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46)화 (46/95)

46화.

썩은 동아줄은 애초에 시작부터 끊겨있었다.

“델단!”

제인이 셔츠가 축축하게 눌어붙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이 무모한 계획은 결국 실패할 것이라 예감한 것도, 델단이 점점 정신을 놓아 버리는 것도, 충동적인 행동 때문에 둘에게 닥칠 미래가 아슬아슬해진 것도 모두 불행이었지만, 단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지는 장대비 덕분에 야반도주를 하는 사람들이라곤 생각할 수도 없는 바보 같은 행동이 모두 가려졌다.

“쉿, 목소리 낮춰요. 이리 와서 앉아요.”

델단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정신을 차렸다. 배수구 안으로 몸을 깊숙하게 숨기면서 주변을 살피는 그는 아직 이 바보같은 탈출 계획을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곧 성 밖의 경비들이 교대하러 들어올 거예요. 우린 그때 열린 문으로 빠져나가 곧장 마구간으로 달리면 돼요. 내가 봐 둔 말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내 손 놓지 말아요. 그리고 곧장 제 고향으로 돌아가서 동생을 만나고, 수도로 떠날 거예요. 같이…행복하게 살아요, 우리.”

결심한 듯 속삭이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수밖에 없었다. 저 거대한 성문을 혼자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부추김과 도움 덕분에 여기까지 온 이상, 아무리 정신이 나가 버린 것 같은 델단이라도 계속 믿어 보자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결심했다.

“긴장 풀어요, 무서우면 내 등만 보고 따라와요.”

그렇게 말하며 떨리는 손으로 제인을 붙들었다. 너무 가볍고, 너무 얇아서 놓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빗속의 반딧불같이 흐릿한 빛이 보였다. 경비병들이 들고 다니는 횃불이었다. 그게 일종의 신호라도 된 것인지 델단이 몸을 일으켜 가까이 있는 나무에 몸을 숨겼다. 곧이어 횃불이 점점 선명히 보이고, 성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사람 두어 명이 겨우 통과할 만큼 열렸다.

델단이 느슨하게 쥐고 있던 제인의 손목을 세게 붙들고 달려 나갔다. 찰박대는 소리가 들리자 교대하러 온 경비병과 근무가 끝난 경비병, 총 네 명이 소리가 난 곳을 경계했다. 그중 한 명은 낮에 델단과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이었다. 어두운 밤에도 그는 델단의 병아리 같은 금발을 알아보곤 제지하려는 병사들에게 무어라 설명하기 시작했다.

“3층…계신 대…손님이 시래,……가서 얘기……게, 기다…….”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경비병의 목소리가 빗소리 때문에 중간중간 끊겨서 들렸다. 경비병은 델단에게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고, 델단은 무서운 얼굴을 한 채 달려가고 있었다. 윤곽이 자세하게 잡혀갈 때쯤, 그의 뒤에 짐짝처럼 끌려오는 여자가 눈에 보였다. 경비병은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저지하려 했으나, 성난 말처럼 달려오는 대장의 손님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도, 칼을 겨 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델단은 경비병의 망설임을 놓치지 않고 그에게 힘껏 몸을 들이박았다. 붙들려있던 제인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긴 했지만, 다시 잡아끄는 힘 때문에 주춤거릴 새도 없이 다시 일어나 달렸다. 몇 번이고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발가락에 힘을 주고 버텼다. 신발도 신고 있지 않은 제인의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어 오는 진흙의 감촉이 끈적이게 불쾌했다.

성벽 안에서 문을 닫기 위해 도르래를 잡아 내리던 경비병이 천장에 붙어 있는 종을 울렸다. 귀를 때리는 종소리에 사방에서 하나둘 횃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델단과 제인은 혼란한 상황에서도 성문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왔다. 빗장으로 닫혀있는 마구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스무 걸음 정도 남은 거리였지만, 굉장히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빗장을 걷어내고, 제인을 말에 태워서 나올 시간이 될까?

쫓아오고 있는 경비병들과 자신의 거리를 재기 위해 뒤를 힐끔 돌아본 순간, 매서운 화살이 발 앞에 꽂혔다. 성벽 위에서 경계하던 파수꾼이 쏜 화살이었다. 낮에 성을 둘러보는 중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파수대를 미처 못 알아챈 그의 잘못이면서, 높은 성벽 위를 볼 수 없게끔 비를 퍼부은 하늘의 잘못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화살이 날아오는 걸 본 델단이 뒤로 헛걸음을 하다 볼품없게 털썩 넘어졌다. 무릎을 짚고 몸을 지탱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제인은 제 손목을 붙든 손이 힘없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아주 느리게, 델단이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두려움에 잡아먹힌 델단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델단! 정신 차려요, 다 왔잖아요!”

제인이 뒤로 나자빠진 채 얼굴을 일그러트린 델단을 흔들었지만, 그는 넋이 나간 것처럼 바닥에 꽂힌 화살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말 대부분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몇 가지는 확실했다. 누군가에게 그냥 죽어 버리지, 하고 매정하게 내뱉는 말과 조소하고 있는 기묘한 웃음소리, 그건 빗속에서도 선명히 들려왔다.

제인이 델단과 같은 눈높이로 마주 앉았다. 머리부터 홀딱 젖은 둘의 모습이 서로에게 그저 처량해 보였다.

“델단, 말해 봐요.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고! 도망치고 싶다고!”

발악 같은 비명이 아찔하게 들려왔다. 기대가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시간이 찾아왔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제인. 내가…내가 다 망쳐 버려서….”

“그런 말은 됐어요. 말해요, 당장! 여기서, 이곳에서 꺼내 달라고 말하란 말이야!”

제인은 이 상황에서 이해가 안 갈 정도로 그에게 말하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델단의 팔을 붙잡은 채 마구잡이로 흔들며 독촉하는 모습이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보였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델단이 정신을 못 차리고 심약해진 정신 상태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 와중에도 엑젤리스의 병사들은 그 둘을 빠짐없이 포위하고 있었다. 무장하지 않은 남녀 한 쌍일 뿐인데도 과할 정도의 병력이 둘러쌌다.

“제발! 제발 말해 줘요, 제발…!”

절규는 결국 아무 소용도 없이 허공에 흩어졌다. 제인이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얼굴에 흘러내리는 게 비인지, 눈물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지만, 턱을 타고 떨어진 물방울이 단단하게 굳어 작은 구슬이 되었다. 바닥에 쏟아지는 구슬 세례에 델단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인을 바라보았다.

“뭐라도 좋으니, 제발 여기서 꺼내 달라고 말해 달란 말이야…….”

제인의 애절한 부탁에도 델단은 마치 보면 안 될 것이라도 본 양 당황스러워하다가 결국, 경악에 찼다. 제 발밑에 화살이 꽂힌 것보다도 더 놀라운지, 진흙탕이 된 땅에 발길질해 몇 걸음 물러나기까지 했다. 이제야 알아 버리고 만 제인의 정체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 델단을 공황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제, 제인? 눈에서….”

원망이 가득 담긴 제인의 새까만 눈동자가 그를 치켜 보았다. 델단은 그제야 모든 게 시작부터 잘못되었음, 모든 게 자신의 망상이었음을 인지했다.

* * *

녹스가 막 늦은 업무를 끝내고 집무실에서 나온 즈음,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꼴을 하고 창문을 통해 들어온 헤티아와 마주했다. 그녀는 열심히 달려온 탓에 꽉 올려 묶은 머리가 반쯤 풀어 헤쳐져 있었다.

“대장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다급하게 녹스를 불렀다. 바로 앞에 있는데 왜 소리치냐고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꽤 심각해 보이는 얼굴을 하는 헤티아를 보니 그럴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이 시간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그러나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높낮이 없는 톤은 여전했다. 심지어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한 그 태도에 헤티아가 더 다급히, 집중하지 않으면 다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상황을 알렸다.

“지금, 제가 계속 지켜보긴 했는데 설마 안들킬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경비병 놈들 다 해고해 버려야 해요, 어떻게 그걸 그냥 보내 주냐고!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성문 앞까지 갔다니까요? 이러다 밖으로 나가겠어요!”

대부분의 말들이 모두 쓸모없이 요점을 빼먹는 바람에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대충 짐작하기론 누군가 도망을 갔다는 걸 전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감시하라 했더니, 재미있는 이야기를 물어 오는군.”

태연한 태도는 여전했다. 병력이 열등하게 적어 경비 인력을 크게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어도, 그가 당장 큰일이 났다며 소란을 피우는 헤티아에게 동조하지 않을만한 이유가 있었다. 철의 요새를 자랑하는 엑젤리스의 입구이자 출구의 역할을 하는 단 하나의 길, 바람 협곡이라 불리는 그 좁은 협곡은 들어오기도 어렵고 나가기는 더더욱 어려웠기 때문이다. 누군가 도망친다 해도 협곡을 지키는 파수꾼에게 몸이 모조리 화살로 꿰뚫려 죽었을 것이었다.

“성문 앞에 있는 것까지 확인하고 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마을로 나가기 전에 둘 다 죽이려면 빨리 돌아가 봐야 하는데!”

“그럴 필요 없어.”

녹스가 방으로 가려던 몸을 틀어 계단으로 향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녹스 때문에 헤티아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이러다 말이라도 훔쳐 달아나면 어떡해요?”

헤티아가 불길한 소리를 뱉자마자 성안에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엑젤리스 건설 이후,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던 위험을 알리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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