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47)화 (47/95)

47화.

“달아난 모양이군.”

녹스가 종소리가 나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헤티아에게 말했다. 처음 듣는 종소리였지만, 위험을 알리는 신호임을 알고 있는 사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래층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다가 조금씩 성 내부가 밝아졌다. 녹스는 들고 있던 램프를 이젠 쓸모없다며 헤티아에게 건넸고, 그녀는 얼떨결에 건네받게 되었다.

“주인님!”

가장 먼저 녹스에게 달려온 건 셰이단이었다. 그는 늘 하고 다니던 넥타이도 없이 달려왔는데, 헤티아는 항상 점잖고 교양있게 다니던 그가 달려왔다는 건 둘째 치더라도, 평소와 달리 흐트러진 차림에 놀라워했다.

“별일 아니니 호들갑 떨 것 없어. 헤티아, 이만 퇴근해.”

주인이 걱정돼서 달려온 집사의 걱정을 호들갑이라 치부해버린 녹스가 셰이단이 올라온 계단을 도로 내려갔다. 퇴근이라는 소리에 내적 환호를 하는 헤티아에게서 들고 있는 램프를 빼앗듯 챙긴 셰이단도 안경을 고쳐 쓰고 녹스를 따랐다.

밖에는 매뉴얼대로 병사들이 오와 열을 맞춰 대열을 정렬하고 있었지만 녹스는 그들에게 딱히 상황에 대해 전달하지 않고 그대로 성문 밖을 향해 걸었다. 오밤중에 모인 병력은 그렇게 마치 행진하는 것처럼 녹스의 뒤를 따랐다.

성문에서 멀지 않은 거리, 비가 이렇게 장대처럼 쏟아지는데, 처량하게 주저앉아 있는 두 남녀가 보였다.

‘얼마 가지도 못했군.’

녹스가 그 꼴을 보며 혀를 찼다. 옷이며 얼굴이며 죄다 흙탕물을 뒤집어쓴 그들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가면 위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빗방울들이 토독, 토독하고 마찰음을 냈다.

“밤 산책치고는 요란하지 않나.”

제인이 그 목소리에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속눈썹에 올라탄 물방울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새카만 늑대가 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차게 굳은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인은, 이대로 당장 숨이 끊겼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꼴사납게 도망치다 붙잡힌 것도 창피했고, 그 시도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녀의 심정이 어찌 됐든 병사들은 제인의 차갑게 식어버린 팔을 뒤로 묶어 포박한 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사지에 힘이라곤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데, 장정들의 힘이 얼마나 센지, 저절로 일어나졌다.

“손님은 방으로 모셔라.”

델단을 바라보며 온화하게 말한 녹스는 그 정도로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둘이 종종 만나는 사이인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밤중에 야반도주를 할 만큼 친밀한 사이인 것은 몰랐었다. 고작 성문에서 몇 걸음 도망쳐 나온 게 전부인 것이 황당해 경황에 대해 뭐라도 묻고 싶었지만, 델단이 심약한 상태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만두었다. 사건의 경중보다는 델단의 온전치 못한 정신을 챙기는 게 우선이었다.

“…각하…!”

녹스의 마음은 그랬지만, 한심한 눈길은 감출 수가 없었다. 델단이 그 벌레 보는 듯한 시선이 자신을 스친 것을 느낀 모양인지 이미 뒤돌아 가고 있던 녹스를 불렀다. 원래 델단의 성격이라면 절대 못 할 짓이었다. 그러나 제인을 데리고 도망쳐 나온 시점에서 그에게 할 짓과 못 할 짓의 구분 따위는 없었다.

“제인, 제인이, 실수였어요! 몰랐다고요! 저, 저 괴물이 절 유혹한 거예요! 인간도 아닌 게 감히 나한테 들러붙다니!”

횡설수설 뱉는 말은 고개를 땅에 처박은 채 끌려가기만을 기다리던 제인에게 비수가 되어 꽂혔다. 울음을 참느라 새빨개진 눈앞에 화살촉이 가까이 다가왔다. 델단의 손에 들린 화살이었다.

“이 악마, 괴물! 당장 죽어 버려!”

반쯤은 부러진 화살을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며 위협하던 델단의 팔이 경비병에 의해 붙잡혔다. 그럼에도 그는 분이 삭히지 않았는지 여전히 씩씩대며 계속해서 괴물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대는 내 것을 훔쳐 가려 했는데, 반성은커녕 변명만 바쁘게 늘어놓고 있군.”

아까의 온화한 녹스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고작 델단의 말 몇 마디에 화가 나 보였다. 제인에게 욕을 퍼부은 게 그를 그렇게까지 화나게 했을 리는 없었다만, 그게 아니라면 딱히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런,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델단을 장악한 괴물이 속삭였다. 각하한테까지 밉보이게 생겼네. 평생 동생한테 도움은 안 되고 민폐만 끼치는데, 왜 살아? 냉소와 함께 머리를 계속 울리는 비난이 델단에게 죄책감을 심었다. 무릎이 땅을 기어갔다. 녹스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죄송하다고 비는 건 제인이 아닌 델단이었다.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봐요, 옆에 아무도 없어서, 너무 외로워서,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두 번 다시 저 여자 옆엔 가지도 않을게요….”

델단의 손에 묻어 있던 진흙들이 녹스의 바지에 녹진하게 묻어났다. 그 불쌍한 사죄에도 제 주인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셰이단이 상황에 참견했다.

“일어나세요, 감기 드시겠습니다.”

셰이단이 그를 일으켰다. 힘없이 일어나면서도 델단은 끊임없이 죄송하단 말을 중얼댔다. 그 장소에 있는 모두가 느꼈다. 저 사람, 정신이 온전치 않구나. 풀린 눈과 어설픈 말투, 허공을 보는 시선까지 모두 델단을 이상하다고 여기기에 충분했다.

* * *

셰이단의 강요로 목욕까지 마친 델단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서인지, 간밤에 무리하게 움직였기 때문인지 몸이 노곤했다. 피곤한 몸은 눈알이 터질 만큼 졸음이 쏟아진다고 외쳤지만 또렷한 정신이 잠들지 못하게 했다.

‘꿈은…아니었겠지.’

동이 트기 전 서늘한 온기가 따듯하게 달궈진 몸을 식혔다. 밤도, 아침도 아닌 이 시간에 델단은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사무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짐승한테 빠져서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함께 하는 먼 미래를 기대하며 야반도주를 시도하고, 그마저도 들켜서 모두가 있는 앞에서 무릎 꿇고 용서해 달라 빌었다.

‘그게 정말 모두 내가 한 짓이라고?’

믿기지 않아 마주 본 거울을 빤히 쳐다봤다. 오랜만에 본 자신의 얼굴은 꽤 수척해졌다. 깊이 팬 볼과 흉측하게 내려앉은 눈 밑의 그늘, 부르튼 입술이 메말랐다. 원래 알고 있던 본인의 얼굴과는 너무 달랐다. 내가 미친 거지? 델단은 모두가 떠났어도 여전히 자신 옆에 남아있는 괴물에게 물었다.

으흐흐…으흐흐흐…!!

경박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 점점 더 커졌다. 그 웃음소리 말곤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지경까지 커진 뒤에야 괴물이 대답했다.

넌 진작에 미쳤어, 죽어버려. 쓸모없는 쓰레기야.

델단은 퀭한 눈을 하고 거울을 가만히 보다가 침대를 둘러싼 천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체중이 감소했는지 갈아입은 옷의 소매가 헐렁했다. 이걸 이제 알았네, 내가 병들어 가고 있다는 걸 이제 알았어. 괴물은 델단이 혼자 떠올린 생각을 가만두지 않고 대답했다.

넌 병들어가는 게 아니야, 죽어가는 거지.

문득 이 머릿속 괴물에 대해 궁금해졌다. 언제부터 자신과 함께했는지, 정체가 무엇인지, 나에게만 들리는 환청인지, 아니면 모두가 괴물을 알아볼 수 있는지.

‘이렇게 하면 돼?’

델단이 벗겨낸 침대 시트를 둘둘 말아 어깨에 걸친 뒤 괴물에게 허락을 구했다. 거울 속 자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능숙하게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창문 밖엔 디딜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뛰어내렸다. 땅에 깔린 작은 나무들이 충격을 완화에 주었지만, 그뿐이었다. 발목뼈가 부서진 듯 고통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 아픔은 어딘가,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이 상황이 꿈속인지, 현실인지 가늠이 되지 않을만큼 몽롱했다.

‘아파? 아프면 빨리 죽자! 죽으면 안 아파! 걱정 마!’

괴물의 목소리가 신이 나 있었다. 그럼에도 델단에겐 위로처럼 들려왔다. 그래, 죽으면 안아프겠지. 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적당한 나무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가장 튼튼한 나무를 발견했다. 아픈 다리를 붙들고 벌레처럼 기어 올라간 그는, 늘 제인을 만나러 갈 때마다 올라탔던 그 가지에 침대보를 엮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궁금한 걸 묻기로 했다.

‘넌 누구야?’

또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목에 둘러맨 침대보를 다시 빼려는 순간 누가 뒤에서 밀치는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델단이 바닥으로 추락하듯 떨어졌으나 그의 목은 잘 동여맨 침대보가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건 행운이 아니었다. 침대보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하던 델단은 머릿속을 가득 찬 괴물의 목소리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 웃음소리도, 그 말들도, 모두 자신의 목소리였다는 걸. 비명 같은 웃음이 점점 잦아들었다. 시야가 불을 끈 것처럼 깜깜해졌다. 지평선 너머로 서서히 동이 트고 있었다. 델단의 미소를 닮은 따사로운 햇살이 그를 비췄다. 찬란한 금발에 맺힌 아침 이슬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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