이자 유리잔에 들어있는 주스의 표면이 요동쳤다. 얼음은 그새 녹아 전부 없어졌었다.
“인간들의 미신이랄까, 뭐 그런 건데. 매년 기일부터 일주일 동안 그 사람이 돌아오는 거예요. 오랜만에 왔다고 맛있는 음식도 대접하고, 생전에 즐기던 것도 함께하고…. 뭐 그런 거예요.”
제인의 황당한 표정과 마찬가지로, 비예단도 원래는 그런 풍습을 믿지 않았다. 어차피 유족들이 뭐라도 위로할 거리를 찾기 위해 만든 미신거리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도 안 되는 미신을 믿고 싶었다. 형과 제인이 얽혀있는 질투심보다도 형에게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죽었는데도요?”
“내년에 두고 봐요, 기일이 있는 날은 형과 함께할 수 있을 거예요.”
확신에 찬 목소리에도 제인은 그 말이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말이 사실이었길 바랐다. 물론 그가 돌아온다고 해도 자신과 함께하진 않을 것이다.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에야.
“셰이단 님이 오늘 밤에 야시장이 열린다고 했는데, 이제 슬 시작하려나 봐요.”
비예단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들고 있던 주스를 한 번에 마셨다. 광장엔 아까부터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더니, 몇 개의 천막이 올라오면서 장사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장사꾼들이 쾌활한 목소리로 호객하는 게 들려왔다. 그가 제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음, 이거 볼래요?”
아이를 위한 그림책이 가판대에 즐비했다. 하나하나 직접 그렸는지, 그림은 모두 투박했고, 내용은 어디서나 들었던 ‘그렇게 해서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식의 진부한 것들이었지만 제인은 처음으로 먼저 호기심을 느끼고 비예단을 잡아당겨 멈춰 세웠다.
“아이들은 이런 걸 읽고 자라요.”
종이를 차라락 넘기자 용과 싸워 갇혀 있는 공주를 구출한 왕자가 공주와 오래도록 행복했다는 내용이 종이 몇 장에 담겨 있었다.
“어, 냄새….”
그림을 한 번 쓸어보던 제인이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과일을 설탕물에 졸인 간식을 팔고 있었다. 비예단은 대뜸 그걸 사와 제인과 함께 먹기도 하며, 시장을 돌아다녔다. 세상의 진귀한 것들을 판다는 장사꾼도 만나고, 알록달록한 옷감을 파는 것도 구경했다. 이렇게 다양한 색과 다양한 물건들을 본 건 처음이라 그런지, 아까 우울했던 건 다 어디 가고 제인은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잠깐 이거 볼래요?”
비예단이 스노우 볼을 들고 제인을 불렀다. 작은 눈사람이 들어있는 투명한 유리 볼 속엔 반짝이가 흩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우와!”
스노우 볼을 건네받은 제인이 거침없이 흔들며 반짝이는 걸 구경했다. 그 행동이 반복되자 물건 주인이 헛기침하며 눈치를 주었다.
“얼마에요? 살게요.”
비예단은 제인이 정신 팔려 있는 와중에 스노우 볼과 함께 가짜 보석으로 장식된 작은 램프 장식품도 구매했다. 돈을 건네는 중에 멀리서 지켜보던 경비병이 다가와 비예단에게 귓속말을 했다.
“이제 슬슬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새 일렬로 늘어선 가판대의 마지막쯤에 와있다는 걸 깨달은 비예단이 여태 신기해하고 있는 제인을 멈춰 세웠다.
“제인, 이제 그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눈에 띄게 아쉬워하는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늦지 않게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한 탓에 어쩔 수 없었다. 비예단은 녹스의 물건을 빌린 것이었고, 제시간에 돌려주어야 했다.
“저녁까지 먹고 들어가려 했는데, 아쉽지만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거예요.”
“…네.”
스노우 볼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제인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건 당신 거예요. 이것도.”
작은 램프를 쥐여준 비예단이 이걸 받아도 되는지 경비병의 눈치를 보는 제인에게 괜찮다 속삭였다.
“이건 뭐에요?”
“소원을 이루어 주는 램프.”
짧은 설명과 함께 웃는 비예단의 모습은 앳되었지만, 성숙했던 델단의 모습도 어느 정도 담겨있었다.
* * *
비예단은 다음 날 아침, 식당으로 향했다. 밥을 먹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이거, 3층 손님 식사죠?”
가벼운 수프와 빵 한 덩이가 담긴 쟁반은 처우가 많이 나아졌어도 다른 다들 식사에 비해선 몹시 초라했다. 덕분에 단번에 제인의 아침밥이라는 걸 알아낸 비예단이 주방장과 하녀가 말려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쟁반을 들었다.
“제가 가져다줄게요.”
식사 당번이었던 하녀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으나, 넙죽 그러라고 하기엔 그가 귀한 손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닙니다! 제 할 일인걸요.”
손님에게 괜한 일을 시켰다 하녀장님에게 불호령이라도 당하는 게 걱정되기도 해서 애써 말려보았는데도 비예단은 묵묵부답이었다. 오히려 짜증이 난다는 투로 하녀에게 망신을 주었다.
“그 할 일, 제가 해드린다고요.”
원래의 비예단 성격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그는 예전과는 다른 기운이 있었다. 오래전 흙먼지를 날리면서 주방에 들어와 혼냈던 적이 있는 주방장은 멀리서나마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비볐다. ‘완전 다른 사람이 됐네?’ 주방장의 감상이었다.
제인의 방 앞엔 늘 그렇듯 경비병 두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죄송하지만….’ 하고 양해를 구했어야 할 비예단은 자신을 가로막는 경비병들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한 손에 들고 있는 쟁반을 보여 주면서.
“…예, 들어가십시오.”
질린 얼굴로 문을 덜컥 열어 주는 경비병은 델단과 같은 꼴이 날지도 모르니,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는 셰이단의 명령을 들은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