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저를 벽에 밀치시고, 손톱으로 긁으면서 공격하셨어요. 제가 최대한 막아 보려곤 했는데…, 아야….”
일부러 상처를 보여 주기 위해 엄살을 피우며 피가 맺힌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그녀는 자신이 맡은 피해자라는 배역에 완전히 몰입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조금 과격하게 제압했지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왜 아무런 말도 없지? 마지막까지 혼신을 다한 연기를 끝내고 훌쩍였는데도, 머리맡에 드리운 그림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의문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쳐들자 보랏빛 눈동자가 흉흉히 빛나고 있었다. 인상을 쓴 채였다.
“들어와.”
반쯤 열려있던 문틈으로 새어나간 마네의 굳은 목소리에 문 앞에서 긴장하고 있던 병사들이 다급히 들어왔다. 모리나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입 벌려봐.”
병사가 모리나의 양 볼을 잡았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몸을 틀며 반항하자, 볼을 잡은 손에 힘이 더욱 거세졌다. 마네는 계속해서 몸을 비트는 하녀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억지로 벌려진 입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손가락에 닿았다. 불쾌한 기분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미간에 잡힌 골이 더욱 깊어졌다. 이윽고 혀 밑바닥에서 딱딱하고 둥근 무언가를 찾아냈다. 모리나는 혓바닥에 힘을 주어 보석을 지키려 했지만, 고작 혀일 뿐이었다.
모리나의 입에서 꺼낸 마네의 손엔 침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녀의 허리춤에 달려있던 앞치마를 잡아 뜯어 손을 닦은 그는 병사들이 바닥에 팽개쳐 놓은 하녀의 머리 위로 앞치마를 집어 던지곤, 입안에서 꺼낸 구슬을, 보석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 * *
제인은 피해자인데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린 후에 심문 비슷한 걸 받게 되었다. 계속해서 누가, 왜, 어째서 하고 들어오는 질문들에 심리적 압박감을 느꼈다. 그 질문을 하는 건 다름 아닌 마네였다.
“그러니까 밤 늦게 가 되어서야 환복을 도와주러 왔다, 이 말이지?”
“네….”
기절한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던 그녀는 마네가 왜 제게 이런 것들을 묻는지 알 수 없었다. 목 안쪽이 숨을 쉴 때마다 따끔거리고,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정신이었지만, 그녀는 최대한 마네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하려 노력했다.
“죽일 기세로 달려든 건 아니었다고?”
“…….”
모리나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죽이려고 했으면 벌써 죽였겠지.’, 제인은 대답보단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다고 표현했다.
“저, 그 아이는 순전히 복수심 때문에 그런 거예요, 혹시 벌을 줄 생각이시라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자 검붉게 물든 목을 손으로 몇 번 주무른 제인은 마네의 심각해 보이는 표정에 모리나를 변호하고 나섰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종에게 살해 당했다, 시체도 못 찾을 만큼 심하게 당했다더라. 모리나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구구절절 내뱉고 있었다.
“그 말을 믿어?”
마네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 표정엔 얼핏 황당함까지 보였다.
“…네.”
자신을 그렇게까지 죽일 듯 노려본 눈이 절대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모의 목숨까지 들먹이며 장난칠 사람은 더더욱 없다고 생각한 제인이 모리나의 말을 모두 믿는다고 대답했다.
“그래, 내가 너무 붙잡고 있었네. 몸도 안 좋을 텐데.”
의자에서 일어나는 그의 표정은 미묘하게 비틀려져 있었다. 아까의 황당함은 여태 지워지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는 모리나가 보육원에서 자란 고아라고 사실을 전해줄까 했지만 결국 말하지 않았다. 아직 못 물어본 게 많았지만, 특히나 그 구슬에 관해 묻고 싶은 게 있었지만, 저 멍청하게 순진한 여자를 어쩐지 괴롭히고 있는 느낌이 들어 그만두고 싶었다.
알아낼 다른 방법은 많으니까. 아쉬움을 뒤로하고 방을 나서는 마네는 제인에게 마지못해 한 번 웃어주었다. 예의상 미소라는 게 너무 뻔했다.
모리나는 어젯밤 별다른 조치 없이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조금도 잠들지 못했다.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이 어디 아픈 게 아니냐며 건강을 걱정해 줄 땐 핏기없는 얼굴로 손톱을 씹으면서 애써 괜찮다고 중얼거렸다.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것 같았다.
오전에 일하면서도 일부러 멀리 돌아가거나 하면서 하녀장을 피해 다녔는데, 다행이도 누군가 자신을 찾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평소처럼 빨래하고, 안 쓰는 헛간 따위를 청소하는 동안은 평소와 같았다.
그 남자는 내가 도둑질을 했다고 오해하는 게 분명했었는데, 왜 하녀장 님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시지?
모리나는 온종일 그 생각뿐이었다. 오전 내내 뒷문을 계속 주시하며 둘러봤지만, 시체를 내다 버리러 가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오후쯤엔 그 이종 여자가 죽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죽었다면 어젯밤에 죽었을 테고, 시체는 오전 중에 소각장에 버리러 나갔을 테니까.
안 쓰는 헛간 청소를 마치며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불안감은 조금 가라앉았다. 모리나가 편안해진 마음으로 빗자루를 털며 성안으로 들어가자 셰이단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화한 얼굴로 그저 서 있었을 뿐이었지만, 직감이 경고했다. 빗자루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마리나…라고 했던가요?”
셰이단이 쓰고 있던 안경을 한 번 추켜올리며 물었다. 그래, 내 이름 따위 기억할 리가 없지.
“모리나입니다.”
대답에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깟 이종 따위 좀 골려준 거 가지고, 집사가 찾아오기까지 하다니. 그 여자는 대체 뭐길래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이 많은 걸까. 정작 이곳에서 오래 일한 내 이름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데.
“그래요, 모리나. 용건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주인님께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주인님…이요?”
놀란 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졌다. 엑젤리스의 주인이라면 멀리서 지나가는 걸 몇 번 본 게 전부였다. 키도 무척 크고, 어쩐지 무서운 느낌에 멀리서만 봤는데도 도망치듯 다른 곳으로 뛰어갔던 기억이 났다. 늘 검은색 늑대 가면을 쓰고 다니는 터라 그분의 얼굴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 돌곤 했었는데…. 싸구려 화장품으로 색칠을 해놓아서 금방 번져 버리곤 했던 그 그림들이 얼핏 떠올랐다.
그림들 속 그 얼굴은 다 다르게 생겼었지만, 값어치가 없는 보석을 잘게 갈아 만든 반짝이로 칠한 은색 머리카락과 유행 지난 보라색 섀도우로 범벅 된 눈만은 어떤 그림이든 같았다.
은색과 보라색…. 잠깐….
“잠, 잠시만요…!”
대뜸 소리를 지르는 모리나를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보던 셰이단은 그녀가 우물쭈물하며 서 있는 동안에도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저, 그게… 옷이 너무 더러운 것 같아서요! 괜찮다면 최대한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셰이단이 모리나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앞치마며 얼굴에 먼지가 안 묻은 곳이 없었다.
“그러는 게 좋겠네요.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최대한 서둘러 주세요.”
모리나는 인사를 할 새도 없이 미친 듯이 달려 고용인들의 숙소에 도착했다. 쉬는 시간 동안 숙소에서 쉬고 있던 동료들이 무슨 일이냐며 달라붙었지만, 그들을 밀치며 안쪽에 있는 방까지 도착했다. 턱까지 찬 숨을 몰아쉬었다. 갈비뼈 사이가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여기 어디 있었는데….”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낸 모리나는 앞치마를 풀러 얼굴에 묻은 것들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다른 손으론 서랍장 곳곳을 열어젖히며 그림을 찾았다. 옷장 깊숙하게 손을 뻗어 넣자 작게 접힌 종잇조각이 잡혔다. 급하게 꺼내느라 끝이 찢어졌지만, 확인하는 데에 문제는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펼쳤다.
“맙소사…!”
모리나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어제 봤던 그 남자의 얼굴이 엉성한 그림과 겹쳐 보였다. 그 남자도 분명 은색 머리카락에 제비꽃을 닮은 눈이었다.
* * *
셰이단을 따라가는 모리나의 발걸음이 4층에 다다를수록 점점 느려졌다. 녹스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을 땐, 둘의 거리는 훨씬 더 멀어져 있었는데, 셰이단은 겁먹은 그녀를 이해하는 것인지 따로 보채지 않고, 그저 문 앞에서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저, 대체 무슨 일 때문인지라도 알 수 있을까요?”
모리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셰이단에게 매달렸지만, 본인의 잘못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만찬 이후 하녀와 하인들이 몰래 모여 남은 술을 먹은 것, 이종 여자를 괴롭힌 것, 바닥에 떨어져 있던 보석을 숨긴 것. 어차피 보석은 이종 여자의 것이었으니, 굳이 따지자면 모두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었다.
“글쎄요….”
셰이단이 늘 얼굴에 걸고 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고는 문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 모리나가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는지 손등으로 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