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우리 같이 도망가요.”
정말 황당한 소리였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대답을 망설였다. 제인은 그토록 바라던 일임에도 감히 그러자고 할 수 없었다. 아직 완벽하지 않은 신뢰 탓에, 이 사람이 날 떠보는 걸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예단이라고, 내 동생이 있어요. 그 애라면 우릴 숨겨 줄 수 있을 거예요.
우리 같이 도망가서, 셋이 행복하게 살면…. 그럼 난 너무 좋을 것 같은데.”
델단이 여태 꿈꿔왔던 상상을 구체화 시켰다. 제인은 그 말을 듣기는 들었지만, 감히 실현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괜히 그러자고 했다가, 기대만 했다가, 물거품이 되면 그보다 잔인한 게 없을 테니까. 희망에 반짝이는 녹색 눈을 일부러 외면했다.
“혹시, 여기에 더 아는 사람 있어요? 나 말고.”
델단은 바로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는지, 손을 내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으음, 마네라는 사람이 종종 놀러와요.”
그녀는 ‘마네’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둘 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니 이름 정도야 상관없다고 여겨 나온 대답이었다. 하지만 델단은 망설임 없이 나온 대답에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제인이 나처럼 완전히 고립된 게 아니구나, 라고 실망하고 있었다.
* * *
제인에게 같이 도망가자고 했을 때 그녀는 딱히 거절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사이에 진전이 있다고 생각한 델단은 이곳에 온 이후로 이례 없이 기분이 좋았다. 콧노래를 흥얼대며 방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 도는 현기증이 일었다. 비틀거리다가 붙잡은 난간에 기대어 넘어질 것 같은 몸을 지탱했다.
도망가자. 멀리 떠나자. 우릴 도와줄 사람이 있어. 그분께 받은 은혜를 벌써 잊었어? 널 먹여 주고, 재워 줬잖아, 이 쓸모없는 머저리야. 머리를 울리는 역겨운 소음이 다시 시작되었다.
“괜찮으세요?”
“그만…! 제발 그만!”
난간을 붙들고 숨을 몰아쉬는 그는 누가 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복도를 지나가던 하녀가 한두 명 가까이 와서 그의 상태를 확인했지만, 그는 대뜸 소리를 질렀다.
“집사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
한 명에서 두 명, 두 명에서 네 명… 점점 불어나 델단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인원들은 그를 더 불안하게, 미치게 했다.
‘더러운 놈.’
‘어쩜, 멀쩡하게 생겨서 왜 그랬대?’
‘아직도 동생한테 빌어먹고 산다지?’
그를 향한 모든 눈알이 붉게 타올랐다. 그에게 내뱉는 모든 말들이 왜곡되어 가시가 박혔다. 하녀들의 입에 날카로운 이빨이 자라고, 머리엔 뿔이 돋아 점점 커져 갔다. 점점…점점…델단에게 뻗어오는 그것들의 손은 붉고, 검고, 더럽게 오염되어 있었다.
“나, 나한테서 당장 손 떼!”
이것 봐, 너는 안돼! 너는 그가 없으면 안 돼! 동생이 없으면 넌 아무것도 아니야! 모두가 널 좋아해, 모두가 널 사랑해! 델단, 아아… 델단, 너는 아름답구나. 여태 봤던 사람 중에 제일 마음에 들어. 내 이름을 불러 봐, 백작이라고 하지 마, 이 돼지 새끼야! 당장 나한테서 떨어져!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가올테의 지방 가득한 목소리가 뇌를 장악했다. 그가 델단을 불렀다. 백작님, 어디 계세요? 도움이 필요해요. 절 여기서 꺼내 주세요. 거봐, 넌 그가 없으면 안 되잖아? 끔찍해, 끔찍해, 벗어나고 싶어. 아니, 넌 사실 편하다고 생각했잖아.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아, 아냐…! 아니라고!”
델단이 귓가를 주먹으로 마구 때리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 보았다. 걱정스러운 시선의 눈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알을 다 파 버릴까.
“전 괜찮아요, 죄송해요. 시끄러워서.”
태연히 괜찮다고 중얼거리고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델단은 모두에게 웃음을 보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두에게 나누어 주던 그 미소였다. 그는 왜 하녀와 하인들이 자신의 주변에 머물러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마저 계단을 올랐다. 긁적, 긁적, 긁적, 긁적, 긁적.
“시끄럽네.”
그는 방에 들어온 이후에도 계속해서 메아리치는 환각에 귀를 긁고 있었다. 긁적, 긁적, 긁적, 긁적, 긁적, 긁적. 귀를 긁는 소리가 마치 벌레가 파고드는 소리 같아 꺼림칙했다. 아냐, 벌레야. 네가 들어가서 내 머릿속에 있는 괴물을 잡아먹어 주렴. 긁적, 긁적, 긁적, 긁적. 네가 갉아먹어 줘. 그럼 잠잠해질 거야. 델단은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긁어댔지만, 그건 자신의 피가 아니라 괴물의 피였다. 드디어 괴물이 죽었구나! 으하하, 하하! 웃음소리가 방 바깥까지 들려왔다. 그는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동생한테 편지가 왔는데,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별안간 방에 셰이단이 나타났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들어올 땐 없었으니 방금 따라 들어온 것 같았다.
“비예단한테서요? 지금 읽어 볼래요!”
셰이단이 인자하게 웃는 모습으로 편지를 건넸다. 설레는 마음으로 봉투를 잡으려고 했는데, 자꾸 손이 헛나가 공중을 맴돌았다. 다른 손으로 뻗은 팔을 붙잡고 다시 한번 잡으려 하는 순간, 셰이단이 편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채 홀연히 사라졌다. 말 그대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어떻게 된 일이지?
눈을 비비고 다시 셰이단이 서 있던 자리를 봤지만 아무 흔적도 없이 그가 사라졌다. 편지는 테이블 위에 여전히 남아 있기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글자를 하나도 읽을 수가 없었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어서 단 한 글자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요즘 스트레스를 받은 탓이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했다. 셰이단한테 찾아가 보자, 그 사람이라면 대신 읽어 줄 거야. 머릿속의 괴물이 또다시 뭐라 뭐라 떠들고 있었다. 벌레가 아직 덜 갉아먹었나. 그래도 이번만큼은 꽤 도움 되는 말을 해주기에 죽이기 전 잠깐은 참아 보기로 했다.
꼭대기, 꼭대기, 꼭대기!
괴물이 계속해서 지껄였다. 델단은 괴물의 말대로, 꼭대기 층을 향해 걸었다. 걸음걸이가 뻣뻣해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높은 분들은 꼭대기 층을 좋아하지. 가올테 백작의 방도 제일 위층에 있었던 걸 떠올리며 델단이 이를 갈았다. 높은 사람들은 저 높이서 아랫것들을 보는 걸 즐기나, 평범한 시골에서 나고 자라면서 한 번도 계급에 대해 문제점을 느끼지 못한 그가 난데없이 분노를 느꼈다.
델단의 뒤엔 많은 사람이 따라붙고 있었다. 고용인들과 녹스의 방 앞을 지키는 기사들, 위층이 소란스러워 올라와 본 셰이단까지 많은 사람이 그를 만류하고 있었다.
“델단 님! 어딜 가시는 거예요?”
“괜찮으세요? 피 좀 봐!”
귓가에 끈적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델단은 멍한 눈빛으로 계속해서 저지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계단을 올랐다. 3층의 손님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강하게 제압하지 못하면서도, 새삼 그의 무력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뻣뻣하게 굳은 몸은 뭔가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길을 모두 뿌리쳤기 때문이다.
“아!”
시야의 사방이 가로막힌 경주마처럼 4층에 거의 도착한 델단이 계단 위의 누군가와 부딪혔다.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처럼 비틀대는 그의 몸을 커다란 손이 잡아챘다. 그제야 정신이 든 델단은 흐리멍덩한 얼굴을 들어 손의 주인을 확인했다. 말로만 들었던, 소문으로만 알고 있었던 그 사람이었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녹스가 자신만 사용하는 층에 몰려 있는 무리를 보고 불쾌함을 가감 없이 표출하며 말했다. 고용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할 뿐, 정확한 이유를 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델단을 흘깃거리면서 간접적으로 표명했다.
“델단 님이 주인님께서 잠시 시간을 내 주시길 청한다고 하는군요.”
그 혼란 속을 정리한 건, 태연한 말투로 공손히 요점을 말하는 셰이단이었다.
녹스는 의외로 순순히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너무나 반듯해 오히려 더 어지러운 집무실에 어색한 자세로 앉아있는 델단은 ‘제가 잠시 미쳤었습니다.’라고 말을 해야 할지, 정말 제 할 말을 꺼내야 할지 곤혹스러운 기분이었다. 가올테 백작을 제외하곤, 높은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긴장한 손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갔다. 델단은 축축이 젖은 손을 바지춤에 닦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시큼한 맛이 특징인 리베르타의 찻잎으로 우렸습니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셰이단이 고급스러운 민무늬 찻잔에 능숙한 솜씨로 차를 따랐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지? 내가 왜 여기에 앉아 있는 거지? 혼란에 빠진 델단의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면서, 어찌할 줄 몰라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나를 만나기 위해 그 소동을 벌인 건가?”
찻잔을 쥐려던 손이 녹스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부드러운 저음에 서려 있는 걱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제인과 몇 번 대화를 나누면서 자연스레 그에 대해 쌓였던, 안 좋은 이미지가 한 번에 쇄신되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나쁜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안도가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