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43)화 (43/95)

43화.

방은 천장이 꽤 높은 편이라 말이 메아리처럼 윙윙 울려 퍼졌다. 문 앞에 깔린 짙은 와인색의 카펫은 기다랗게 정돈되어, 두 개의 턱을 지나 왕좌를 닮은 의자 앞에 끝났다. 그 끝에 앉아 있는 녹스가 거만한 자세로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깔린 검은색 대리석이 기사단장들의 발걸음과 만나 차가운 소리를 냈다.

“오늘 그대들을 부른 건….”

녹스가 턱을 괸 모습으로 11명의 단장을 훑었다.

“사방에 포진해 있는 노스어 탈영병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자 하는 이유일세.”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모두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녹스가 편하게 등을 기대어 앉는 것을 시작으로 말문이 터지기 시작했다.

“노스어의 병사들이 사방에서 옥죄어 오고 있습니다. 정규 병사는 물론이고, 탈영병들까지 말썽이에요.”

“하지만 황무지를 통과하긴 어려울 겁니다. 괜히 인력을 낭비하는 게 아닐지 염려됩니다.”

“태평하게 있다가 죽는 건 결국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입니다. 무리해서라도 주변을 수색해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본인의 의견을 제시하는 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녹스가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서서히 알아차려 갔기 때문이다. 전쟁귀라고 불렸던 과거가 무색할 만큼 그는 이 갈등에 무관심해 보였다.

“대장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분위기가 점점 가라앉자 보다 못한 루이스가 물었다.

“그대들의 의견은 모두 옳다고 생각하나….”

나른한 목소리가 늘어졌다.

“먼저 주변을 수색하자는 건 동의할 수 없다.”

그 의견을 꺼냈던 단장이 대뜸 몸을 들썩이며 반발했다.

“하지만 사방에 적이 있는데 어떻게 발 뻗고 편히 자겠습니까!”

녹스의 허공을 향하던 시선이 반걸음 앞서 나와 이야기하던 단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발 뻗고 잘 생각을 하다니, 참 기특하군.”

“그런 게 아니라….”

“엑젤리스는 방어가 견고한 요새일세, 먼저 뛰쳐나가는 일은 없어.”

녹스의 말에 모두 동의하고 있었다. 좁고 긴 협곡을 통과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 지리 특성상, 공략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단장은 여전히 불만인지 무언가 말을 꺼내려 하자 루이스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결국 풀이 죽은 채 도로 뒤로 물러났다.

“먼저 불필요한 사상자를 낼 필요는 없다. 우리 병력을 드러내면 약점만 될 뿐이니.”

간결하게 할 말을 마친 녹스는 다시 한번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가 태평하게 말을 꺼내고 있다 한들, 그도 몹시 긴장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애초에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는 땅에 불법 사병들까지 더 고용한다면 수도에서의 개입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 적은 병력으로 방어하자니 불안한 건 매한가지였다. 여태 어떤 침략도 없이 버텨온 엑젤리스였지만, 주변에 몰려드는 노스어의 탈영병들은 날이 갈수록 수가 증가했다. 기사 단장들과 마찬가지로 녹스의 마음 또한 편치 않았다.

“저희 파수대는 인력을 보충하여 사각 없이 경계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일하게 판금 갑옷을 입고 있지 않은 파수대 단장이 불만 없이 시정 사항을 얘기함에 따라 모두가 하나둘 미리 준비해 놓았던 말을 하기 시작했다.

“녹지화 인력을 제외하곤 모두 첨탑 건설 및 방벽 보수에 배치하겠습니다.”

“인구가 예전보다 많이 늘어 현재 있는 대피소로는 부족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주민들의 대피소를 새로 마련하겠습니다.”

“협곡의 수비를 강화하겠습니다. 파수대의 지원을 받아 절벽 위에서도 경계한다면 좋겠고요.”

“경비대는 앞으로 엑젤리스에 방문하는 자들을 모두 철저히 조사하거라.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있으면 방문을 거절하도록.”

녹스가 가만히 그들의 말을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경비대 단장을 보며 한 마디를 전하고는 카펫을 따라 쭉 걸어 나갔다. 루이스가 그의 뒷모습에 대고 경례를 하자, 다른 이들도 따라 경례를 전했다. 그는 육중한 문을 가벼운 손짓으로 밀더니, 그대로 방을 떠나 버렸다. 회의장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돌던 침묵이 깨지며 소란스러워졌다.

“별로 관심이 없으신 것 같으셔.”

“우린 큰 전투에 나가본 사람이 별로 없잖아, 걱정하실 만도 하지.”

“우리가 영 믿음직스럽지 않으신가 보네.”

“우리 같은 오합지졸이 눈에 차기나 하시겠어?”

걱정은 불안이 되어 저마다 한마디씩 불만을 토로하자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녹스는 그 웅성거림을 들으며 닫힌 문에 기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빛나던 그의 눈이 감기자 가면은 마치 고장 난 인형처럼 불이 꺼졌다.

그는 무척 지쳐 보였고, 그 피로는 단순히 언제 자신의 성지를 침략할지 모르는 탈영병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기색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통해 드러났다. 그가 느끼는 내적 갈등은 과거, 전쟁에 대한 참혹한 기억 때문도 있었겠지만, 다른 이질적인 혼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이질감 드는 혼란의 원인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녹스, 본인뿐이었다.

* * *

델단은 오랜만에 밖에 나돌지 않고 방에 얌전히 있었다. 혼자 침대에 엎드린 채로 흥얼거리는 그는, 엑젤리스에 온 이후로 가장 즐거워 보였다. 사실 혼자가 아니었다. 그에겐 새로운 친구가 생겼으니까. 머릿속에 자리 잡은 괴물은 어느덧 익숙한 존재가 되었다. 괴물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들어보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다 자신에게 도움 되는 말들뿐이었다. 델단은 그 괴물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흐음, 수도에 가서 새롭게 시작하자는 거지?”

저녁 식사를 전해 주러 온 하녀가 테이블에 식사를 차릴 때도,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물을 때에도, 이만 가보겠다고 인사를 할 때도 그는 여전히 괴물과 미래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녀가 꺼림칙한 눈길로 그를 살폈지만, 델단은 더 이상 사람들의 이상한 눈초리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괴물 덕분이었다.

“백작님께서 수도로 가자고 하긴 하셨었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수도를 떠올렸다. 황제가 사는 하얀 성이 하늘을 뚫을 듯 높게 자리 잡고 있고, 사람들은 모두 유식한 덕에 아주 교양있겠지. 겨울이 되어도 식량 걱정도 없고, 나 같은 사람도 어디선가 인정받고 일할 수 있을 거야.

“일을 왜 하냐니, 나도 곧 가정을 꾸리게 될 텐데.”

베개를 끌어안고 수줍게 말하는 델단은 누가 보아도 사랑을 하는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는 제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베르티아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동네에 혼기가 찬 여자와 적당한 결혼을 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엑젤리스로 오길 잘했다는 마음도 들었다. 이대로 비예단이 정신만 차려서 가올테 백작을 후견인으로 삼으면 앞길이 창창했다.

“수도로 가면 결혼부터 해야겠지? 비예단이랑 같이 사는 걸 제인이 좋아할까?”

제인을 포함해 셋이서 함께 수도로 가서 살림을 꾸리는 상상을 하자 저절로 발이 동동 굴러졌다. 백작에게 더럽혀진 몸이 걱정이었지만, 백작이 비밀로 해준다고 약속했었으니, 자신과 비예단만 입을 다물면 세상 사람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제인도 분명 날 좋아할 거야.”

아직도 손가락에 내가 준 꽃반지를 끼고 있을까? 그녀의 하얀 손을 떠올리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수도로 이사하면, 백작님께 돈을 빌려 예쁜 결혼 반지를 선물해야지. 후견인이니까 집도 구해 주시겠지? 비예단은 유능한 사제니까, 어쩌면 신전에서 집을 구해줄지도 모르겠어. 델단은 이 달콤한 상상에서 헤어 나올 수도, 헤어 나오고 싶지도 않았다. 곧 현실이 될 미래가 기대되어 온몸이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이제 그만 나가는 게 어때? 제인을 자유롭게 해주려면, 지금 나가서 둘러봐야지.’

델단은 괴물의 말에 따라 몸을 일으켰다. 베개를 털어 반듯이 올려두고,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깔끔한 옷을 골라 입었다. 머리에 물을 묻혀 앞머리까지 올리자 제법 멀끔해 보였다. 이 정도면 제인이 귀족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당장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백작님이 작위를 사는 방법도 있다고 하셨잖아, 사 주실지도 몰라.

그는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 사랑의 도피를 계획 중이라는 자신에게 심취되어서, 자신이 그녀를 정말로 사랑한다고, 그녀 또한 자신을 사랑한다고 망상하고 있었다. 가올테의 저택에서 누리던 모든 편의가 원래부터 제 것이었던 마냥 그는 사치스럽고 몰염치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밖에 나서서 하릴없이 돌아다니기 시작한 그는 의외로 꽤 꼼꼼히 주변을 살폈다. 성문 앞의 경비와 순찰 인력들을 시간대별로 기억해 두기도 하고, 산책을 핑계로 성벽의 바깥으로 나와서 도망 나온 뒤 숨을 돌릴 곳까지 알아보았다. 생각보다 경비가 그리 삼엄하진 않아 가볍게 몸만 나온다면 탈출이 어려워 보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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