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51)화 (51/95)

51화.

해가 떴는지, 지금이 몇 시쯤이나 됐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이 방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두컴컴한 방안은 계속해서 밤이었다. 네모난 방에 종일 대화 상대도 없이 갇혀 있는 것, 어쩌면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배신, 감정적인 소모와 결여 등 모든 복잡하게 얽혀있는 다양한 정서들이 제인을 미치게 했다.

텅 빈 마음을 채워 줄 건 아무것도 없었고, 옆엔 아무것도 없이 절벽만 펼쳐져 있었다. 한 걸음만 잘못 내딛어도 곧장 추락할 것만 같은 기분. 어디한군데 머무를 곳 없는 홀로 됨, 절망, 절망, 절망.

끝없는 절망감이 쌓여 절실함을 만들어 냈다. 얼마나 절실해야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기구한 삶이 스스로도 불쌍히 여겨져 문득 울고 싶어졌다. 그녀의 인생을 빼곡히 채운 불행은 그녀가 울어야 할 모든 이유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저주인지 축복인지 그녀의 눈물이 값비싼 보석이 된다는 사실은 울지 말아야 할 단 한 가지 이유가 되었다.

울음을 너무 참아 목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픔이 느껴지고, 아픔을 자각하니 곪은 배에서 소리가 났다. 인간들을 벗어나고 싶다는 아득한 염원을 바라면서도 그들의 도움 없이는 혼자 아무것도 해결할 수가 없다는 현실이 허망했다.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제인이 느릿하게 고개를 올려다보자 검은 늑대, 녹스가 문 한 편에 서 있었다. 올 것이 왔구나.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불만스러운 눈이었다. 일순 호기심이 들었던 게 그대로 죽어 있는 눈에 내비쳤다. 흐리멍덩한 눈에 잠깐이라도 생기가 스친 걸 본 녹스가 운을 뗐다.

“난 아주 유치한 사람이야.”

얼어붙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무감각한 말투였다.

“그래서 내 물건에 손을 대면 화가나.”

한걸음 다가올 때마다 나무 바닥에 구두가 부딪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의 박자에 맞춰 제인의 심장이 고동쳤다.

“두 번 다시 도망갈 궁리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잘못했다고 빌어야 할까 싶었지만, 그의 말 사이엔 알 수 없는 묘한 압박감이 느껴져 감히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녹스가 제인의 앞에 와서야 눈높이를 맞춰 자세를 낮췄다. 원피스 밖으로 삐져나온 근육 하나 없는 하얀 다리를 긴 손가락이 살며시 쓸었다. 차가워. 제인은 그 시린 감각에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다리가 잘리면 그대가 꽤 고통스럽지 않겠나.”

복숭아뼈를 톡톡 두드린 녹스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인은 결국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그의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봤다.

* * *

델단의 장례식은 그의 신분이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성대하게 꾸며졌다. 신전이 없는 곳이다 보니 신의 인도를 빌 수는 없었지만, 화려하게 장식된 꽃이 벽면을 모두 뒤덮었고 관은 구하기가 힘들어 몇 년 전부터 줄을 서서 산다는 하얀 고목 나무로 짜였다.

평생 입어본 적 없는 고급 실크로 만든 셔츠를 죽어서야 입은 델단이 편안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지만 목에 둥글게 남은 검은 자국이 그가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장례식은 마을에 있는 회관에서 이루어졌지만, 명복을 빌어주는 사람들은 없었다. 비예단은 비록 그것이 외지인을 배척하는 이곳 사람들의 문화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마음 한편엔 매정하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텅 빈 장례식장에서 그나마 셰이단이 함께 위로를 전했다.

“지금은 비록 적적하지만, 신을 믿는 분들은 간략하게나마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갔을 겁니다.”

비예단은 형이 누워있는 관 앞에서 한치의 움직임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기도하고 있지 않았다. 대신, 형을 혼자 둔 것에 대해 몇 번이고 사과하고 있었다. 이젠 듣지 못하겠지만, 영영 화해할 수 없겠지만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고 싶었다.

“형은 밝은 사람이었어요. 절대로… 형이 스스로 죽을 거라곤 절대 생각 안 했었는데…. 제가 옆에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더는 흐를 것도 없는 비예단의 눈이 터질 듯 붉게 올라왔다. 그는 폭포수 아래에 서 있는 것처럼 쏟아지는 죄책감에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생각은 어쩌면 오만일 수도 있겠습니다.”

동향의 정일지, 어린 소년을 돕고 싶은 위선일지는 몰라도 셰이단은 그가 늪에 빠져들어 가는 걸 어떻게든 구해내고 싶었다. 비예단과는 대조되는 물기 없는 건조한 목소리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델단 님은 이미 베르티아에서 힘든 일을 겪으셨죠. 남들이라면 경험하지 않았을 모욕과 치욕을 하나뿐인 가족이 알게 된 것도 모자라 함께 지내온 이웃들까지 알게 되었으니, 그 고통은 아무리 나눈다고 하더라도 혼자 짊어지기엔 벅찼을 거예요.”

엑젤리스에서 형을 마주했을 때가 떠올랐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웃어 버리던 그 얼굴이 선했다. 어린 시절, 신전에 팔려가듯 떠나는 제 팔을 붙잡고 엉엉 울던 그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형이 미안해, 형이 못나서 미안해. 너만 힘들게 해서 미안해.’

자신에게 사제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형은 유독 제 눈치를 많이 살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난 지금도 행복하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형에게 신전 일이 힘들다고 투덜거렸던 입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형이 목공 일을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얼마냐고 묻지 말았어야 했다. 형의 죽음이 형의 선택이 아닌 본인의 탓이라고 돌려야만 마음이 한결 편할 것 같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책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델단 님께서는 동생 덕분에 하루라도 더 살아갈 수 있었을 거예요.”

셰이단이 점점 더 통곡하는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지금쯤 비예단 님을 용서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미친 것에 비예단이 일조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어렸을 적부터 촉망받고 자라 온 우물 안의 개구리인 그가 녹스에게 자존심을 굽히지 않은 게 원인이 되었던 거라 짐작했다.

이미 심신미약 상태였던 델단은 정신부터 좀먹어 스스로를 죽였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비예단이 완전무결한 무죄, 완벽한 피해자라고는 빈말로도 말할 수 없었다.

자리를 지켜 주던 셰이단이 떠나고, 텅 빈 빈소에 델단의 죽음을 알렸던 해일러가 녹스와 함께 찾아왔다. 녹스는 빈손으로, 해일러는 붉은 꽃 한 송이를 가져왔지만, 굳이 숨기느라 한 손을 뒷짐을 지고 있는 상태였다.

“저희 고향에서는 추모할 때 붉은 꽃을 올려서….”

궁색한 변명에 비예단이 꽃을 올릴 수 있도록 일어나 물러섰다. 하얗고 맑은 꽃들 가운데에 유독 강렬한 붉은 꽃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제가 아르모단 풍습을 잘 몰라서요. 결례를 범했다면 사과드립니다.”

“…아뇨. 형은 상관없이 좋아한다고 했을 거예요.”

처량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꽃만 두고 가려던 해일러의 발걸음이 쉽사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보단 녹스가 함께 있어 주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한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내 장례식장을 나갔다.

문밖에서 얌전히 기대 기다리자 한참이 지난 후 도란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꽃을 내려놓고 추모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녹스가 자신이 나가자 입을 뗀 것이었다. 뭔가 아쉽다거나, 섭섭한 마음 같은 게 들긴 했지만, 이곳은 추모를 하기 위해 마련된 장소니까 오늘만큼은 그런 추잡한 감정은 집어넣기로 했다.

“사실, 형이 뭐라고 말할지 모르겠어요.”

해일러처럼 헌화를 하지도 않고 기도도 올리지 않은 녹스는 델단이 잠들어 있는 관 앞에서 몇 분이나 하염없이 서 있었다. 비예단 또한 반쯤 넋이 나가 있었기 때문에 둘은 한참이나 아무 말도 없이 같은 공간에 있었다. 그러다 문득 꺼낸 말은 아까 해일러와의 대화에 대한 것이었다. 몇 날 며칠을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 이미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인 그가 여태 형이 붉은 꽃을 좋아하던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애가 깊은 편이 아니었나?”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대답이 들려왔다. 잔잔한 목소리에 얼핏 측은함이 느껴졌다.

“우습지만 형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요. 형은 늘 제 말을 들어 주는 입장이었거든요. 대체 바보같이 왜 그렇게 굴었는지, 어린애처럼….”

비예단은 아까부터 계속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선에 힘이 있다면 바닥이 뚫려버릴 만큼. 자조적인 말투는 듣는이마저 지칠 정도였다.

“…죽은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그대 생각하기 나름일세.”

자칫 매정할 수 있는 말들이 부드러운 음성에 위로처럼 들려왔다.

“나도 그대와 비슷한 일을 겪었어.”

덤덤한 말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픔엔 크기가 없어서 비교가 어렵지, 그대의 슬픔과 내가 겪었던 슬픔이 같을 거라 생각하진 않아.”

“아…….”

이미 지난 일에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얼빠진 얼굴로 입을 벌리자 녹스가 무릎 꿇고 앉아있는 비예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델단의 머리를 만졌을 때와 비슷한 촉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겨내는 방법은 다들 비슷해, 그저 지내다 보면…언젠가 흐릿해지니까.”

누군가를 잃은 아픔에는 결국 시간이 약이었다. 어떤 걸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들에는 잊는 방법뿐이 없었다. 비예단은 그가 잃은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잃었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을 걸 알았다. 가까운 가족을, 친구를 잃었을 수도 있었고 전쟁터에서 긴 시간을 보내셨다니 친했던 전우를 떠나보낸 걸 수도 있었다. 그저 짐작만 하는 건데도 멀게만 느껴졌던 그가 자신과 같은 인간임이 느껴져서 제법 큰 위로가 되었다.

“가올테는 사망했네. 그대가 말하는 죗값은 모두 받았다고 생각해도 좋아. 처참한 꼴이었으니.”

녹스는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비예단에게 조금이라도 짐을 덜어주고자 가올테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그토록 기다린 결말일 텐데도, 한참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유족이 혼자 더 슬퍼할 시간을 주기 위해 간다는 말도 없이 자리를 비웠다.

장례식장 멀리서 해일러가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녹스와 함께 돌아가고자 대기하는 건 아니었다. 비예단과 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모습에 녹스는 굳이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대충 어떤 이유인지 짐작이 갔다. 오랜만에 왔으니 보고 싶은 사람이 제 형 말고도 더 있겠지. 해일러의 오지랖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는 이번 한 번만은 봐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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