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해일러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눈알을 굴려대는 비예단에게 델단의 죽음을 다시 한 번 알렸다.
“거짓말!”
하지만 해일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비예단이 소리를 질렀다. 델단은, 형은 밝은 성격 덕에 늘 분위기를 환기시키던, 여름의 태양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스스로 죽을 리가 없었다. 마지막에 봤던 상처받은 형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지만, 그래도 믿을 수 없었다.
‘그건 잠깐이었잖아. 그런 거로 죽어 버릴 리가 없잖아!’
모진 말을 했던 과거들이 너무 아파 감히 본인의 탓을 할 수가 없었다.
“형한테 아직 사과도 못 했는데,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어떡해, 어떡해….”
단숨에 해일러에게 기듯이 달려간 비예단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애처럼 떼를 썼다. 어떡하냐고, 그럴 리가 없으니 거짓말이라고 해달라고. 공허하게 말라 버린 눈이 다시 눈물을 쏟아 냈다. 해일러도 그 작고 여린 소년을 어떻게든 달래 주고 싶었지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못 견디게 공허한 상실감은 말 몇 마디 따위로 채워지지 않으니까. 새살이 돋고 울퉁불퉁한 흉터가 올라오고 나서야 겨우 마주할 수 있는 거니까. 오래전, 같은 아픔을 경험했던 해일러는 말없이 묵념하며 비예단의 슬픔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끔찍한 절규를 온전히 받아 냈다.
“함께 돌아가시죠, 마지막 배웅은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예단이 억지로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창문 하나 없는 삭막한 지하 감옥. 그곳에 갇힌 제인은 종종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예전에 봤었던 추레한 남자의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땐 그 남자가 무서웠었는데, 이런 환경이라면 조만간 자신도 그렇게 미치게 되겠구나 싶은 열악한 환경이었다.
여태 이곳에서 누려온 것들이 최상의 호사라는 걸 깨달았다. 그간 그나마 멀쩡한 음식을 먹었기로서니 상한 음식이 이렇게까지 구역질 날 줄 몰랐다. 역한 쉰내가 올라오는 음식은 제인의 입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바닥에 버려졌다. 바닥에 묻는 더러운 오물이 지저분하다고 느꼈다. 옛날이라면 이런 건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눕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앉아 밤을 지새운 그녀는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지난 밤을 떠올렸다.
델단은 내가 인간인 줄 알았던 걸까.
경멸에 찬 그 얼굴이 아른거렸다. 겨눠진 화살촉이 날카롭게 반짝이던 장면이 잊히지 않았다. 다정하게 건네주던 말들, 따뜻한 손길, 화창한 미소가 모두 자신을 향한 게 아니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따끔거렸다.
그럼 그렇지.
제인은 해탈한 것처럼 모든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마저 실패한 그녀는 구속 받던 삶을 떨치기 위해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 봤다고 여겼다. 더 이상 방법이 없구나. 이 좁고 갑갑한 방에서 머리가 새하얗게 늙을 때까지, 죽을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구나. 델단에 대한 원망과 함께 망가진 제 삶이 너무도 좌절스러웠다.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저 철창 바깥세상이 더는 그립지도 않았다.
어서 시간이 흘러 죽어 버리길, 그뿐이었다.
분주한 발걸음이 찾아오는 이 없이 적막뿐이던 지하 감옥, 습기로 녹진해진 바닥을 두드렸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잘 말라붙은 시체처럼 보이는 가올테가 병사들에게 끌려져 나왔다. 그는 이미 정신을 완전히 놓아 버렸음에도 자신이 수도에 간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는지, 실실대며 비웃고 있었다.
반쪽짜리 사생아. 똑같이 갚아줄 거야. 감히 쳐다도 못 볼 귀족을 이렇게 대접해?
중얼거리는 말 대부분은 녹스에 대한 모욕이었다. 가올테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제대로 발을 딛지 못하고 어설픈 흉내를 냈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의 걸음마를 기다려 주지 않고 양팔을 붙잡은 채 끌고 갔다. 정강이가 바닥에 쓸리자 가올테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쇠약해진 그의 발버둥은 벌레만도 못한 것이었다. 저항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고, 괜한 힘만 뺀 꼴이 되었다.
“가올테 백작 수도 송환 준비를 마쳤습니다.”
루이스가 녹스의 명령으로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졸지에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된 제2 기사단장 제럴드가 처음으로 녹스에게 단독 보고를 올렸다. 목소리는 유난히 우렁차고 자신감 있어 보였지만, 사실은 뒷짐 진 손이 떨릴 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 빠짐없이 준비했겠지.”
“예!”
“이송 중 돌발상황이 발생해도 절대.”
녹스가 말을 끊으며 제럴드를 한 번 쳐다본 후 다시 이어 말했다.
“당황하지 말게. 다 예상한 일이니.”
제럴드는 무슨 뜻인지 아리송했지만, 괜히 되물었다가 믿음직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게 염려되어 되묻지 않았다. 송환 중 노스어 병력을 만나는 걸 걱정하시는 거라 짐작할 뿐이었다.
“그럼 마지막 인원 점검 후 출발하겠습니다.”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시간 붙들어둔 죄인을 아무런 성과 없이 수도로 보내는 건데도 그다지 화가 난다거나 허무해 보이진 않았다. 워낙 무덤덤하신 분이니까. 제럴드는 또다시 제 뜻대로 생각하고 절도있는 경례를 올린 다음, 방을 빠져나왔다.
대장의 직속 명령이라 그런지 제럴드의 병사들도 모두 긴장한 상태였다. 독수리 문양이 멋들어지게 그려진 검은색 마차 안에 포승줄을 한 채 앉아있는 가올테가 보였다. 그는 오랜만의 바깥공기에 신이 났는지 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늙은 얼굴에 동심을 담은 기괴한 웃음이 역했는지, 주변 병사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제럴드는 손뼉을 두 번 치고 병사들의 주의를 끌었다. 성 밖의 일은 늘 루이스가 도맡아 하다 보니, 병사를 끌고 나간다는 게 설레기도 하면서 걱정이 되었다.
“먼 길을 떠나는 만큼 고단하겠지만, 막중한 임무를 맡았으니 경각심을 가지고 임해주기 바란다.”
제럴드는 언젠가 해보고 싶었던 말을 속으로 연습했던 것보다 더 멋지게 해내 나름 뿌듯했다.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죄수를 수도로 보내고, 수도에서 하루 내지는 이틀 정도 쉬다가 다시 돌아오면 되는 간단한 일. 운이 아주 나쁜 게 아니라면 편안한 일정이 될 것이었다. 다른 병사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인지 곳곳에 수도 구경에 들뜬 대화가 들려왔다.
성을 벗어나자 마을에선 이번 여정을 떠나는 병사들의 가족 몇몇이 손을 흔들며 잘 다녀오라고 소리치고 있었고, 녹스를 보고자 왔던 주민들은 녹스의 흑마가 보이지 않자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잘 정돈된 길을 따라 그들은 엑젤리스의 단 하나뿐인 출입구인 바람 협곡에 다다랐다.
황무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돌을 깎아 만든 성문은 모래 먼지가 잔뜩 끼어있었다. 한 명 한 명 빠짐없이 신원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완전히 엑젤리스를 빠져나온 그들은 눈 앞에 펼쳐진 깊고 좁은 협곡 사이를 지나가기 시작했다. 협곡의 반 정도를 지나왔을까, 선두에 선 제럴드가 별 생각 없이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다시 한번 상기하고 있을 때, 머리 위로 인위적인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웬 놈이냐!”
제럴드가 직감적으로 위험이 찾아왔다 느끼자마자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원수를 갚으러 왔다, 가올테!”
허름한 옷의 남자는 어설픈 연기 톤으로 소리치며 이 숨을 곳 없는 협곡에서 순식간에 마차 위에 올라탔다. 마법의 기운이 짙게 느껴졌다. 모든 병사가 제각각 무기를 꺼내 들고, 제럴드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잡아 죽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을 때, 머리에 대장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돌발상황이 생겨도 당황하지 말게. 다 예상한 일이니.’
그 돌발상황이라는 게 지금, 이 순간을 뜻하는 것일지, 이 상황은 그저 우연에 불과한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허름한 몰골로 원수를 갚으러 왔다며 소리치는 저 남자가 비싼 돈을 들여 마법을 썼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엑젤리스의 마법사에게 도움을 받았다면? 사실, 이 모든 건 우연이고, 원수를 갚기 위해 전 재산을 턴 것이라면?
“단장님!”
병사들은 수상한 자를 멀뚱히 보고만 있는 제럴드가 이상했는지, 그를 다그치듯 불렀다.
“…두어라.”
제럴드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던 수상한 사람은, 손을 높이 올려 경계 태세를 해제하라는 수신호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가올테가 있는 마차로 고개를 쑥 집어 넣었다. 창가에서 갑자기 나타난 얼굴에 가올테가 누구냐! 무엄하다! 하고 정신 나간 호통을 쳤다.
“가올테, 내 아들을 만나거든 그 비싼 무릎을 꿇고 사과하길.”
그 남자는 허벅지 춤에 매달고 있던 작은 단도를 꺼내 단숨에 가올테의 목을 찔렀다. 모든 행동이 전문가의 몸짓은 아니었지만, 급소만큼은 정확한 위치에 칼이 들어갔다. 마차 안에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자신의 목에서 갑작스럽게 뻗쳐 나오는 피를 보며 어쩔 줄 몰라 당황하던 가올테는 그대로 볼품없이 고꾸라졌다.
그는 곧 숨이 멎을 것이었다. 베르티아가 자신의 왕국인 양, 지고한 귀족의 핏줄을 타고난 게 유일한 자랑이었던 그는 좁디좁은 마차 안에서 그렇게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