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36)화 (36/95)

36화.

“주인님. 말씀하신 하녀를 데려왔습니다.”

지옥문이 열리는 걸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자신이 왜 이 문 앞에 서 있는지 믿기지 않았다. 어제 술에 취해 무슨 다른 짓이라도 저지른 걸까? 희미한 기억 속에 도통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셰이단의 등이 방패인 듯 그 뒤를 달라붙어 따라갔다. 복도와는 공기부터 다른 느낌에 숨이 막혀왔다.

해고는 각오했지만, 이런 건 각오 안 했단 말이야….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맹수 같은 눈이 자신을 쫓고 있다는걸. 모리나는 결국 문 앞에서 몇 걸음 들어가지도 못한 채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습니다!”

모리나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지만, 녹스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계속해서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속삭이듯 들려왔다. 셰이단이 태연히 다가가 책상 위의 빈 찻잔을 채웠다. 주전자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한참이 지나도 모리나를 거들떠보지 않던 녹스가 보고 있던 서류의 마지막 장에 서명한 뒤 서랍을 열었다. 슬슬 다리가 저린 그녀는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고 있었다. 만일 보석을 숨긴 것 때문에 불려온 것이라면, 손목이 잘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보석. 전에도 본 적이 있나?”

그녀는 우려와는 다른 질문이 들려왔다. 엎드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고개를 들자 녹스의 손바닥 위에서 빛나고 있는 보석이 보였다. 무슨 생각이었는진 몰라도, 어제 급하게 입에 넣어 숨긴 그 보석과 색만 다른, 비슷한 것이었다.

“아…아뇨, 처음 봤습니다. 어제 제가 정신이 나간 것인지 이상한 짓을 저질렀긴 하지만 절대, 절대로 훔치려 했던 건….”

모리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녹스가 손가락 마디로 책상을 두드렸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도록.”

“네, 네….”

이걸 어쩌다 입에 넣게 되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마당에 어디서 난 것인지 정확히 떠올릴 수 있을 리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어도 머리에 뿌연 안개가 가득 찬 것처럼 선명하지가 않았다. 단 한 가지, 그 방엔 보석함이 없었다는 것밖에.

“제…제가….”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마음이 조급해진 모리나는 급한 대로 떠오르는 것들을 말했다. 본인이 말하면서도 허무맹랑한 소리라는 걸 잘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게 그러니까, 바닥에서, 그 여자가 흘린 거예요….”

* * *

델단은 또 정원사에게 부탁할 염치는 없어 머리를 굴리다가, 결국 길가에 핀 꽃들을 엮어 작은 반지를 만들었다. 어제 그 무례한 하녀 때문에 그녀가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해서 준비한 선물이었다. 하나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고, 다른 하나는 제인에게 가져다 주려는 요량이었다.

다 만든 반지를 들어 올려 부족한 점은 없는지 한참을 살피고 있을 때, 문득 비예단과 어린 시절 놀았던 추억이 떠올랐다. 같이 화관도 만들곤 했는데. 네가 없으니 반지밖에 못 만드는구나. 몸이 저릿해지면서 동생이 제 곁에 없다는 현실이 자각되었다. 비예단에게 편지가 왔는지,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 건지, 가올테 백작님은 어떻게 되신 것인지 궁금했다.

“아야….”

혹시나 반지가 상할까 주먹을 쉬이 쥐지 못한 것이 문제였을까, 델단은 나무를 타다가 결국 팔을 긁혔다. 소매를 들춰 보니 피가 몽글하게 진 상처가 보였다. 어릴 때 말곤 나무 타면서 다친 적은 없었는데. 상처를 한 번 훑어본 델단은 다시 소매를 내리고 나무를 올랐다. 창가로 팔을 뻗는 순간, 기뻐할 그녀가 상상되었다. 누군가에게 기쁨이 될 선물을 한다는 점이 기분을 상기시켰다.

창문을 손톱으로 두어 번 두드린 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안에선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 갔나? 그냥 창틀에 올려놓고 가려다 다시 몸을 돌렸다. 바람이 많이 불어 혹시 날아갈까 싶은 염려 때문이었다. 창문을 살짝 열어 보니 제대로 잠겨 있지 않은 듯 스르륵 문이 열렸다.

무례한 행동임을 알기에 더욱 조심해서 팔만 뻗어 두었지만, 문을 닫으려는 그때 방 안에서 희미하게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델단이 못 들을 것이라도 들은 양 거칠게 창문을 열었다. 커튼을 걷어내자 숨이 막힐 만큼 답답한 공기와 함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그녀가 보였다.

제인은 꿈을 꾸고 있었다. 먼 과거, 고향의 꿈이었다. 산들한 바람이 고요하게 불어와 친구들과 햇빛 아래에서 낮잠을 즐기던 날이었다. 제멋대로 펼쳐둔 날개에 따스한 빛이 들어오니 포근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꿈속에서의 제인은 지금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앳된 얼굴엔 젖살이 덜 빠져 볼살이 통통히 올라 있었고, 걱정 한 점 없는 맑은 얼굴은 건강해 보이는 살구색을 띄웠다. 하지만 꿈속의 행복도 얼마 가지 않았다. 숲이 흔들리는 것처럼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인, 그녀도 몇 번이나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였다.

‘사냥꾼이야! 도망가야 해!’

번쩍 눈을 뜬 친구들이 정신없이 짐들을 챙겼다. 나무에 둥지를 틀고 있던 산새들도 소리에 놀라 모두 날아올랐다. 소란스러워진 하늘에 갈 길 잃은 새들이 요란히 푸드덕대다 도로 흩어졌다. 음산한 느낌이 등을 타고 흘렀다. 태초에 영물이었던 조상의 핏줄이 경고하는 듯 불안함이 몸 전체를 휘감았다.

함께 나온 친구들이 발돋움하고 곧장 날아올랐다. 제인도 바로 검은 날개를 활짝 펼쳤다. 몇 번의 날갯짓에 훌쩍 올라온 높이에선 인간들의 무리가 보였다. 거대한 작살이 달린 석궁을 손에 든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이었다.

다행이다. 하고 안심이 들던 참이었다.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바람을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날개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챌 새도 없이 땅으로 추락했다. 마지막으로 본 건, 멀어져 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이었다.

정신을 차리자 느껴지는 건 이마에 닿는 따스한 손이었다. 신음하는 제인을 보고 방안으로 뛰어 들어간 델단이 식은땀을 흘리는 그녀의 이마를 손등으로 쓸어 주고 있었다. 아픈 사람을 이렇게 혼자 둔다고? 화가 난다기보단 어이가 없었다. 왜 이 사람을 다들 함부로 대하는 거지? 이마에 얹어둔 손을 내리자 제인이 눈을 떴다.

“괜찮아요? 어디가 안 좋은 거예요?”

다급함에 말이 무척 빠르게 튀어 나갔다. 날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네. 누운 채로 힘없이 웃는 제인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괜찮아요….”

다 쉬어가는 목소리로 애써 괜찮다고 말하는 제인은 목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화끈거림이 느껴져 곧바로 손을 떼긴 했지만, 델단은 그 손을 잡아채며 따지듯 물었다.

“이게 뭐예요?”

검붉은 자국이 가는 목을 따라 선명히 자리 잡은 것이 눈에 띄었다. 델단은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모른 채 윽박지르자 제인이 가늘게 떨었다.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늘 비예단에게 바로바로 치유를 받아온 터라 후유증을 앓는 건 오랜만이었다. 엄살을 피우고 싶을만큼 아픔이 느껴졌지만, 본인이 더 아픈 얼굴을 하는 이 사람 앞에서 괜한 걱정을 끼치기 싫었다. 운동이라곤 전혀 안 한 몸이 어제 좀 버둥거렸다고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졸렸던 목은 뻐근한 데다 돌가루라도 왕창 뿌려놓은 것처럼 칼칼해 계속 기침이 나왔다. 새삼 비예단의 치유 능력이 감탄스러웠다.

우리 종족도 이딴 쓸모없는 능력보다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인간들에게 잡혀갈 일도 없었을 텐데. 추억을 가장한 악몽을 털어내고자 고개를 몇 번 저었다. 열이 조금 있는지 시야가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일단 물이라도 한잔 마셔요.”

델단이 테이블에 올려진 물컵을 가져왔다. 환기조차 안 된 뜨거운 방에서 얼마나 오래 두었던 것인지 물이 미지근하다 못해 따뜻한 지경이었다. 제인이 차마 말은 못 한 채, 고개를 꾸벅이며 감사를 전했다.

“식사는 하신 거예요?”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와 앉은 델단이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녹색 눈이 촉촉하게 쳐져 있었다.

“입맛이 없어서요.”

제인이 고개를 돌려 문가를 바라보았다. 문 앞엔 투박한 나무 그릇에 담긴 물처럼 희끄무레한 수프가 다 식어 빠진 채로 놓여 있었다. 델단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집어 들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수프를 숟가락으로 헤집었다. 한술을 떠보자 농도 없는 액체가 투명하게 떠올랐다. 숟가락은 제대로 씻지도 않았는지, 알 수 없는 검은 떼가 끼어 있었다. 곰팡이…. 제대로 관리 안 된 나무 식기에서 피는 곰팡이였다.

애써 유지하고 있는 미소 진 입가가 경련이라도 일어나듯 움찔거렸다. 제인의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이 더 처참해 보였다. 그가 손에 든 그릇을 노려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밝은 금발이 고갯짓과 함께 흔들렸다.

“아까보니 열이 조금 있던데, 그리 심한 건 아닌 것 같으니 조금 쉬면 나아질 거예요.”

“전 괜찮아요.”

누군가 관심을 가져 주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따뜻할까. 잘하면 정말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은 사는 낙이 없는 제인에게 현실을 기대하게 해주었다. 비록 그녀가 걸어온 삶은 늘 기대를 배신했었지만, 어쩌면 이번만큼은 다를지도 몰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