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42)화 (42/95)

42화.

“제가 잠시 정신이 어떻게 됐었나 봐요, 심려를 끼쳐드려서, 귀한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정말….”

긴장이 사그라지자 말이 술술 나왔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바람에 매몰차게 거절해도 됐었는데, 이렇게 차까지 대접해 주며 환대를 받으니 나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불편한 생각이 자리 잡기도 했다. 비예단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날 이렇게까지 관대하게 봐주는 걸까. 라는 열등감의 조각.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데, 당연히 귀한 시간을 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대와 동생이 서로 우애가 깊은 건 알고 있었네. 보다 심려 깊게 살피지 못한 날 이해해 주게.”

정말로 풀이 죽은, 미안함이 가득 담긴 사과에 델단이 쩔쩔매며 두 팔을 들어 가로저었다. 무작정 찾아왔는데도 편안히 맞이해 준 데다, 저같이 평범한 사람에게 사과까지 해주는 게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동생보다는…. 그대 걱정을 먼저 하는 게 맞는 것 같군.”

녹스가 델단이 앉아있는 소파로 몸을 기울였다.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는 늑대 가면에 지레 겁먹고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지만, 커다란 손바닥이 뒤통수를 붙드는 탓에 멀리 가지 못했다. 차가운 손가락이 귓가를 쓸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델단의 눈매가 촉촉이 젖어가면서, 그 눈에 공포, 원망, 그리고…. 희미한 기대가 비췄다.

“저, 저…….”

의미 없는 단말마로 녹스의 손을 저지하려 했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그 차가운 손은 절대 그를 놓아 주지 않았다. 가올테의 총애를 받았던 첫날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우악스럽고 두꺼운 손길과는 달랐다. 가볍고 부드러운, 시원한 느낌…. 이 사람으로 바꾸는 거야? 백작님은 버리는 거야? 네 안락한 생활을 책임져 주겠대? 그렇대? 괴물이 머릿속에서 낄낄거렸다.

“아니야!”

발작이라도 일으키듯, 몸을 튕기는 탓에 녹스가 손을 거뒀다. 그의 손끝엔 굳은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델단은 멀어진 그를 경계하며 바라보다가, 가면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눈이 가올테처럼 욕망이 번들거리는 눈빛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셰이단, 의사를 불러라.”

델단의 이해되지 않는 과격한 행동에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태연하게 대하는 녹스는 사실 그의 정신 상태를 깊이 의심하고 있었다. 환청, 환각…. 그게 뭐든 간에 정상인의 범주는 아니었다. 귀에서 흘러내린 피 때문이 아니더라도, 정신에 문제가 있음이 의심되어 급히 의사가 필요했다.

“예.”

셰이단이 대답과 동시에 문을 나서려다 말고 문고리를 잡는 손을 멈추었다. 그 손을 멈춘 건 델단의 질문이었다.

“마네…라는 사람은 이 성에서 살고 있나요?”

그 이름을 듣고 이 방에 경직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녹스 또한 마찬가지로,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알지?”

“제인이 아는 사람이라고 하길래 궁금해서 여쭸는데, 죄송합니다.”

방 안의 공기까지 멈춘 것처럼, 순간 내려앉은 이상한 분위기에 델단은 자신이 뭔가 말실수를 했구나, 싶어 바로 꼬리를 내렸다. 새장 안에 가둬 둔 애첩을 함부로 만났다고 혼이 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아니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

녹스가 조용히 심호흡하는지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뭔가 대답을 하려다가 망설이는 듯 주먹을 쥔 그가 하려던 말을 포기하고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 이름을 제인이 말했나?”

“네, 이 성에서 그나마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던데요.”

뭔가 실수를 한 것은 확실하니 잘못을 제인에게 떠넘기려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녹스는 그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혼자 생각에 잠겼다가 곧이어 셰이단에게 어서 나가보라고 손짓한 뒤, 델단의 주의를 끌기 위해 새로운 주제를 꺼냈다. 그저 이름을 들었을 뿐인데도 온몸이 무거워지는 탓에 기분이 저조해졌다. 씁쓰름한 입맛이 혀에 맴돌았다.

“그대는 베르티아로 돌아갈 수 없어.”

최대한 좋은 어투로 말하고자 노력했음에도 이미 예민해진 신경이 어쩔 수 없이 정곡을 찔렀다. 델단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졌다.

“…역시 그렇겠죠.”

“하지만 조만간 돌아올 거라 장담하겠네. 아무리 싸웠다 한들, 피를 나눈 사이에 그 정도 다툼으론 흠이 생기지 않으니.”

델단에게 격려를 담은 조언을 해주었지만, 그게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에겐 이런 껍데기뿐인 위로보단 의사의 진단과 치료가 필요했다. 머리를 비우고 휴식을 취하는 것도.

하지만 그런 진료를 델단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정신이 나간 사람에게 정신이 나갔다고 말하는 것만큼 웃기는 일도 없을 텐데. 녹스는 마음이 꺾인 델단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루빨리 비예단을 불러오는 것 말고는 실마리가 없어 보였다.

* * *

녹스는 저녁 식사 전, 책상 위에 가지런히 모여있는 편지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와 그가 불법으로 점유하고 있는 엑젤리스는 아르모단에 존재하는 모든 성과 영지 중에서도 아주 독립적인 곳이기에, 받는 편지는 많지는 않았다. 몇 개 없는 편지를 살피다가 유독 눈에 띄는 글자가 보였다.

「율리나 레이스」

화려한 기교를 담은 글씨체가 남긴 서명이 분홍빛이 도는 편지지에 새겨져 있었다. 먼 길을 오면서도 아주 소중히 가져온 덕인지 조금의 훼손도 없이, 온전한 모습이었다. 녹스는 그 편지지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종이에선 복숭아향이 진동하고 있었다.

“이건 왜 여기 있지?”

편지를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가락 끝으로 살짝 집은 녹스가 셰이단에게 물었다.

“하나 정도는 보여 드려야 할 것 같아 두었습니다.”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야.”

“앞으론 창을 연 후에 전달하겠습니다.”

능청스러운 대답에도 딱히 별 말하지 않던 녹스는 편지를 한참 노려보던 편지를 찢어 버리기 시작했다. 반으로, 또 그 반으로, 반으로 찢어진 편지가 무수히 많은 조각이 되어 바닥에 흩뿌려졌다.

“제가 치워야겠군요.”

셰이단이 또 능청을 부리며 말했다. 바닥에 편지 조각을 흩날린 녹스가 양 손바닥을 한 번 쓴 뒤 집사의 어깨를 두 번 토닥거리며 격려했다.

“고생하게.”

짧은 응원도 빼먹지 않은 그는 오늘 업무는 끝이라고 선언하듯이 입고 있던 케이프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집무실을 떠났다.

* * *

늘 그랬듯 이 시간이면 찾아오는 손님인 마네가 제인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가 왜 매번 자신을 찾아오는지 궁금했던 제인은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물어볼까 했지만, 괜히 물어봤다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싶어 결국 손만 흔들어 보였다.

“방에만 있으면 안 답답해?”

당연한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한 마네가 익숙하게 제인의 곁에 앉았다. 그에게서 얼핏 풍기는 복숭아향에 제인이 코를 킁킁거리면서 그의 품에 냄새를 맡았다.

“…뭐해?”

양손을 올린 채 당황한 표정을 지은 마네가 물끄러미 제인의 정수리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엇, 죄송해요!”

향긋한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무례를 저지른 제인이 뒤로 한참이나 물러나 사과했다. 방금 한 행동에 자각은 있었는지 붉게 달아오른 뺨이 누가 봐도 창피한 사람이었다.

“무슨 냄새 나?”

별일 아니라는 듯 웃은 마네가 자신의 옷을 둘러보고 걱정스레 물었다. 급하게 오느라 옷을 못 갈아입었다며 변명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그게, 복숭아 향기가….”

“아아, 복숭아 냄새가 좀 지독하긴 하지.”

눈을 게슴츠레 뜬 그는 입술을 씰룩거리는 표정으로 괜히 과장되게 말했다. 눈칫밥을 오래 먹었던 제인이 그가 불편해한다는 걸 알아채고 더는 묻지 않았다.

“그나저나…. 제인, 내 이름을 알고 있다며.”

방금의 과장 된 표정이 마치 거짓이었던 것처럼 무표정하게 묻는 마네는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도통 생각을 모르겠는 사람이라고, 제인은 그가 감정을 숨기고 꾸며내는 데에 아주 능숙하다고 생각했다.

“마네…로드게릭스.”

지그시 눈을 감고 제인이 불러주는 이름을 음미한 마네가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어쩐지 질책하는 눈빛에 제인은 어디서 그 이름을 봤는지 실토했다.

“저번에 준 만년필에 쓰여 있어서 외워 뒀어요.”

“만년필에…. 그래, 뭐.”

마네는 늘 들고 다녔던 만년필을 생각하고 있는지 보라색 눈동자가 잠시 위를 향했다. 이윽고 여태의 이상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밝은 목소리로 주제를 바꿨다. 이리저리 튀는 주제에 아직 인간과 대화하는 게 불편한 제인이 맥락을 따라가고자 애썼다.

“내일 별일 없으면 같이 노을 보러 갈래?”

“…갑자기요?”

반가운 제안이었으나 제인은 쉽사리 긍정을 표하지 못했다. 방에 갇혀 있는 신세인데, 그런 약속을 함부로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마네는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설득했다.

“경치가 아주 좋은 곳을 알거든, 나가고 싶지 않아?”

속삭임이 제안만큼이나 달콤했다. 그녀는 보일 듯 말 듯 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주절거렸다.

“제가 여기서 못 나가서….”

“괜찮아, 나랑 같이 가면.”

진지한 말투가 믿음이 갔다. 매번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델단과는 달리, 그는 늘 문을 열고 들어왔으니까. 검은 늑대와 같은 은색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한 번쯤 만져 보고 싶은 탐스러운 은발, 분명 그는 검은 늑대의 형제일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감시당하고 있는 저를 제 방 드나들듯 매일 만나러 오기 쉽지 않을 테다.

“내가 지켜줄게, 걱정하지 마.”

마네를 따라 나간다고 하더라도 크게 혼나거나 벌을 받진 않지 않을까, 이렇게까지 확신하는데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제인의 천천히 끄덕이던 고갯짓이 점점 빨라졌다. 오랜만에 탁 트인 하늘을 볼 생각에 벌써 기대되었다. 그가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게 아니라면, 내일 분명 청명한 하늘을 눈에 담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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