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50)화 (50/95)

50화.

“당신은 지옥에 갈 테니 내 아들은 볼 수 없으려나….”

남자가 볼일을 다 마치고 다시 마차 위에 올라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럴드는 이마를 짚은 채 욕을 하고 있었고, 병사들은 무슨 일이냐며 웅성대고 있었다.

“…다시 복귀한다.”

말의 머리를 다시 엑젤리스 방향으로 돌리며 말했다. 제럴드의 첫 단독임무는 엑젤리스를 몇 걸음 나서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끝났다. 이래서 루이스가 아니라 자신을 보내도 상관없었던 거구나, 출발 전 녹스의 무심한 태도가 이해됐다.

“해일러 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남자가 그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드디어 가슴의 비수를 뽑아내 후련한 마음이었다. 상처가 아물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준 해일러와 복수의 기회를 마련해 준 녹스가 베풀어 준 이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높이를 뛰어 바람처럼 사라졌다.

* * *

셰이단은 늘 하기 싫은 일을 가장 마지막에 하는 습관이 있었다. 누군가 물으면 일종의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 미루는 것이라 변명하기도 할 만큼, 그는 편식하는 애처럼 싫은 일을 마지막에 몰아서 후다닥 처리하곤 했다.

오늘 오전에도 여전히 하기 싫은 것들을 미루다 보니 오후가 다 돼서야 끔찍한 업무만 남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기 싫다고 속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만,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녹스에게 도착한 편지를 하나씩 확인했다.

율리나 레이스. 율리나 레이스. 율리나 레이스…….

짙은 복숭아향이 남아있는 분홍색 편지들은 모두 율리나가 보낸 것들이었다. 열 장, 열한 장…. 열네 장. 셰이단이 진저리를 치며 편지를 모두 찢다가, 마지막 편지를 찢기 전에 열어보았다. 읽어본 후, 정상적인 내용이면 녹스에게 전달할 심산이었다.

「 사랑하는 녹스 님께.

어느덧 가을 낙엽이 물드는 시간이 성큼 다가왔네요. 녹스 님께선 평안히 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사랑이 고파 매일 메말라가는 심정으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당신을 떠올린다면 옛 그리운 추억밖에 생각나지 않아요. 어린 시절 약혼식을 했던 기억이 전부이지만, 전 그날 당신을 만나고 첫눈에 반해 버렸답니다…….」

셰이단은 편지를 다 읽어 보기도 전에 매정하게 편지를 찢어버렸다. 매번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내는 율리나가 안쓰러운 한편 바랄 곳 없는 사랑에 목매는 게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매번 천대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사랑 편지를 보내는 그녀의 집착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셰이단은 수도에 죄수가 호송 중에 사망했다는 확인 서류를 준비하면서도 율리나를 떠올렸다. 녹스의 아버지 밑에서 일할 때부터 줄곧 보아 왔던 그 작고 어린 소녀가 언제부터 그렇게 자기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의 아가씨로 자랐는지 궁금했다.

하긴. 주인님께서 너무 매몰차기도 하셨지.

둘의 첫 만남은 율리나의 편지 내용처럼 아름답거나 낭만적이지 않았다. 녹스는 아버지가 시킨 훈련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율리나는 감히 말도 못 붙인 채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으니까. 그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면 할 말이 없지만, 훈련이 끝난 녹스는 율리나가 함께 놀자고 조르자, 네가 감히 나한테 말을 거는 게 가당키나 하냐는 표정으로 차갑게 거절했었다. 그때 도련님이 뭐라고 하셨더라. 그렇지.

‘집에 가면 네 아버지에게 가정교사를 해고하라고 말씀 드리렴. 예의 없는 걸 보아하니 아직 교육을 안 받고 있는 걸 수도 있겠구나.’

또래의 소녀에게 꽤 어른스럽게 말하는 모습이 웃기기도 했고, 귀엽기도 했던 기억이 났다. 셰이단은 그렇게 옛 생각을 하면서 가장 하기 싫었던 업무인 가올테 사망 확인 서류 작성을 시작했다.

사인은 당연히 노스어 탈영병에 의한 호송 마차 약탈 및 가올테에게 원한이 있는 자의 습격이었다. 아주 그럴듯하게 꾸며낸 소설에는 거짓이 대부분이었지만 진실도 적당량 포함되어 있어 굉장히 그럴싸해 보였다. 가올테의 지장이 찍혀있던 거짓 서류도 함께 첨부했으니,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어차피 죽을 죄를 지은 자가 법의 심판을 받기 전, 시체가 된 것 뿐이었다.

* * *

눅눅한 지하 감옥에 질척한 발걸음 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려왔다. 발소리의 주인은 이 어두운 분위기에도 위축되지 않고 꼿꼿한 자세로 걸어가다 제일 끝 방에 멈췄다.

“제인.”

이 공간과 상황과 듣는 사람의 기분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부드럽고 밝은 목소리가 제인을 불렀다.

“…….”

그녀는 대답 없이 한참 마네를 바라보았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서려 있던 짙은 원망과 좌절은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죽은 사람의 눈. 시체 같은 그 공허한 눈에 마네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안 좋은 건 맞지만…. 해결해 줄 수 있는 내가 왔잖아.”

제인이 조소했다. 어깨를 들썩이면서 한참을 꺽꺽대며 웃다가 마지막엔 바람 빠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말로 웃긴다는 모습이었다. 마네의 진심이 어떻든 간에, 인간을 믿고 도망쳤다가 잡혀 온 그녀에겐 이 상황이 흡사 코미디나 다름없었다.

“감옥은 너무하지, 똑같이 갇혀 있어도 이왕이면 전에 쓰던 방이 나을 거야.”

마네가 제인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넉넉하게 입은 고급스러운 질감의 셔츠와 바지가 금세 더럽혀졌다.

“옷….”

“옷 더러워졌다고?”

그녀가 웃다 말고 진지하게 뱉은 말이 자신의 옷 걱정이라는 사실에 이번엔 마네가 웃음을 참았다. 참 남 걱정 잘해. 삐죽이는 입술로 제인을 놀리는 것도 있지 않았다.

“이런 옷, 수십 벌도 더 있어. 그러니까.”

철창 사이로 가녀리게 뻗은 흰 손이 불쑥 들어왔다. 제인은 군데군데 연하게 흉터가 자리 잡은 그 손을 단번에 잡지는 못했다.

“이번엔 나 한 번 믿어 볼래?”

델단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도 희끄무레한 손을 건네면서 자기만 믿으라고 큰소리를 쳤었지. 제인이 고개를 돌려 벽 모서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 꼴을 봐. 괜히 허튼 데에 도박했다가 다시 쓰레기장으로 끌려온 꼴을.

제인은 델단을 비난하고 싶었지만, 결국 자기혐오가 시작되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어도, 복수조차 꿈꿀 수 없는 처지에 본인을 탓하는 게 가장 마음이 편해지는 길이었다.

“꺼내 줄게.”

마네는 철창 사이로 내밀었던 손을 도로 거뒀다. 하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듯 속이 썩어가는 제인을 끈질기게 붙들었다.

“그냥 죽게 둬요.”

그러나 매정한 답변이 돌아왔다. 얼마 전만 해도 해사한 웃음을 보이며 꽃을 자랑하던 그녀가 지금은 살얼음판 위에 꺼내진 생선처럼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싫어. 네가 죽지 않았으면 해.”

이번엔 손이 철창을 휘감았다. 바싹 달라붙어 애절하게 말하는 그 모습은 마치 가족을 멀리 떠나보내는 것 같기도, 연인과의 이별을 앞두고 발버둥 치는 것 같기도 했다. 뭘 떠올렸던, 그의 말은 믿을 수밖에 없는 간절한 진심이 느껴졌다.

“제발, 됐어요. 호기심도 동정도 지긋지긋해.”

하지만 이미 인간들에게 환멸을 느낄 만큼 당해온 제인에게 타인의 감정 따위가 들어올 균열은 없었다.

“그렇게 느껴졌다면 미안해. 난 그냥, 내 주변에도 이종이 있거든. 그래서 너한테서 그 사람이 보였나 봐.”

마네가 바지를 털고 일어나면서 인사와 함께 마지막 말을 건넸다. 그 말은 제인의 흥미를 이끌었는지 처박고 있던 고개가 서서히 들려졌다. 마네는 희미한 성공의 미소를 지었다.

제인은 이틀 만에 제 무덤이라고 여겼던 감옥을 벗어나 원래 쓰던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원래의 그 방이구나, 라고 바로 알아채진 못했다. 밖에서부터 나무판자로 단단히 가려둔 창문과 새로운 가구들 때문에 익숙함을 찾기까지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차라리 날 묶지. 제인은 새로 생긴 가구들 따위엔 관심조차 두지 않고 창문을 가로막은 판자를 두드렸다. 두꺼워. 창문으로 도망친 탓에 아예 막아 놓은 듯했다.

제인은 판자의 거칠한 면을 한 번 쓸고, 침대에 앉아 이 성의 사람들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도망까지 가려 했던 노예를 죽이지도 않고 살려 둔다고? 나를 이용해서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이 얼마인데, 그냥 이렇게 살려만 둔다고…. 이들이 자선사업가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건 정상이 아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물어볼 사람도 없을뿐더러, 스스로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는 질문이 아니었지만, 무료한 시간을 보내려는 머리가 쓸데없는 고민에 계속 뇌를 혹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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