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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죽이기 (45)화 (45/95)

45화.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하늘을 보고 나니, 갈증은 참을 수 없을 만큼 타들어 갔다. 물고기가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듯, 제인이 흘러야 할 곳 또한 하늘이었다. 네모난 창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불만이 새록새록 피어나 답답한 마음을 쥐어뜯었다. 깜깜한 시야가 점점 보랏빛으로,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다 아까 마주한 노을이 보였다.

“…제발.”

간절한 목소리가 끊어질 듯 괴롭게 들려왔다. 제인은 자신에게 얼마나 큰 행운이 찾아왔는지 인지하고 있었다. 어떤 고문도, 아픔도 없이, 허기도, 갈증도 느끼지 않고 지낼 수 있다는 행운. 인간 사회로 나와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걱정 없이 지내는 나날이었다. 그쯤으로도 충분히 만족해야 했으나 간사한 마음이 점점 더 자유를 요구하고 있었다.

‘죽어도 좋아. 한 번만 더….’

창공을 가르던 그 쾌감이 떠올랐다.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아무것도 가로막는 게 없었던 고향의 하늘이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평생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날개가 뜯긴 날, 얼마나 처절하게 울었던지도 함께. 갑자기 어깻죽지의 흉터가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아파왔다.

그날, 쓰레기처럼 눅눅한 바닥을 뒹구는 검은 날개 한 쌍이 제발 내 것이 아니길 빌었다. 등에서 흐르는 붉은 선혈이 마치 돌려달라고 울부짖는 것처럼 뜨거웠었다. 제인이 날개가 있었던 자리를 손으로 더듬거렸다. 이젠 밋밋한 등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언제부터 적응됐었을까. 포기한 걸까, 잊은 걸까. 문득, 갇힌 새장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다신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와닿았다.

이런 꼴을 하고는 고향에서 살 수 없겠지. 괴로운 좌절감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곧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그렁그렁한 눈을 한 채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한 조각의 희망을 맛보고 온 그녀는 좌절과 씨름하다, 마침내 죽어 버리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제인?”

절망의 나락으로 쏟아지기 직전인 그녀를 구한 건 다름 아닌 이미 다른 지옥에 발을 디딘 델단이었다. 밤 중에 찾아온 건 처음이라 놀랐는지, 눈가를 촉촉하게 적신 눈물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다급히 창문을 넘어 들어와 어두운 방에서 홀로 절규하고 있던 제인을 감쌌다. 마네의 손과는 다르게 따뜻한 온기가 그녀의 날뛰는 감정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어디 아파요? 왜 그래요?”

델단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제인이 울음을 참았다. 그에게까지 이질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던 탓에 꾸역꾸역 참아내는 울음은 희미한 소리가 되어 새어 나왔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요. 괜찮아요, 괜찮아…. 대체 무슨 일이에요?”

간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고 늦은 시간에 찾아온 그는 느닷없이 슬퍼하는 그녀를 위로하려고 무슨 말이던 꺼냈다. 환상을 사랑해 버린 그는, 환상의 주체가 되는 제인이 슬퍼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저는, 저는….”

힘겹게 한마디씩 꺼내는 말이 버거워 보였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는 목소리가 잔뜩 젖어 있어 듣는 사람을 아프게 만들었다. 애처로운 모습이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사라질 신기루처럼 위태로웠다. 델단은 그녀가 사라질까 봐 더 세게 안고 싶었지만, 그러다 정말 부서질까 망설였다.

“저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겠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렇게 산다니?”

델단이 제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면서 다그치자, 그대로 따라 흔들리는 제인이 그의 옷가지를 세게 붙들었다. 뭐라도 붙들고 싶었던 심정을 대변한 것인지, 뼈만 앙상한 손이 간절해 보였다.

“저는 평생, 이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거예요.”

흔드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제인은 공허한 껍데기 같았다. 담담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치고 쓰라려서, 델단은 그 순간 충동적인 사고에 사로잡혔다. 오래 계획해서 치밀하게 준비하려 했지만 지금 당장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오히려 성공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제인.”

위로하던 다정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단호히 변했다. 그의 충동적 사고는 어떤 심경의 변화 때문이 아닌, 머릿속 괴물이 건넨 말 때문이다. 도망가자, 제인과 같이 도망가자, 수도로 떠나자, 혼자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을 건네는 괴물 때문에 놀라긴 했지만, 이제 그는 괴물의 참견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괴물의 중얼거림은 델단에게 확신을 주었다. 어서 말해, 말해, 말해. 마치 지금이 기회라는 것처럼 델단을 자극하고 있었다.

“같이 떠나요. 그냥 나만 따라오면 돼요. 나랑 내 동생이랑 당신이랑…그렇게 셋이 살아요. 분명 행복할거예요.”

제인은 그의 진지한 눈빛을 읽었다. 불안감, 걱정, 기대…. 여러 혼란스러운 감정이 내재된 그 눈빛 속에 희미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절대 그 작은 광명에 모든 것을 걸지 않았을 테지만, 이 방 안에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델단은 과거의 악몽과 모두가 자신을 버렸다는 피해망상, 미쳐버린 정신 때문에 너무 지쳐있었고, 제인 또한 끝을 모르는 불행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썩어빠진 동아줄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회를 놓칠 수 없을 만큼 그들은 피로했다.

“어디로…?”

끔찍한 일상에 피폐해진 제인이 델단에게 물었다.

제인은 자신을 지독하게 쥐고 있던 것들을 놓아 주기로 했다. 몸에 배고, 정신에 세뇌당한 복종 내지는 순종. 목숨을 붙들어 주곤 있었지만, 서서히 자신을 죽이고 있었던 것. 말 잘 듣는 짐승인 척할 필요 없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건 그들일 테니.

동그란 밧줄을 목에 옭아매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제인은 델단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함께 도망가자고 해 준 사람을,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찰 용기가 없었다. 대신 무모한 계획에 가담할 용기 정도는 내보기로 했다.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창가 앞에 섰다. 델단이 먼저 창문을 넘어 단단한 나뭇가지에 올라탔고, 제인이 건너오는 것을 도와주었다. 안간힘을 다하여 겨우 나무 기둥을 미끄러지듯 내려온 제인의 팔 안쪽에 쓸린 상처가 났다. 다행히 피가 나지 않는 걸 확인한 제인은 자신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려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심장이 목구멍으로 넘어오지 않게 침을 몇 번이나 삼킨 제인은 델단을 따라 그림자에 묻히기 위해 노력했다.

나무 그늘을 벗어나자 그새 굵어진 빗방울이 전신을 때렸다. 쓸린 상처에 물기가 닿자 따가워 신음이 나왔다. 델단은 그런 제인의 입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감싸며 쉿, 하고 속삭였다. 그는 평생에 있어서 주도적으로 뭔가를 해본 건 처음이었지만, 의외로 침착한 행동을 보였다.

바스락, 멀리서 나뭇잎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리자 델단이 재빠르게 제인의 팔을 거머쥐고 성벽을 두르고 있는 얕은 배수로에 몸을 숨겼다. 인기척이 사라지길 기다린 둘은 마치 연습이라도 한 마냥 일제히 배수로를 기어가기 시작했다. 흙탕물이 온몸을 쓸고 내려가도 오로지 한가지 말을 되뇌고 있었다.

제발, 제발, 제발…….

견고한 절벽을 두르고있는 엑젤리스는 다행히도 경비 인력이 적어 무사히 성문이 보이는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들은 흠뻑 젖어 무거워진 몸을 벽 뒤에 숨겼다.

‘이렇게 쉽게 도망칠 수 있다고?’

고지가 코 앞이었는데, 델단의 이상한 기시감이 스쳐 지나가는 불안감과 조우했다. 그는 제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 밤을 닮은, 검은색 눈이 오로지 자신만을 믿고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와 볼에 달라붙고, 입술이 파랗게 변한 데다가 흰 원피스가 모조리 구정물로 뒤덮였어도 자신을 보는 눈빛에 신뢰가 담겨 있었다.

차마 그 얼굴에 다시 돌아가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오늘은 때가 아닌 것 같다고, 다음에 다시 시도해보자고, 내가 성급했다고. 생각은 맴돌기만 하고 입에서 나가지 못했다.

“제인, 나가게 되면 내가 꼭 행복하게 해 줄게요.”

부정적인 생각을 억지로 없애려 일부러 더 과장되게 말했다. 그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델단도 제인과 같이 눈을 빛내며 새롭게 펼쳐질 미래에 희망이 북돋웠다. 귀족처럼 대우받으며 그녀와 함께 사는 미래라니,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다시 살아났다. 현실적인 불안감은 허풍뿐인 희망 앞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꺼져갔다.

“…네.”

제인은 한참이나 망설이다 대답했다.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델단은 깊은 보조개를 그리고 웃어주었다. 그는 태연해 보였고, 이 무모한 계획에 자신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제인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다.

조금 전 찰나에 스친 그 감정은 그가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보였던 확신이 사라졌다. 전과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뛰었다. 이대로 가다간 결국 들키고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믿음이 무너지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델단?”

멍하니 성문을 바라보는 델단을 독촉하자 그가 몸을 들썩였다.

“닥쳐, 기회는 지금밖에 없어! 이제부턴 내가 알아서 해.”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모습이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 갑자기 누구랑 대화하는 거지? 바로 전에까지 자신을 달래주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목소리조차 변해 있었다.

“이제 와서 돌아가자고? 말이 되는 소릴 해!”

허공에 대고 대화하는 그가 점점 과격하게 언성을 높였다. 그제야 알았다.

이 사람, 정상이 아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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