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40)화 (40/95)

40화.

처음으로 잡아 본,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셨다던 그 검은 생각보다 잘 들지 않았다. 뻣뻣하고 손질 안 된 나무막대기 같은 게, 마치 내 긴장 때문에 뻣뻣해진 몸과 같았다. 꿈에선 몸이 물먹은 솜처럼 잘 움직여지지 않다 보니, 어설픈 내 움직임이 더 엉망이었다. 그래서 금세 지쳐 버리곤 했는데, 한 번 지쳐 버리면 내가 제일 끔찍하게 생각하는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탓에, 나는 늘 미친 사람처럼 이를 악물고 싸웠다.

‘아버지!’

형의 울부짖는 외침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돌아보지 마, 돌아보지 마! 아무리 현실의 내가 소리쳐도, 꿈속의 나는 늘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아버지가 있었다. 노스어 병사의 검에 목이 겨누어진 채로. 오랜 세월을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던 아버지가 일개 병사한테 붙잡힐 리 없었다. 아버지는 전투 전, 아내가 임신했다며 부디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기사를 위해 몸을 내던졌다. 아버지는 원망스럽지도 않은지, 도망가는 제 기사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날 선 칼이 목에 핏자국을 내도 결연함에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형이 울부짖으며 활시위를 당겼다. 난 당연히 그 화살이 아버지를 붙들고 있는 저 빌어먹을 병사에게 적중하리라 생각했다. 형은 똑똑하니까, 이번에도 완벽하게 해낼 것이라고. 나는 이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아버지가 그때 우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했다. 묻고 싶었다. 형을 믿으셨나요?

“…헉…허억…!”

녹스는 형이 활시위를 놓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끈적였다. 너무 오래 잠든 탓일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을 꿔서일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가지런히 내려앉아 있던 속눈썹이 흔들렸다. 서서히 감긴 눈을 떴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여전히 누워있었다. 꿈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이 밤이 아니었더라면, 그의 절망에 빠진 얼굴이 손가락 사이로 들통날 뻔했다.

손을 더듬어 조명을 켜자 푸른 빛이 환하게 방을 밝혔다. 비싼 마법을 무슨 이런데에 쓰냐며 성을 내던 빅토르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는 어이없게도 웃음이 나왔다. 빛이 퍼진 방안은 모든 것이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유난히 깔끔을 떠는 셰이단의 솜씨였다. 벽면에 있는 사냥 트로피와 동물 가죽으로 만든 널따란 카펫은 집무실에 있는 것과 비슷한 걸로 보아 그의 취향인 듯했다.

넓은 방 안에는 침대와 책상 등 몇 가지의 가구를 제외하곤 썰렁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는 맨발로 바닥을 디뎠다. 찬 기운이 느껴졌다. 엑젤리스를 감싸고 있는 절벽을 뛰어넘은 높은 바람이 책상 뒤에 자리한 창문을 때렸다. 음산하고도 기이한 소리가 났지만, 녹스는 종종 새벽에 눈을 뜬 날이면 그 소리를 즐겨듣곤 했다.

책상 위에 엎어놓은 액자가 똑바로 새워져 있었다. 셰이단의 짓이군. 오랜만에 액자를 들여다보자 아버지와 어머니, 녹스와 형이 사이좋게 소파에 둘러앉아 있었다. 형은 유독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 그림을 그린다고, 몇 시간이나 가만히 앉아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형이 울면 울었지, 웃고 있지 않았었는데.

그림 속 어린아이의 얼굴에 활시위를 당기며 울고 있던 형의 얼굴이 겹쳤다. 안돼, 더 이상 떠오르면 안 돼. 머리를 계속 저어봤자 기억만 흩어질 뿐, 감정은 그대로였다. 사랑받지 못해 늘 갈구하던 애정이, 기대감에 대한 압박감이, 홀로 남은 외로움이, 조금 더 용감하지 못했던 후회가. 어디에 쏟아 버릴 곳 없이 가슴에 담아둔 돌덩이는 결국 멍이 되었다.

“…대체 왜 그랬어, 형?”

물을 잔뜩 먹은 목소리가 마구잡이로 갈라졌다. 무서워서 묻지 못했던 질문이 힘겹게 나왔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어제 저녁, 어쩐 일인지 식사로 따뜻한 죽이 나온 덕에 허한 배를 채울 수 있었던 제인은 어느 때 보다 깊이 잠들었었다. 한 조각의 꿈도 꾸지 않고 푹 잠들었던 제인은 눈을 뜨자마자 창가를 확인했다. 혹시 자는 사이에 델단이 선물을 두고 갔을까 하는 기대라기보단, 요즘 익혀진 습관이었다.

그가 오지 않았었음을 확인하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자 어제보다 훨씬 나은 몸 상태였다. 목이 조금 칼칼하기도 했지만, 잘 먹고 잘 잔 덕인지 계속해서 괴롭혔던 근육통이 아주 미세하게 남아 있는 것 빼고는 이렇다 할 나쁜 곳이 없었다.

며칠 전, 검은 늑대에게 이끌려 지하 감옥에 간 일 말고는 이곳 사람들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게 의문스러웠다. 발목을 붙들고 있던 족쇄는 그날 풀린 뒤 다시 채워지지 않았지만, 아무런 기대도 되지 않았다.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제인에게 희망은 그저 정신을 갉아먹는 벌레일 뿐이었으니까.

희망이 밀어내진 공간에 상실감이 대신 자리 잡았다. 제인은 공허한 마음을 붙들고, 오직 잘 조각된 목각 인형처럼 무던히 앉아있었다. 이 성에서 느낄 수 있는, 아주 작은 자유는 이제 더는 그녀에게 아무런 값어치도 없었다. 간사하게도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탓이었다. 숨통을 조이는 답답함에 마음이 메말라 갔다. 하지만 말라 바스러져 있는 마음에도 기어코 물을 주려 한다면 구할 수는 있을 것이었다. 비록 맑은 물이 아닐지라도.

“제인!”

초점 없는 눈이 또렷하고 청량한, 여름날의 신선한 바람 같은 목소리에 생기를 찾았다.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지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림처럼 똑같은 창문의 풍경에 아는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델단?”

“오늘은 몸이 좀 나은 거예요?”

그는 날이 더운지, 이마에 땀방울을 식히기 위해 창문 턱에 앉아 손부채질하며 물었다.

“네, 아주 좋아요.”

부채질하던 손이 자연스레 제인의 얼굴을 향했다. 제인은 눈앞의 손을 보고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아버렸지만, 겁먹은 것이 무색하게도 그 손은 살포시 이마를 짚어 열을 확인했다.

“이제 열은 없네요.”

“계속 잠만 자서….”

델단이 자신을 마주 보는 검은 눈에서 고독을 읽어냈다. 왠지 모를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 동질감은 동정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그녀가 느끼기에, 델단은 조금 들떠 보였다.

“반지, 끼고 있네요?”

꽃반지를 전해주러 온 날, 아픈 모습에 놀라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는데 어디서 찾아 끼고 있는 건지, 그녀의 이마를 짚었던 손이 제인이 끼고 있는 반지를 향했다. 마음이 괜히 설레었다. 손에 닿는 따뜻한 촉감에 부끄러움이 몰려온 제인이 손등으로 그의 손길을 쳐냈다. 델단은 손을 두어 번 털면서, 아야. 하고 엄살을 피우다가, 창틀에 앉을 채로 무릎에 턱을 괴어 웃었다. 흡족한 얼굴이었다.

“죄송해요….”

“반지 끼고 있어 줘서 고마워요.”

아. 이 사람의 목소리는 따뜻하다. 봄이 시작된 날, 햇빛을 가득 머금은 이슬처럼. 추운 겨울, 서로를 덮어주는 온기처럼. 제인은 뱃속이 말랑해진 것처럼 울렁였다. 그는 친절하고 다정해서, 편견 없이 대해 주는 마음이 고마워서, 하마터면 그의 손을 붙들뻔했다.

그가 주는 다정은 여태 인간에게 당해온 끔찍한 기억들을 모두 없애 주진 못했지만, 당장은 잊을 수 있게 해주었다. 교류, 소통, 대화. 지성을 가진 생명체라면 당연히 필요로 하는 것들을 오랜 세월 누리지 못하고 살았던 제인에게, 그는 말라붙은 땅의 저수지나 다름없었다. 저수지의 물이 썩었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당장 목을 축일 정도는 되었다. 이젠 평생 못 느낄 것이라 여겼던 사치들이 그의 넘치는 관심으로 채워졌다.

“언젠가 반드시 은혜를 갚을게요.”

단연히 말하는 그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었지만, 델단은 웃어 버렸다.

“말이라도 고마워요”

분하다는 얼굴로 멀뚱히 그를 바라보는 표정은 심통이 나 보였다. 그의 고맙다는 말에도 대답 없이 입꼬리가 축 늘어져 있었다.

“이건 선물.”

델단이 내민 손에는 찢어진 천 사이에 소중히 보관된 곡물로 만든 비스킷이 있었다. 제인 또한 소중히 그 선물을 받았다.

“사실, 저도 갇혀 있는 신세라 더 좋은 걸 못 줘서 마음이 쓰이네요.”

내밀고 있는 낡은 천이 쑥스러운지, 제인이 비스킷을 가져가자 재빠르게 천을 접어 주머니에 넣는 델단은 애꿎은 목덜미를 긁으며 말했다.

“갇혀있다니…. 무슨 소리예요?”

비스킷의 냄새를 맡다가, 놀란 눈으로 그를 보는 눈빛에는 델단이 그러했던 것처럼 걱정이 담겨 있었다.

“나쁜 의미는 아니에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보호…받고 있거든요.”

제인은 잃어버린 손수건에 대한 사과, 비스킷에 대한 감사를 채 전하지도 못하고 그를 추궁했다.

“사람들이 못되게 구나요, 혹시?”

“제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나 할까요?”

대답 대신에 하는 그의 질문에는 어쩐지 장난기가 가득한 느낌이 다분했다.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가만히 바라보자 델단이 황당한 소리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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