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52)화 (52/95)

52화.

엑젤리스로 도착과 동시에 바로 형의 장례식을 지켰던 비예단은 뒤늦게서야 성으로 들어왔다. 잠깐 찬 바람을 쐬러 나온 그를 기다리던 해일러가 성으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몸이 많이 상했으니 좀 쉬어라, 그런 뜻은 아니었다. 그저 지친 비예단에게 보여 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제인, 그 여자를 본다면 기분이 좀 나아지겠지. 해일러는 대장의 허락도 없이 비예단과 무작정 제인을 찾아갔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경비들과 입씨름할 생각에 잔뜩 긴장했었는데 의외로 그들은 순순히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의 행동을 예상했던 녹스의 언질이 있었던 덕이지만, 해일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저 다행이라고만 여겼다.

제인은 비예단을 보면 반사적으로 과거가 떠올라 불편했다.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든 간에 그녀를 상처 입히고 갈취하는 데에 지고한 도움을 주었던 탓이었다. 그가 갑자기 손을 덥석 붙들어도,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 내며 미안하다고 빌어도 아무 감흥 없었다.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 수 있어서 좋겠구나. 싶은 부러움만 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하지만 비예단이 마음을 다해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느껴졌다. 북받친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이종인 자신의 앞에 밑바닥을 드러내는 걸 보면 진심이 아닐 리 없었다. 제인은 그의 마음을 충분히 알아 들었지만, 용서할 기력은 없었다. 음침한 구렁텅이에 빠진 그녀에게 남을 용서하는 혜화를 베풀라 종용하기엔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해일러 님께 듣기론 이제 말도 할 수 있다던데, 그렇죠?”

해일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말하는 걸 듣기도 했었던 그녀는 제인이 왜 아무 말 않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델단이 죽었다는 사실도, 비예단과 델단이 형제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던 제인의 입장에선 느닷없이 찾아와 제 앞에서 눈물을 쏟는 이 소년에게 위로는커녕 그 어떤 말도 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거북할 뿐이었다.

“델단 님과 친밀한 사이셨다고 하더군요.”

제인이 계속해서 입을 다물고 있자, 결국 해일러가 대신 말을 꺼냈다. 왜 델단의 이름이 나오지? 드디어 반응을 보인 제인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며 앞에 선 비예단을 뚫어지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태양 빛을 받은 꿀처럼 부드러운 금발과 순록의 녹안. 살짝 쳐진 눈매가 여태 왜 둘이 닮았다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황당할 정도였다.

“비예단?”

제인이 뜨문거리며 그의 이름을 읊었다. 그녀는 비예단의 얼굴은 알았어도, 이름은 알지 못했고, 델단에게 들었던 동생은 이름은 알았어도 얼굴은 알지 못했다. 앞에 있는 이 소년이, 2년 동안 자신을 죽지도 못하게 살려두어 원망하던 이 소년이, 델단이 도망가게 되면 함께 살자고 했었던 그 동생, 비예단이었다.

“제 이름을….”

“델단은, 델단은 어디 있나요?”

델단과 비예단이 어떤 사이였는지에 대한 놀라움을 표하기보단, 가장 궁금했던 안부를 물었다. 제인의 기억 속 가장 선명한 건 델단이 자신에게 화살을 휘두른 사실도, 그가 넋을 놓는 바람에 허무하게 잡혀 버린 탈출 계획도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중얼거리던 델단의 혼잣말이었다. 죽으라고 속삭이던 그의 꺼림칙한 혼잣말.

그가 아무리 그런 말을 했다 한들 실제로 죽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늘 밝고, 긍정적이고, 희망에 찬 이야기나 늘어놓던 그 사람이 갑자기 정신이 나가 버린 게 아닌 이상 죽어 버릴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때의 그 모습이 너무 위태로워 보여서 무사히 살아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럼 원 없이 마음껏 원망할 수 있을 테니까.

비예단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거짓말 마, 죽었다고 하지 마. 그럼 난 누굴 원망해야 해? 제인은 가슴께를 쥐어뜯으며 눈물을 씹어 삼켰다.

“델단 님께선 사망하셨습니다.”

신의 곁으로 가셨다, 멀리 떠나셨다…. 수많은 말로 표현할 수 있었지만, 해일러는 직설적으로 그의 죽음을 알렸다. 참았던 눈물이 결국 터지고야 말았다. 제인은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처음 사귄 친구인 줄 알았는데, 자신이 이종인 줄도 모르고 잘해 줬었던 그 바보 같은 인간. 마지막엔 죽이겠다며 위협까지 하던 그 못된 인간.

죽음 앞에선 그 모든 원망이 아무 소용도 없었다. 오로지 처음 느껴본 그 따스함만이 그리웠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처음 먹어보던 딸기 타르트도, 꽃반지도, 매일 창가를 둘러보던 그 설렘도 없었을 테다. 내가 죽였구나. 내가 인간이 아니라 델단을 죽인 거야.

영롱한 보석들이 나무 바닥에 후드득 쏟아졌다. 비예단은 그 와중에도 해일러가 그 장면을 볼까 봐 허둥지둥 그녀의 얼굴을 가려 보았지만, 바닥이 쏟아지는 보석까지 모두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아….”

처음 보는 빛깔의 보석에 해일러가 잠시 시선을 빼앗겼지만, 비예단이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기에 못 본 척을 하고 말았다. 어쩌면 대장에게 보고해야 하는 사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비예단과 제인을 만나게 해준 것부터가 이미 징계를 각오한 일이었기에 하나 정도는 더 모른 척 해 주자 마음먹었다.

“내가 델단을 죽게 했어요. 미안해요, 미안해….”

제인은 숨을 헐떡이며 겨우 사과를 전했다. 비명처럼 들려오는 그 사과는 분노와 증오가 엉켜있어 그녀의 마음속 본질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델단을 원망하면서도, 그리워하는 그 심정이 투명하게 드러났다. 비예단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끌어안아 품속에 얼굴을 파묻게 했다. 바닥을 때리던 보석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둘이 무슨 심정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것인지, 서로조차 알 수 없었다. 비예단은 제인의 학대에 가담했고, 델단은 제인의 마음에 칼을 꽂았으며, 제인은 델단을 죽음에 일조했다. 참 기묘한 관계였다.

* * *

델단이 죽고 난 후 남은 가족에겐 적어도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을, 남은 친구에겐 함께했던 기억을 미화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비예단은 오로지 혼자 방에 박혀 기도를 올렸다. 부디 형의 가여운 영혼이 신의 곁으로 갈 수 있길 빌고 또 빌었다.

“오직 로테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미천한 종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기도를 올리려던 찰나, 방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노크는 오로지 하루에 세 번 식사 시간에만 들려왔기 때문에 벌써 밥때가 되었나 싶었다.

“비예단 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익숙한 목소리는 셰이단이었다. 별다른 용건이 없으면 찾아오지 않는 그가 와 주었다는 건 무슨 일이 있음이 분명했다. 슬리퍼도 챙겨 신지 않은 채 맨발로 문을 열자 온화한 미소를 짓고 서 있는 셰이단이 보였다.

“방해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아요. 딱히 할 일도 없었는걸요.”

할 일이 없다는 말은 하면 안 됐었나, 비예단이 아무렇게나 떠든 입을 손으로 가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셨으면 좋겠지만, 무료하시다면 제인의 날개 재생을 도와주셔도 되고요.”

그 말을 들을 줄 알았는지, 비예단이 준비라도 해온 양 변명거리를 늘어놓았다.

“그게, 저도 그러고 싶긴 한데…….”

그는 한참이나 셰이단을 세워놓고 로테의 교리와 사제의 마음가짐 등에 대한 장대한 이야기를 떠벌렸다. 요점은 지금 당장 능력을 사용하기 어렵고, 그 이유는 형이 죽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절대적 선함의 마음을 가져야만 신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하고 싶은 말씀이신 거죠?”

형이 안 좋게 떠나는 바람에 나쁜 마음이 깃들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과연 믿어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셰이단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부담 드리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오늘은 그저 선물을 전해 드리려고 온 거니까요.”

멋쩍게 웃는 비예단 앞에 고운 새 옷이 내밀어졌다. 한 눈으로 봐도 값비싼 재질이었다.

“이건 녹스 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저한테요?”

얼떨결에 건네받은 손에서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방에만 계시는 비예단 님을 걱정하고 계시더군요. 기분 전환차 마을에 나가 바람이라도 쐬고 오는 건 어떠시겠어요? 분명 환기가 될 겁니다.”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비예단이 제 형처럼 될까 봐 염려했던 녹스는 루이스의 추천을 받아 그에게 옷을 선물했다. 전달하는 건 셰이단의 몫임으로 용건만 전달하고 가려고 했던 그는 부쩍 마르고 수척해진 비예단이 안쓰러웠는지 식사는 잘 챙겨 먹고 있냐 등의 안부를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으레 하는 인사를 마치고는 어깨를 두드렸다. 분명 그 답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형이 죽고 난 후 비예단까지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마음이 쓰인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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