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몰라도, 나한테 말하는 거라면 괜찮을 거예요. 난 이곳 사람이 아니에요, 사정을 알면 어딘가에 도움을 청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델단의 애타는 설득은 제인의 망설임을 풀어내지 못했다. 바싹 말라 갈라진 입술은 꾹 다물린 채 열리지 않았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악몽 같은 시절이었지만, 어느 날 보니 내가 그 악몽에 익숙해져 버렸더라고요. 벗어나는 걸 포기하면 안 돼요.”
가올테 백작에게서 당했던 첫 수치심, 그리고 첫 모멸감을 떠올렸다. 그것들은 얼마나 말랑한지, 금세 무뎌졌지만, 둥글게 마모되어 마음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델단을 괴롭히곤 했다.
“당신의 고통을 전부 헤아릴 순 없지만, 도와주고 싶은 내 진심만큼은 꼭 알아주세요.”
또렷한 녹색 눈이 제인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확고한 선의가 담겨 있었다.
“델…단. 이라고 했던가요?”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 글자씩 또박또박 혀를 굴리자, 입천장에 혀끝이 닿았다. 말라붙은 입안이 그 때문에 간지러웠다.
“기억해주시네요! 무례하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했는데, 영광이에요.”
흔치 않은 이름이라 입에 익지 않아 단번에 기억해 주는 사람이 드물었는데, 괜히 들뜬 그는 평소보다 더 수다스러워졌다.
“제 이름은….”
제인도 덩달아 기분이 나아졌다. 쉰 목소리가 가까스로 말을 꺼냈지만, 그녀의 이름을 알려 줄 기회는 없었다.
“알고 있어요, 제인.”
제인…. 얼굴에 침울한 빛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당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며 설레발을 치는 그는 미처 그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지 못했다.
“…맞아요.”
어깨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짓고 있던 미소도 빛이 바랬다. 분명한 억지웃음이었다.
“마음이 좀 풀어졌어요?”
델단은 제인이 그를 위해 지어준 웃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물론 그녀도 제 이름을 어떻게 부르든 간에 속상하거나 하진 않았다. 인간들이 사는 세계에선 인간이 지어준 이름을 써야지. 이미 오래전부터 자포자기한 것이라 새삼 서운할 일도 아니었다.
“절 위해 애써 주실 필요 없어요. 그저 이렇게 와서 안부를 물어봐 주시는 걸로도 충분히 고마운걸요….”
“…그래요.”
풀죽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숙인 델단의 머리 위에 제인의 손이 살포시 올라갔다. 그녀 딴에는 감사의 의미였지만, 델단은 마치 위로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제가 쉬어야 할 사람을 붙들고 너무 오래 있었네요. 식사는 제가…. 아무튼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요. 괜찮으시면 내일 다시 올게요.”
제인이 기침을 참느라 속으로 콜록거리자 델단이 재빨리 의자를 정리하고 창가 앞으로 다가가며 다음을 기약했다. 언제 이렇게 마음 편히 누군가와 대화해 봤는지, 아쉬운 기운이 역력했다. 그래도 점점 낯빛이 안 좋아져 가는 그녀를 계속 괴롭힐 순 없었다.
뒤를 돌아보면 혼자뿐인 방에 가기 싫은 기분이 들 게 뻔해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제인이 창문 바깥에서 더 이상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밖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 * *
오전 내로 보고서 작성과 잡일을 끝낸 해일러는 다시 베르티아로 돌아가기 위해 짐 꾸리기에 한참이었다. 대부분의 물건은 비상약과 담요 등이었는데, 비예단의 건강이 걱정될 만큼 엉망인 상태라 약만 넣을 가방을 따로 마련해야 할 정도였다.
짐을 다 챙기자 한 가지 고민이 되었다. 떠난다는 보고를 루이스에게만 해야 할지, 대장에게도 해야 할지. 짧은 고민이 스치고, 어쨌든 부딪혀 보자는 심정으로 4층의 집무실로 올라가 떨리는 마음으로 노크를 했다. 문이 열리기 전, 머리를 손질하면서 긴장을 가다듬었지만, 안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그녀의 노크에 대답했다.
“지금쯤 올 줄 알았어. 보고하러 온 거지?”
“아, 네.”
루이스가 해일러의 가방을 자연스레 들어주며 팔을 끌어당겼다. 씁쓸하면서도 코끝을 떠날 때 달콤함을 남기는, 아리쉬 차향이 방 안에 퍼져있었다.
“들어와. 대장님께서 시키실 일이 있대, 너한테.”
그는 해일러가 일거리를 받는 게 꽤 좋은지, 이마의 주름 자국이 꾸물거리면서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녀는 헤티아에게 전해 들은 말 때문에 찝찝한 기분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었다. 애써 잊으려 했지만 도통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이 엑젤리스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인정할 수가 없었다. 어색한 몸짓으로 얼굴을 구기는 해일러에게 두 눈이 쏠렸다. 자세를 고쳐잡고, 인사를 전했다. 대장에 대한 경외에 의심이 싹텄지만, 우렁찬 목소리는 여전했다.
“보고드립니다. 다시 베르티아로 복귀해….”
“아아, 됐어. 그런 건.”
녹스가 해일러의 말을 끊었다. 대신 빈 찻잔에 손수 차를 따라 해일러에게 건넸다. 아직 미지근한, 아리쉬 차였다. 해일러의 고향 특산물인 이 차는, 그녀가 녹스에게 소개해줬던 것이었다. 마음이 울컥했다.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잔인함에 그를 떠나고 싶다가도, 이런 따뜻한 정이 발목을 붙잡았다. 그녀는 녹스를, 엑젤리스를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비예단은 이쯤 버티면 많이 버텼지, 쓰러지면 곧장 데려오고.”
“예.”
찻잔을 두 손으로 고이 쥐고 있는 그녀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명령을 기다렸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긴장되었다.
“사람을 하나 찾아와. 가올테에게 원한이 있는.”
“…원한이요?”
“그래. 가족이 죽었다면 더 좋아.”
녹스가 딸칵 소리가 나도록 찻잔을 내려놨다. 해일러의 대답을 종용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
마지못해 대답하는 모양새가 누가 봐도 눈치챌 정도였다. 루이스는 제가 더 당황하며 해일러에게 ‘야! 너 미쳤어?’ 하는 입 모양으로 욕을 했다.
“먼저 나가봐.”
녹스는 못마땅한 대답에도 별 신경 쓰지 않은 채 먼저 나가보라 손짓했다. 거슬리긴 했지만, 해일러의 충성심은 그녀의 신념마저 꺾을 만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루이스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쟤는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전쟁 상황이 안 좋지 않나. 심경이 복잡할 수밖에.”
녹스는 무신경하게 대꾸하면서도 가만히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무례함을 용서하는 건 아니었지만, 전쟁 때문에 참혹해진 자신의 유년기를 생각하면, 심란해하는 부하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일러는 노스어 인이면서 노스어 인에게 칼을 겨눠야 하는 전쟁 상황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던 건 아니었다. 순전히 녹스, 그 때문이었다.
“그렇겠죠, 고향인데.”
“나 때문에 아르모단으로 넘어왔지. 해일러의 의견을 물은 기억은 없는 걸 보니 내 잘못이군.”
착잡한 심정이 말투에 묻어났다. 루이스는 가뜩이나 피곤한 그를 감상에 빠지게 두고 싶지 않았는지 부러 쾌활한 억양으로 물었다.
“그래서 저한테 시키실 일은 어떤 겁니까? 몸 좀 움직이는 거였으면 좋겠는데요.”
몸을 좌우로 움직이며 뻐근한 듯 괴로워하는 그를 보고 녹스가 괜히 작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 이종, 무슨 종족인지 알아내.”
“네?”
놀란 만큼 목소리가 커졌다. 자신도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죄송하다고 중얼댔다.
“알아보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문헌도 없을뿐더러 연구는 음지에서만 활발히 되고 있으니….”
불평을 하는 것인지, 걱정을 하는 것인지 모를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녹스의 앞에서 이런 투덜거림을 할 수 있는 건 루이스뿐이 없었다.
“이건 그 여자의 몸에서…. 나온 거라고 하더군.”
녹스가 흰빛이 나는 보석을 건넸다. 그도 몸에서 나왔다는 걸 말하면서도 믿지 않는지 떨떠름해 보였다.
“몸에서 이런 게 나온다고요? 그럼 완전 황금알을 낳는 거위 아닙니까?”
“저주가 담겨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그 말에 깜짝 놀라 루이스가 보석을 놓칠 뻔했다. 그는 의심의 눈초리로 보석을 노려보다 벗어둔 장갑에 조심스럽게 감싸고 나서야 주머니에 넣었다.
“시간을 들여 정확한 정보를 가져와.”
“알겠습니다.”
늘 빨리, 서둘러서, 신속히를 입에 달고 사는 대장이 어쩐 일로 그런 말을 안 붙이나, 종족 같은 걸 알아내서 뭐하나 싶었지만, 루이스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엔 꽤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녹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서 가라고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지만, 루이스는 자세를 바로 서고 경례까지 마친 후에야 집무실을 나섰다. 밖에선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