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그럼 혹시 누굴 좀 데려가도 되나요? 마을에 나갈 때….”
비예단이 운을 떼기 시작할 때부터 안 좋은 예감이 들었고, 예감은 적중했다. 셰이단은 그가 무리한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느끼고 바로 책임을 회피했다.
“부탁이라면 제가 아니라 녹스 님께 여쭤보시죠, 아마 잘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바쁘실 텐데 괜찮을까요?”
녹스의 이름에 꺼리는 표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장례식장에서 대화를 몇 번 나눈 것 외에는 따로 마주칠 일이 없었다. 당연히 감사 인사를 전해야 마땅했지만, 괜한 자존심일지 객기에 대한 부끄러움일지 비예단은 녹스를 만나는 게 겁이 났다.
“그때 이후로 한 번도 뵌 적 없지 않으십니까. 이참에 인사도 드릴 겸 함께 가시죠.”
셰이단은 물러서지 않고 계단으로 향했다. 약속도 없이 데려왔다고 혼나기야 하겠지만, 무리한 부탁을 듣는 것도 곤란한 일이었다. 비예단은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그를 따라갔다. 형의 장례식을 치러주고, 무례를 범하고 도망쳤는데도 아무 말 없이 의식주를 제공해 주는데 감사를 전해야 하는 건 마땅한 도리였기 때문에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저번과 같은 구도로 앉은 소파는 여전히 푹신했다. 방도 여전히 정갈했고, 대접받은 차도 여전히 향긋했다. 비예단은 새삼 자신에겐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세상은 그대로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아무리 불행해져도 세상은 늘 똑같구나. 오히려 평화롭기까지 한 분위기에 본인 스스로가 작은 점처럼 느껴졌다.
“마음을 추스르기엔 시간이 걸릴 거라 여겼는데, 내가 그대를 과소평가했군.”
이제는 익숙한 그 검은 늑대 가면이 조명에 반짝였다. 녹스는 진심으로 비예단을 걱정했던 것처럼 따뜻했다. 예전, 매몰차게 떠나라 하던 그 차가운 목소리가 상상이 안 갈 정도였다. 그날의 녹스와 오늘의 녹스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덕분에 장례도 잘 치르고, 건강도 많이 호전됐습니다. 살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를 받기엔 내가 너무 부끄럽지 않겠나. 그런 말은 넣어 두게. 그대의 형을 잘 보살핀다 약속했는데, 부고를 알리게 되어 계속 마음이 쓰였으니.”
셰이단이 모호한 표정으로 비예단과 함께 들어왔을 때부터, 무언가를 부탁 받을 거라 예상했던 녹스가 말해 보라는 듯 차분하고 다정한 눈길로 비예단을 위로했다. 비록 그 앞에서 보여주는 모든 행동은 연기였으나 위로만큼은 진심이었다. 같은 기억을 갖게 된 소년에게 느끼는 연민 때문이었을지, 녹스는 비예단이 뭘 원하던 간에 흔쾌히 들어줄 생각이었다.
“외출…하고 싶은데,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성에서 나가 따로 살고 싶다던가, 형의 묘지를 베르티아로 옮기고 싶다든가 하는 부탁을 할 줄 알았던 녹스는 서두만 들어도 짐작이 가는 그 ‘같이 가고 싶은 사람’ 때문에 고민이 길어졌다. 비예단은 어쩐지 거절당할 것 같은 느낌에 한 번 더 부탁했다.
“제인, 제인과 함께 나가고 싶은데 안될까요?”
“마침 오늘이 야시장이 열리는 날이었던가?”
“예, 해가 지면 광장에 볼거리들이 많을 겁니다.”
애초에 이 성에서 제인에게 가지는 녹스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오랜 시간 그를 지켜봐 온 셰이단뿐이었다. 비예단의 부탁에 제 주인이 불쾌해하고 있다고 느낀 셰이단은 괜한 후회가 들었다.
“제인은 그대와 태생부터가 다른 족속이니, 너무 가까이하진 말고.”
비예단은 그 대답이 허락인지 거절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셰이단이 ‘그럼 곧 준비시키겠습니다.’ 하고 방을 나서기에 그제야 허락인 줄 알아차렸다.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드는 허락이었어도, 제인과 함께 외출한다는 사실이 여태 쓰러져있던 마음을 일으켰다.
제인은 전에 입었던 붉은 드레스를 입고 마을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느닷없이 방에 들이닥친 하녀들은 거칠게 제인의 옷을 갈아입혔고, 경비병들은 일언반구도 없이 그녀를 끌고 마을로 도착했다. 온갖 곳에 인간들이 있는 데다 처음 듣는 광장의 소음에 제인은 길잃은 어린아이처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뭐 때문에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다 놓았는지 조금의 추측도 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을 찌를 듯 향하는 것 같았다. 감시하러 따라온 경비병들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지만, 그들은 무심하게 주변을 살필 뿐이었다. 안절부절못하며 뒷걸음질을 치다 허벅지에 뭔가가 부딪혔다. 넘어질까 봐 아찔한 순간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제대로 선 제인이 뒤에서 난 소리 때문에 그만 다시 넘어지고 말았다.
“으아앙!”
아이의 울음소리였다. 제인이 사색이 되어 뒤를 살폈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자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넘어져 있는 제인에겐 평범한 키의 남자도 무척 커 보였다.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오는 사람에게 공포를 느낀 제인이 발로 땅을 밀었지만, 치맛자락이 구두 굽에 걸려 헛발질만 해댔다.
“아이고, 아가씨께 결례를 범했습니다. 이 녀석아! 뚝 하고 사과드려!”
남자가 아이의 머리를 누르며 억지로 고개를 숙이게 했다. 겉보기엔 인간과 다름없는 그녀가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있으니 귀족으로 보였을 게 뻔했다.
“아…저….”
제인의 입에서 잘못했다는 말이 나오려던 찰나,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인!”
누리끼리한 사제복이 아닌 멀끔한 셔츠를 입은 비예단이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둘이 비슷하구나. 비예단이 델단만큼 나이를 먹으면 정말 닮아질 거라는, 상황과는 맞지 않는 감상에 젖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비예단도 어느 귀족가의 자제인 줄 알고 헐레벌떡 고개를 숙였다.
“저희 딸아이가 누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셋의 구도를 보고 대략적으로나마 상황을 파악한 비예단이 먼저 제인을 일으킨 후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나 보네요.”
씨익 웃는 그의 눈꼬리 끝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붉은 기가 지워지지 않는 흉터처럼 남아있었다. 매일 밤을 울면서 지새우는 마당에 당연한 꼴이었다.
“괜찮습니다. 꼬마야, 너는 다치진 않았고?”
아이는 그 말에 손등을 내밀었다. 드레스 장식에 긁혔는지 몇 줄기의 붉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저런, 그래도 밥 잘 먹고 씩씩하게 지내면 금방 나을 거야. 그렇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아버지를 쳐다보는 비예단이 눈빛으로 동의를 요구했다. 남자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렇다고 대답하며 아이의 손을 잡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사제가 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마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더라도 다친 아이를 돌려보냈겠지만. 감히 제인을 다칠게 할 뻔한 사람에게 신의 힘을 사용해 주긴 영 내키지 않았다. 어쨌거나 지금 비예단에게 중요한 건, 제인이었다.
“오늘, 같이 기분 전환하려고 만난 거예요.”
여태 인간들의 마을에 덜컥 홀로 남아 제인이 느꼈던 당혹스러움과 혼란이 별거 아니란 듯이 그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마음을 추스르는 동안, 제인의 방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비예단은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 그녀에게 마음이 상해 있었다.
“나오니까 좋죠?”
그럼에도 이번 기회에 친해질 생각으로 깜짝 외출을 준비한 거였는데, 제인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아무런 준비 없이 인간들 사이에 내던져진 기분은 집에서만 기르던 애완견을 야생에 풀어놓는 것과 같았다. 제인은 큰 소리가 조금이라도 나면 경계 태세로 주변을 살피기 바빴다.
“여긴 너무 시끄럽네.”
비예단이 제인에게 반대쪽에 나 있는 분수대 뒤, 벤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둘은 시끄러운 곳을 벗어나 풀벌레가 우는 한적한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각자 마실 것을 사 손에 들고 분수대 근처에 앉자 작은 물방울들이 안개처럼 퍼지고 있었다. 둘은 아무 말없이 그 한적한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놀랐으면 미안해요.”
한 모금도 먹지 않은 주스 속 얼음이 딸각 소리를 내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비예단은 미세하게 떨고 있는 제인에게 사과를 전했다. 매일 방에 있으니 나가서 구경이라도 하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아뇨….”
제인은 갑작스럽게 끌려 나와 놀란 것 이외에도,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비예단은 그녀가 이렇게 침통해하는 이유가 델단 때문일거라 짐작했다. 가족이 죽은 자신은 이렇게 멀쩡한 척하고 있는데, 왜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가 이렇게 우울해하는지 답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