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안녕하세요.”
식당에 들어선 델단이 누군가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녹스의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기러 온 셰이단이었다. 낭패스러운 마음이 일순 앞섰지만, 여유로운 미소로 대답했다.
“델단 님이시군요. 지내시는데 불편하신 건 없으신가요?”
그의 평온한 목소리가 오히려 델단을 자극했는지, 소매를 붙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제 동생은….”
꾸역꾸역 참았던 질문이 비로소 터져 나왔다. 일상에 희석된 줄 알았던 걱정은 없어진 게 아니라, 가라앉은 것이었다.
“동생한테는 아직 답장이 없나요?”
청량해 보였던 녹색 눈에 금세 어두운 빛이 서렸다. 보내지 않은 편지에 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셰이단은 이 대화가 금방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편지는 없었지만, 마침 오늘 비예단 님을 살피러 가시는 기사님이 계시다 들었습니다.”
“기사님이요? 혹시 뭔가 위험한 일을 하는 건 아니겠죠?”
셰이단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섞어 거짓말을 만들어 냈다. 그 사실도, 거짓도 아닌 말이 델단을 안심 시키기도, 불안하게 하기도 했다.
“비예단 님은 엑젤리스에도 아주 중요한 분이시라 절대 위험한 일은 없으실 겁니다.”
“중요한…그렇군요.”
“걱정은 지나치면 독이 되곤 하죠. 염려 놓으시고, 편안하게 지내 주세요. 혹시라도 델단 님의 건강이 상하기라도 한다면 저희가 동생분 뵐 면목이 없어지니까요.”
셰이단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하는데도 델단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다른 고용인들에게 듣기로는 평소엔 밝고 친절하다던데, 동생과 우애가 남다른가, 하고 가벼이 넘겼지만, 그에게 동생은 그보다 더 깊은 감정의 골로 연결되어 있었다. 유능한 동생에게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느껴오던 열등감, 마지막으로 봤을 때 크게 싸웠던 일 때문에 두 번 다시 동생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싶은 불안감. 그 복잡한 심경이 가져오는 원망.
“동생이 저희 마을에, 베르티아에 있는 건 맞는 거죠?”
“네. 조만간 돌아오실 겁니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니니, 날짜가 확정되면 제일 먼저 전달 드리겠습니다.”
델단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힘없는 끄덕임에 셰이단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식당엔 무슨 일로?”
화제를 돌리기 위해 꺼낸 말이 의외로 분위기를 환기했는지, 델단은 조금은 쭈뼛거리면서도 제 할 말을 전했다. 3층 손님 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니 환자식을 준비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라는 제인과의 친분이 너무나도 티 나는 요청이었다.
* * *
녹스는 낮에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해가 떨어질 때까지 잠들고 말았다. 요즘 계속해서 신경 쓸 일이 많은 바람에 피로가 쌓인 탓이었다. 어두운 밤색의 베개에 은색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몇 시간이고 시체처럼 꼼짝없이 누워있는 모습이 평소보다 창백해 보였다. 녹스가 손가락을 움찔거리면서 인상을 썼다. 그는 추억인지 악몽인지 모를 기억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다.
그날 난, 그늘 한 점 없는 햇볕 아래에서 아버지와 훈련을 하고 있었다. 열 살 남짓 되었을까. 그래, 딱 열셋의 생일 전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비처럼 쏟아낸 땀이 등허리를 모두 적시고, 잡혔던 물집이 터져 주먹을 쥐는 것도 고통스러울 때쯤,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문득 떠오를 때쯤, 나를 해방시켜 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누가 찾아왔어요.’
당신을 찾는 목소리에도 아버지는 어머니를 돌아보지 않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똑같은 그 제비꽃 색 눈이 빤히 쳐다보자 난 당황스러움에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어머니의 차가운 시선에도 꿋꿋이 고개 숙여 인사를 전했다. 지금 보니, 어머니께 하는 인사치곤 꽤 거리감이 있어 보였다. 어머니 옆에 꼭 붙어 있는 형이 내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때부터였나. 형은 왜 훈련을 안 받을까 하는 의문이 불만이 되었던 게.
‘손, 괜찮아?’
로드게릭스 가문에 전혀 걸맞지 않은, 적어도 저 시절의 나는 그렇다 여겼던 얇은 미성이 내 손을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내 흉진 손이 가련히 뻗어오는 형의 뽀얀 손과 너무 대비되었다.
‘오후에 아버지랑 사냥 나가기로 했는데, 형은?’
우월감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사냥도, 훈련도 안 받는 형에게 내가 자랑할 거라곤 그런 게 고작이었으니까. 그런 우스꽝스러운 내 말에 대답한 건 형이 아닌 어머니였다.
‘얘는, 마네가 그런 데를 가서 무슨 험한 꼴을 당하려고.’
어린 나는 늘 어머니의 뒤에 숨어 있는 형이 미웠다. 마치 둘이 편을 먹은 듯한, 그 보이지 않는 벽. 아무것도 모를 나이에도 둘 사이엔 내가 끼어들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런 관계는 이후로도 형제간의 걸림돌이 되었다.
어머니가 말한 ‘험한 꼴’이 무엇인지 그 당시엔 알 수 없었다. 그로부터 한참이 더 지나서야 형과 어머니는, 나와 아버지와는 근본부터 전혀 다른, 결이 다른 존재라는 걸 이해했다. 어머니는 내게 따갑게 쏘아붙이고 나서 아버지에게 무어라 말했다.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그리 좋은 이야긴 아니었겠지. 그 뒤로 아버지와 함께 훈련할 수 없었으니까.
아버지는 머지않아 전쟁터에 나가셨다. 곧 돌아올 거라며 우리 형제들을 꼭 안아 주셨다. 어머니와 형, 그리고 내가 남은 집은 말 그대로 끔찍했다. 형은 어땠을지 몰라도, 나는 그랬다. 아버지 대신 가문을 돌보느라 지칠 대로 지치신 어머니의 히스테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어느 날은 형과 나를 모아 놓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난 내 가문 때문에 너희 아버지와 결혼한 거란다. 하지만, 몰락해가 는 꼴을 보니 얼마 가지 못할 것 같구나.’
그때 그 말이 트라우마가 됐다거나 하는 진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난 아마…그때, 형을 쳐다봤던 것 같다. 나와 아버지를 닮았지만, 전혀 다른 형은 상처받은 얼굴로 어머니를 바라보며, 내 손을 꼭 쥐었다. 꿈속에선 모든 게 다 희미했어도 형의 온기는 늘 생생했다. 지금처럼.
‘막내 도련님. 공작님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시야가 흔들리듯 전환되었다. 나는 어느덧 그 옛날의 형보다 더 나이를 먹었고, 이 나이 때쯤의 형보다 더 성숙했다.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과보호 받았던 형은 여전히 천진한 아이 같았다. 여전히 동물을 사랑하고, 자연을 느꼈고, 사람을 챙겼다.
꿈속에서 보는 편지의 글자들은 모두 엉망이라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내용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늘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하고 있느냐?.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연습해라. 가문과 가족을 지키려면 네가 애써야 한다. 난 왜 매번 내게 가문을 지키라는 둥 하는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형이 아버지를 대신할 텐데, 이 가문에 내 것은 하나도 없을 텐데.
갑자기 들고 있던 편지지에 불이 붙더니, 곧 사방으로 번져갔다. 주변에서 온통 매캐한 탄내와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쟁터 한복판이었다. 옆엔 검이라곤 잡아본 적도 없는 형이 함께였다. 노스어에서 온,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다급히 달려 갔었다. 함께 가겠다던 형을 결국 말리지 못한 채 같이 갔었지. 인생에 후회하는 게 있냐고 묻는다면, 바로 눈 앞에 펼쳐진 지금, 이 순간이었다. 형을 어떻게든 떼어놓고 갔어야 했는데.
나와 형이 도착했어도 상황이 바뀌는 건 없었다. 기적처럼 전세가 뒤집힌다거나, 병사들의 사기가 오른다거나 하는 그런 전설 속 이야기 같은 것들. 고작 훈련용 허수아비에 목검 따위로나 연습했던 내게 전쟁터는 공포 그 자체였다. 피가 흩뿌려지는 이 살벌한 공간에서 아버지께 뺨을 한두 차례 얻어맞은 뒤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었다. 이미 내 뒤에 있는 노스어 병사를 형이 화살로 처리한 후였다. 서재에 틀어박혀서 책만 읽더니, 저런 건 언제 익혔대.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의 총애마저 빼앗아 가려는구나. 꿈 속의 난, 저 때의 나는 멍청이였다.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조차 질투했으니.
‘정신 차려!’
아버지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귓가를 울렸다. 형도 내게 달려와 떨어트린 검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한겨울에 밖으로 내동댕이 쳐진 사람처럼 계속 손을 떠는 바람에 몇 번이고 검을 놓쳤지만, 그럴 때마다 형은 다시 검을 건네 주었다. 처음 마주친 적들은 정말이지, 무서웠다. 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내게 악을 쓰며 달려오던 그 병사는 늘 내 꿈에 불현듯 튀어나와 놀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