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44)화 (44/95)

44화.

 “너 말일에 교대 못 한다고 했지?”

“예. 가올테 백작 수도 송환 날이라 교대 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성벽을 타고 걷다가 귓가에 들리는 이름에 조심스럽게 걷고 있던 발걸음이 멈췄다. 백작님 뵌 지도 오랜데, 수도로 가신다고? 가올테가 감옥에 수감된 처지라는 것도 몰랐던 델단은 오로지 두 개의 단어에만 꽂혀있었다. ‘가올테 백작’과 ‘수도’. 곧 수도로 이사가신다고 하시더니, 이곳에서 대화가 잘 풀려 자금을 마련하셨구나! 델단은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듣기 위해 좀 더 가까이 가 보기로 했다.

“어? 여긴 오시면 안 됩니다.”

성문을 지키던 경비는 그가 경비초소로 들어가려는 걸 보고 앞을 막아 제지했다. 멍한 눈빛이 마치 잠에 취해 걸어 다니는 사람 같아 보였다.

“아, 들어가려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요.”

멍한 눈은 그대로인데 살짝 벌리고 있던 입은 서서히 양옆으로 찢어졌다. 웃어 보이는 것 같았으나 남이 보기엔 기괴한 얼굴이었다. 정신이 좀 안 좋다고 했던가, 언젠가 성 내에서 도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있는 경비는 델단의 정신 상태를 대충 짐작하고 일부러 더 친절하게 대응했다.

“어떤 게 궁금하십니까?”

“가올테 백작님, 수도로 가시는 건가요?”

베르티아에서만 가올테와 델단의 염문이 돌았던 것은 아니었다. 엑젤리스에서도 사용인들의 입을 타고 흘러 파다하게 퍼진 둘의 관계는 일개 경비병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 사이라면 당연히 안부를 알고 싶은 게 당연하다고 판단한 경비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유감을 전했다.

“예, 안타깝지만 그렇게 됐습니다.”

수도로 송환된다는 건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지만, 그렇게 깊이 가올테의 상황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던 델단은 마치 좋은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광대를 잔뜩 끌어올렸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주는 것도 잊지 않은 그는 올 때와는 달리 경쾌한 발걸음으로 떠났다.

방에 돌아가서도 그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제인은 날 사랑하고 경비 인력은 허술한 데다 가올테 백작님도 곧 수도로 가셔! 모든 것들이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제인이 보고 싶었다, 지금 찾아가면 실례일까? 그녀에게 이 거창한 계획을 알려주고 싶어 입이 간질거렸다. 그 어떤 날들보다도, 더없이 설레고 기쁜 밤이었다.

제인은 기대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자책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부풀어 붕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지난밤, 마네가 함께 나가자고 말 한 이후로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진정이 되지 않았다. 온몸을 간지럽히고, 갈비뼈 사이를 찔러대는 기대는 오랜 시간을 염세적으로 살아온 제인도 당할 도리가 없었다.

“제인, 들어가도 돼?”

노크와 함께 들려온 마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인은 밝은 목소리로 그를 맞이했다.

“마네!”

붉게 상기된 볼과 총총한 별이 박힌듯한 눈, 어설프면서도 들뜬 몸짓이 그녀가 몹시 기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마네는 문이 열리자마자 불쑥 고개를 들이밀고, 커다란 눈을 깜빡이는 제인을 보며 웃음이 터졌다.

“왜, 왜 그렇게 웃어요?”

실컷 웃었다는 듯이 괜히 눈가를 한 번 쓸어 본 마네가 웃음을 멈추지 않고 물었다.

“그렇게 좋아?”

자신보다 한 뼘은 작은 제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자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 엉켜 들었다.

“어….”

가벼운 질문에 문득 망설임이 느껴졌다. 자취를 감췄다고 생각했던 걱정들의 잔여물이 조각이 난 채로 떠올랐다. 함정일까 봐, 거짓말일까 봐 걱정된 건 사실이었지만, 이렇게까지 기대되는 걸 보면 자신은 그를 믿고 싶은 게 분명했다. 이 복잡한 심경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랐다. 말을 고르고 골라서, 가장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좋아요.”

전혀 낯설지도, 어색하지도 않은 순수한 미소가 작은 얼굴을 가득 채우자, 마네는 미소에 화답하듯 손을 내밀었다. 제인은 그 고결해 보이는 손에 혹여 더러운 것이 묻을까, 허름한 원피스에 손을 한 번 훔치고 맞잡았다.

“손이….”

“더 늦게 전에 가자. 이러다 해 지겠다.”

맞잡은 손이 지나치게 차가웠다. 그의 손이 차갑다고 느낀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늘 밤이었던 탓에 체온이 낮아져서 그런 거라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밤도 아니었고, 쌀쌀하지도 않은데 왜…. 놀라는 틈에 마네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자, 그가 더 세게 쥐어왔다. 아프다고 느낄 정도였다. 잡힌 손은 그대로 이끌려 방문 밖까지 자연스럽게 나갔다.

전시된 장식품처럼 문 앞에 가만히 서 있는 경비병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계속해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이 사람이 뭐길래, 누구길래 날 이렇게 자유롭게 꺼내줄 수 있는 걸까? 제인은 그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그 의문은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 정도의 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더, 더… 자유롭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염치없는 기대였다.

델단과 있을 땐 죄를 짓는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는데, 마네와 함께 있을 땐 해방감에 심장이 뛰었다. 아무런 억압도, 강제성도 없이 이 꽉 닫힌 새장에서 발을 내디뎠다. 누구도 막지 않았다. 이대로 달려나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힐 때쯤, 마네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진짜 가 볼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굳건히 닫혀 있던 성문이 서서히 열리자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기 시작했다.

* * *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계단이 올라가도, 올라가도 끝도 없이 이어졌다. 엑젤리스를 둘러싼 절벽의 틈새를 가까스로 파내어 만든 이 계단은 발 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인지 울퉁불퉁해서 걸음에 온 신경을 쏟아부어야만 했다. 고개를 들자 기다란 하늘이 좁은 틈새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답답해서인지, 숨이 차서인지 제인의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결국, 허리를 반쯤 숙이고 벽을 짚은 채 힘겹게 계단을 올랐다.

“다 왔어, 조금만 힘내.”

힘든 기색을 전혀 찾을 수 없는 마네는 여유롭게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네….”

억지로 쥐어 짜낸 힘이 다리를 움직였다. 날개 덕분에 계단을 올라가 본적이 없어서일 수도, 그간 갇혀있느라 몸이 쇠약해진 탓일 수도 있었다. 종아리가 후들거릴 만큼 힘이 풀려갈 때쯤, 드디어 마지막 계단을 딛고 뜨거워진 숨을 내뱉기 위해 허리를 편 그녀가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분홍색, 보라색, 주황색이 황홀하게 펼쳐져 있는 하늘이 말도 잇지 못할 만큼 감격스러웠다. 어떤 것의 방해도 없이 몸을 휘감는 바람이 가져다 주는 해방감은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어버리게 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누구인지도 전혀 상관없을 만큼, 떠오르지도 않을 만큼 광활한 하늘에 노을이 져가고 있었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다 담을 수가 없지?”

마네가 앉아 있는 제인의 어깨를 붙들고 일으켜 절벽 가까이 향했다. 성의 바깥 풍경은 아무것도 없는, 비쩍 마른 나무 몇 그루가 전부인 땅이었다. 막힘없이 뻗어 나간 지평선은 저 멀리에서 하늘과 맞닿았다. 제인이 발끝을 아슬아슬하게 걸쳐 허공에 손을 뻗었다. 잡을 수 없는 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혹시나 떨어질까 봐 뒤에서 어깨를 잡은 마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서워요.”

제인이 그렇게 말하곤 마네의 품에 등을 기댔다.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이 떨림으로 변해 생생하게 마네에게 전달되었다.

“내가 잘 잡고 있을게.”

달래는 듯한 그의 말에 제인이 제 어깨를 붙들고 있던 손을 붙잡아 떼어냈다.

“날개가 있을 땐, 높은 곳이 무섭지 않았는데….”

바람이 흉흉한 소리를 내면서 절벽을 때렸다. 그 소리마저 낭만적으로 들렸다면 이상한 걸까, 제인은 가만히 눈을 감고 온몸으로 바람을 맞이했다.

“당신을 믿기 전엔, 또다시 배신 당할까 봐 두렵지 않았었는데.”

그 말에 노을을 감상하던 마네가 제인을 바라보았다. 둘의 실루엣이 검은 그림자처럼 하늘에 새겨졌다. 서로를 어떤 감정으로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 제인은 그를 의지하고 있었다. 마치 날 배신하지 말아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별이 박힌 듯 반짝이던 밤하늘의 눈에 붉게 내려앉는 노을이 비췄다. 타올랐던 노을이 지고, 새까만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비 온다.”

마네는 제인이 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지만, 대답을 회피했다. 대신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어 한 두 방울씩 쏟아지는 빗방울을 막아 주었다. 대답을 대신에 한 것인지, 얼버무린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제인은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그가 끌고 가는 대로 휩쓸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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