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48)화 (48/95)

48화.

델단의 죽음은 아침 식사를 전하러 온 하녀에 의해 알려졌다. 휑한 방에 커튼 자락이 귀신처럼 휘날리는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지를 뻔한 하녀가 안 좋은 직감을 느낀 덕이었다. 그 흔적은 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다행히 누군가의 눈에 띄기 전 조용히 수습할 수 있었다.

수습하는 동안 그 누구도 그의 존재가 사라졌음에 통곡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고민과 열등에 비롯된 절망, 외로움에 허덕였던 슬픔은 나뭇가지에 상흔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녹스는 그 사실을 전해 듣고 그저 담담하게 유감의 뜻을 전하며, 공동묘지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을 알아보라 할 뿐이었다. 전서구는 빠르게 날아 베르티아의 해일러에게 델단의 부고를 알렸다.

‘델단 사망. 비예단에게 알린 후 함께 복귀할 것.’

그의 죽음이 고작 한 줄도 안 되는 짧은 문장에 날 것으로 새겨져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작은 종이를 붙든 채 몇 번이고 글자를 훑은 해일러가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안돼…….’

가까운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데, 해일러는 팔다리가 저려 오는 느낌에 현기증이 들었다. 누군가의 사망 소식을 유족에게 알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 비예단은 이제 천애 고아가 되어 버리는 건데, 유독 타인의 감정에 깊이 이입하곤 하는 해일러에겐 더욱 힘든 일이었다.

멀리서 비예단에게 식사 거리를 제공하러 오는 사제가 보였다. 바구니 한 아름에 빵이며, 잼을 가득 싸 온 그 사제는 긴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자 바구니를 잠시 내려놓고 머리를 쓸었다. 그 모습이, 세상이 않은 듯 평온해 보였다.

“기사가 그렇게 앉아 있어도 되나요? 배고파서 그런가?”

붉은 머리가 풀숲에서 일어나자 사제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빵 하나를 손에 들고 물었다. 괜찮아요, 고단한 목소리가 사제의 호의를 거절했다. 해일러는 빵을 건네받는 대신 조금 전 받은 쪽지를 보여 주었다.

함께 슬픔을 나눌 거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사제의 얼굴엔 평화로운 미소가 온전히 걸려있었다. 해일러는 조금 짜증이 났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지을 수 있어? 사람이 죽었다는데. 그녀의 감정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사제가 쪽지를 읽은 감상을 전했다.

“델단 님, 오랜만에 소식을 듣네요. 어린 시절 저와 자주 놀아 주던 오빠였어요. 마을에서도 무척 인기가 많았죠, 잘생기고 친절하고, 무엇보다 오빠랑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거든요.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이루고 싶은 꿈도 많은 사람이었는데….”

고인과의 추억을 길게 읊던 사제가 짧은 한숨을 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비예단이 너무 대단하다 보니 늘 빛을 못 봤어요. 사람들은 비예단이 오빠의 그늘이라고 생각하곤 했어요. 물론 오빠는 그 그늘에서 고생 없이 편하게 살긴 했지만, 결국 그 그늘에서 말라 죽어 가는 걸 사람들은 몰랐을 거예요. 오빠는 알고 있었으려나? 부디 로테의 곁에서나마 편안하길.”

사제는 델단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지레짐작하고 있는 것처럼 굴다가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쪽지는 해일러 님께서 전해 주세요, 전 식사 당번이니까요.”

보기보다 무거워 보이는 바구니를 들고 낑낑대며 들고 가는 그 뒷모습은 조금 전 고인의 명복을 빌었던 사람이라기엔 믿기지 않았다. 사람의 목숨은 생각보다 별것 아닌가 보다. 해일러가 사제의 몫까지 델단의 명복을 빌며 잠시 묵념했다.

“비예단 님, 식사는 좀 하셨어요?”

“케일 님….”

비예단이 있는 방 안엔 말라비틀어져 곰팡이 핀 빵과 바닥에 딱딱하게 굳은 잼이 전부였다. 구석에 조그맣게 몸을 웅크리고 있던 비예단이 케일의 방문에 비척이며 일어났다. 그가 움직임과 동시에 불쾌한 지린내가 코를 찔렀다.

“또 아무것도 안 먹었네, 이러다 정말 쓰러져요!”

“저, 마을 사람들은 어떤가요? 대사제님은….”

“매번 말하지만, 누군진 몰라도 비예단 님에 대해 아주 악질적인 소문을 냈더라고요. 그 덕에 모두 등을 돌렸어요, 다신 비예단 님을 볼 생각이 없을 거예요. 소문인지 사실인지는 우린 모르는 거잖아요.”

“정말 아니에요! 전, 저는 돈 같은 거 관심도 없다고요. 왜 아무도 제 말을 안 믿어 주는 거죠? 제가 헌신한 시간이 얼만데…!”

“그럼 믿어 주는 곳에 살아요. 베르티아 사람들은 평생 농사만 짓고 배운 적도 없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신의 뜻을 깨우치고 사제님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고 본인들의 우매함을 알겠나요? 포기하고 도망치라는 게 아니에요. 새로운 시작을 하세요.”

비예단이 설교 같은 말을 듣고 다시 풀이 죽었다. 평생을 함께하고 헌신했던 이웃 주민들이 손가락질하던 기억이, 돌아갈 낯이 없는 엑젤리스가 교차하며 떠올라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비예단을 바라보는 케일의 얼굴도 좋지는 않았다. 그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 왔던 사이고, 신전 동기이기까지 한 케일은 다른 의미로 기분이 편치 않았다. 집도, 직장도, 가족도 잃은 그가 불쌍하다기보단 반감이 들었다. 어쩌면 역겹다는 의미가 맞을지도 몰랐다.

“언제까지 그렇게 자책만 하고 있을 건가요? 비예단 님은 아니라고 하지만, 모두 사제님 손으로 저지른 건 맞잖아요.”

델단이 가올테에게 끌려갈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을 방법이야 찾아보면 있었을 것이다. 가령 대사제님께 말해 도움을 구한다거나, 다른 신전으로 차출되어 이사를 한다거나. 폐저택에 붙잡혀 있었다는 그 여자를 위해서도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많았다. 과격하게 직접 구하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사제라는 안정적인 직업이면 어디서든 돈을 빌려줬을 것이다. 한꺼번에 큰돈을 빌리기엔 무리겠지만, 그 노예를 구매하려고 생각했더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소문이 잠잠해지길 기다리기보단 직접 마을에 내려가서 해명하면 될 일을 이렇게 미련하게 군다니. 이미 사건의 내막을 다 알고 있는 케일에겐 비예단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선을 넘어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이만 가 볼게요. 이건 전에 부탁하신 종이랑 펜이고…이건.”

케일이 바구니 제일 바닥에 눕혀져 있던 물병을 꺼내 들었다. 그 병엔 맑은 액체가 가득 담겨있었다.

“케일 님?”

그 물병의 정체를 알아챈 비예단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맞아요, 이테넬라.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둘은 ‘이테넬라’라고 불린 그 물병을 가운데에 두고 한참을 마주하고 있다가, 케일이 부산스럽게 바닥에 떨어진 음식물 쓰레기를 주우며 돌아다니기 시작해 침묵이 깨졌다.

“……감사합니다.”

케일은 비예단의 하나뿐인 가족이 죽었음을 알고 있는데도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위로조차 건네지 않고는 방을 대충 정리하고 볼일이 끝났다는 것처럼 문을 나섰다. 비예단은 왜 케일이 매번 자신에게 먹을거리를 가져다 주는지 궁금했지만 여태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괜히 물어봤다가 떨떠름해진 그녀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까 봐.’라는 비겁한 이유 때문이었다.

혼자 있고 싶은 우울함이 그의 세계를 잠식했다. 덩그러니 깜깜한 호수에 가라앉고 있는 기분. 혼자 있고 싶은데, 혼자 있는 게 몸서리치게 싫은 기분. 자신조차도 자신을 종잡을 수 없음에 말 못할 분노가 치밀었다.

케일이 두고 간 펜과 종이를 가지런히 앞에 두고, 바닥에 엎드려 펜대를 굴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잡아 보니 그 기다란 막대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형에게 할 말을 고르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한 만큼 편지에 쓰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한 줄, 두 줄. 빈 종이를 빠짐없이 채워 갈 때쯤 늙은 나무 바닥에서 으레 들리는 삐그덕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소름 끼치게 불쾌한 소음이었지만 지금은 초인종처럼 느껴졌다. 케일 님이 다시 돌아오셨나? 의아함을 가지고 고개를 들었다. 풋풋한 갈색 머리가 아닌, 붉은색이 보였다.

“…?”

비예단이 경계하며 들고 있던 펜과 종이를 품속에 끌어안자 해일러가 더 가까이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그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을 어디서 봤었는지 머리를 굴리자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엑젤리스. 거기서 온 기사님이시구나, 어쩐 일이지?

궁금함에 막 입술을 떼려던 찰나, 그 붉은 눈과 마주쳤다. 아주, 아주 깊이 신음하고 있는 그 눈이 앞으로 나올 말을 대충 짐작게 했다.

“비예단 님, 전해 드릴 말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결코, 좋지 않은 이야기가 들려올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아냐, 안돼요! 안된다고요!”

한 글자씩 꾹꾹 눌러쓴 편지가 손에서 구겨지는 것도 모른 채 비명을 질렀다.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목소리가 쇳조각처럼 갈라져 사방에 퍼졌다.

“형님께서 사망하셨습니다. 속히 엑젤리스에 방문하시라는 전언입니다.”

해일러는 구태여 전언이 담긴 종이를 보여 주지 않았다. 혈육의 죽음이 그깟 몇 글자에 담겨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형이 그럴 리가 없어요. 잘못 안 거죠? 잘못 말한 거죠? 사고라도 당한 거예요? 얼마 전만 해도 멀쩡했잖아요!”

엑젤리스에서 보호 받고 있는데, 거긴 안전하고 음식도 잘 나오는데 죽긴 누가 죽었다는 거지? 일부러 죽으려고 해도 어렵지 않나? 내가 없는 잠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믿기지 않는 소식에 비예단이 진정하지 못하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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