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38)화 (38/95)

38화.

“단장님.”

해일러는 집무실 앞을 서성이다가 막 나온 루이스를 붙잡았다. 놀란 얼굴과 함께 짜증이 섞여 있었다.

“여태 안가고 뭐 했어?”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는 두통이 이는듯한 착각을 느꼈다. 원래부터 궁금한 게 많은 애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요즘 들어 좀 더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네가 내 부하라니, 하…. 궁금한 게 뭔데?”

“가올테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을 왜 찾는 겁니까?”

루이스가 자비롭게 묻자 바로 질문이 이어졌다. 넓은 아량으로 그녀를 이해해 궁금한 점을 해결해 주고자 했는데,

돌아온 질문은 다소 황당한 것이었다.

“그런 걸 알아서 뭐하게?”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묻자, 이번엔 해일러가 한숨을 쉬었다.

“전 누군가를 의미 없이 살해하는 명령은 따를 수 없…읍…!”

루이스가 황급히 그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혹시나 그 목소리가 견고한 집무실의 문을 뚫고 흘러 들어갈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장난스러운 얼굴은 싹 사라지고, 화가 잔뜩 난 눈빛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해일러가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자 결국 거칠게 팔을 잡아채 성 밖으로 빠져나왔다. 가끔 농땡이를 칠 때나 들리던 으슥한 곳에 가서야 팔을 놓아 주었다. 그녀는 억세게 쥔 팔에도 아프다 소리 없이 묵묵히 끌려왔지만, 햇빛에 잘 그을린 얼굴엔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혼자 시골구석에 처박혀서 지내더니, 어린애처럼 왜 이래?”

“제가 왜 이러는지 알고 싶으시면, 제 질문에 먼저 대답해 주십시오.”

잔뜩 날이 선 말들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둘 중 누구도 질 생각 따윈 없다는 듯, 마주하는 시선엔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데 내가 뭐라고 대답해!”

결국, 폭발해 버린 루이스가 거칠게 화를 내었다. 얼굴이 붉게 물들고 나서야 깊게 심호흡하며 화를 삭였지만, 크게 도움이 되어 보이진 않았다.

“저는…대장님께서 안 좋은 길로 가시려는 걸 막는 것뿐입니다.”

“안 좋은 길? 네가 뭔데 그런 걸 판단해?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네가 할 일이야. 쓸데없는 생각을 하니까 네가 지금 좌천되고, 헤티아가 자리를 꿰찬 거란 생각은 안 해 봤어?”

루이스가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해일러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그저 머리가 밀리는 대로 가만히 있던 그녀는 넋 빠진 사람처럼 조용히 읊조렸다.

“헤티아가…사람을 죽였다 했습니다.”

머리카락 색을 닮아 붉은빛을 띠는 해일러의 갈색 눈이 바람 앞의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본인도 그 사실을 믿지 못하면서 떠보듯 루이스를 괴롭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확신이 필요했다.

“그 정보 길드 말하는 거라면 그만 닥치는 게 좋을 거야.”

루이스가 한마디, 한마디를 잘근잘근 씹어 뱉었다. 그는 한계 이상으로 참고 있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의심부터 하는 저 성격이 지긋지긋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해일러가 확신이 없다는 건 루이스도 알고 있었다. 망설이는 말투, 자신감 없는 눈. 거대한 의심이 자리 잡아 온갖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머리통. 대장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지만, 그게 우리 기사단에서 나올 줄이야. 탄식이 이어졌다.

“그 길드, 돈 되는 일이라면서 평생 농사만 짓던 농사꾼들을 모아다 전쟁터로 내몰고 개죽음당하게 만들었어. 유족들한텐 시체라도 찾아 준다며 전 재산을 받았더군. 헤티아가 미쳤다고 아무나 잡아 죽였겠어?”

이런 구구절절한 변명을 왜 하고 있어야 하는지 싶었지만, 결국 그녀의 의심을 조금이라도 거두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풀었다. 말을 하면서도 한심한 눈빛이 해일러를 날카롭게 훑었다. 그녀는 그런 루이스의 반응에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죽어도 되는 건 아닙니다.”

불안한 눈빛은 여전했지만, 결연한 태도도 여전했다. 해일러도 그들이 인간으로서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렀구나, 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건 잘못된 행동이라 여겼을 뿐. 그녀는 대장이 사람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자신의 신념에 반대되는 사람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쩔 땐 필요 이상으로 잔인해진다는 사실도. 해일러는 그저 그 점을 고쳐 주고 싶었다.

“진짜 답답해 환장하겠네, 이런 말 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루이스가 머리를 한 번 헝클더니 진지해진 눈빛으로 해일러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노스어 탈영병들이 곳곳에서 산적단을 꾸리고 있는 거, 알고 있지? 노스어 새끼들한테 마을 순찰 정보를 다 넘겨서 쑥대밭이 된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야.”

“분명 죽이는 것 말고도 다른 방법이….”

해일러는 지하 감옥에서, 녹스가 가올테의 손가락을 잘랐던 게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질 정도로 떠올랐다. 그때도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결국 참은 말이 있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 텐데,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그를 존경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럴 때면 그가 유독 낯설게 느껴지곤 했다.

“네가 노스어 인한테 유독 관대한 것인지, 뭔지. 쯧.”

루이스가 결국 몸을 벽에 기대고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해일러의 고집을 자신은 꺾을 수 없을 것이다. 노스어인 이야기는 안 하려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나. 할 말과 못할 말의 경계가 사라지자, 그녀에게 전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아졌다.

“아리쉬 차. 너 때문에 대장님이 준비하신 거야. 너 심란할 거라고.”

“…….”

아리쉬 향이 느껴지는 착각이 들었다. 늘 자신을 위해 준비한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종종 아리쉬 차를 건네받을 때면, 그 순간들이 특별하게 느껴지곤 했어서 전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장은 자신이 힘들 때면 그런 작은 위로를 전했었다.

“네가 대장님을 처음 만난 게 언제더라, 3년? 4년 전?”

“3년 전, 겨울입니다.”

“그래. 그때 대장님이 노스어에 가셨다가 너를 데려왔지.”

“…예. 절 구해 주셨죠, 그곳에서.”

해일러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모두 희뿌옇게 떠올랐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라 머리가 거부하는 것인지, 마치 남의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처럼 그 기억들은 안개 속에 갇혀있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뚜렷이 기억하는 건 녹스와의 만남이었다.

“대장은 널 위해 조국의 병사들에게 검을 겨눴다.”

그때의 대장은 지금보다 더 앳된 얼굴이었지. 가면은 반쯤 부서져 있어서 얼굴에 상처들이 꽤 아파 보였던 것 같은데.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생생히 눈앞에 펼쳐졌다. 곧 죽을 사람은 해일러였는데, 녹스는 더 죽을상을 하고 그녀의 앞에 나타났었다. 다 해진 검은 망토가 바람에 휘날리면서 모래를 흩뿌렸었다. 흙먼지가 들어가 시큰했던 눈이 기억났다. 마치 동화되듯, 지금의 해일러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피가 말라붙은 검을 들고, 자신을 뒤에 숨겨 주던 그 등이 떠올랐다.

“이젠 네가 대장을 위해 엑젤리스를 지켜야지.”

루이스의 말에 해일러의 회상이 끝나고, 간신히 매달려 있던 눈물을 훔쳤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를 따라가겠다고 다짐했을 땐, 그 뒷모습이 정말 영웅 같았었는데.

“난, 해일러, 네 마음을 이해 못 하겠다. 대장이 날 구해 준 뒤론 지옥 불구덩이라도 기꺼이 따라가겠다고, 속으로 맹세했거든. 너도 그 정도 각오가 아니라면…….”

이젠 더 이상 더 어찌하지 않겠다는 듯 루이스는 해일러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 정보 길드는 엑젤리스의 정보도 팔아 치웠을지 몰라. 노스어 인과 싸우고 싶지 않다면… 엑젤리스를 떠나.”

엑젤리스를 떠나라는 말이 헤티아가 했던 말과 기묘하게 겹쳐서 들려왔다. 해일러는 루이스가 떠나는 발걸음을 들으며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지만, 절대 소리 내 울지 않았다. 그저 참담한 기분을 모두 흘려 보내려는 것뿐이었다.

* * *

델단은 아무도 없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방으로 돌아왔다. 이 견디기 힘든 고요함 속에서 그가 제인보다 나은 점은 방을 밝힐 수 있는 촛불과 매 끼니 분에 넘치게 대접 받는 식사뿐이었다. 모두 동생인 비예단 덕에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동생이 아니었다면 전부 제 것이 아닌 것들.

방 안에 저주가 걸린 양 또다시 자기혐오가 시작되었다. 제인과 함께 떠들었던 게 다른 사람의 기억처럼 희미해진다. 제인에게 도와주겠다고 말했던 게 우스웠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니, 정작 나도 누구의 도움 없인 살아갈 수 없는데.

“…병신.”

작게 읊조린 욕은 자신을 향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짓이겨질 것 같아서, 평소엔 입에도 담지 않는 말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넌 비예단 때문에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당했어. 이 정도 누린다고 아무도 뭐라 못해. 그렇지 않아? 델단이 머리를 울리는 말에 몽롱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은 절대 널 버리지 않아. 설령 평생 빌붙는대도 어쩌겠어?

“…빌붙는 게 아니야.”

그럼, 그렇고말고. 너 혼자 힘으로 살아갈 방법이 있긴 하지. 가올테 백작은 널 살뜰히 챙겨 줬었잖아? 다시 그렇게 살면 돼! 웃음소리가 귓가를 메아리쳤다. 델단은 참지 못하고 귀를 막으며 소리 질렀다.

“닥쳐! 닥치라고, 내 머리에서 당장 꺼져!”

주변을 둘러보면서 꺼지라고 소리치다 문득 제정신이 들었다. 내가 뭘 하는 거지?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애써 모른척 할 수밖에 없었다. 낯선 자신의 모습을 인지해 버리면 정말로 미쳐 버릴 것 같아서,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델단은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옷을 단정히 했다. 식당에 가서 제인에게 줄 음식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셰이단에게 동생의 안부도 묻고. 다시 방을 나서자 복도를 청소하던 하녀들이 흘끔거리며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안에서 홀로 악을 쓰던 게 밖에 들린 모양이었다. 델단은 머쓱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히 복도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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