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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죽이기 (34)화 (34/95)

34화.

“이 미친 것이…!”

모리나가 뒤통수를 몇 번 어루만지다 눈을 부릅뜨며 대뜸 욕을 했다. 그녀의 손등엔 제인의 관리 안 된 손톱이 새긴 상처가 남아 있었다.

“제, 제가 잘못했어요…! 다신, 다신 안 그럴게요! 한, 한 번만 용서…용서해 주세요….”

성큼성큼 다가오는 걸음이 가로막은 팔 사이로 보이자 다급히 외쳤다. 저주가 풀린 이후로 가장 크고, 가장 빠른 속도로 한 말이었다.

“정말…미개한 족속들인 건 숨길 수가 없는 모양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감히!”

모리나는 처음부터 제인을 죽일 생각으로 목을 조른 건 아니었다. 부모를 죽인 이종 용병들에 대한 복수를 한다던가, 하는 그런 유치한 생각도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부모 따윈 없었다. 모두 거짓말이었다. 어디선가 들은 소문들을 조합해서 장난친 것뿐이었다.

조금 겁만 주려던 게 전부인데, 얘가 고자질이라도 하는 거 아니야? 난 그냥 장난치려던 건데!

개미집에 물을 붓는 것처럼, 잠자리 날개를 뜯어 달리기 경주를 시키는 것처럼 재미로 했던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 살려 달라고 빌면 바로 풀어 줄 생각이었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반항이 심해 힘 조절을 못하고 말았다.

“내가 널 죽이려 했으면 벌써 죽였지.”

하녀가 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까 전 큰 소리가 나는 바람에 혹여 문 앞을 지키는 병사들이 확인차 열어 볼까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바깥은 고요했고, 제인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장난 좀 친 걸로 그렇게 예민하게 굴 것 없잖아?”

제인의 앞에 주저앉아 조곤조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이야기를 하는 모리나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녀는 제인을 끌어안아 등 뒤로 손을 넣었다. 드레스 뒤를 장식하던 리본이 풀려나왔다.

“짜잔!”

마술사처럼 경쾌한 목소리를 내며 풀어낸 리본을 눈앞에 보였다. 제인의 옷이 어깨선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 리본을 왜 보여 주는 건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흘러내리는 옷을 잡고 추슬렀다.

“내가 예쁘게 꾸며줄게. 말 안들은 벌이야.”

모리나는 어쩌면, 이 성에서 가장 낮은 신분으로 지내면서 어떤 갈증을 느껴왔던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즐거워 보였다. 아이들이 무리 지어 누군가를 괴롭히는 데에 딱히 마땅한 이유가 없는 것처럼, 누군가를 굴복시키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인간들의 ‘평범한’ 정복욕처럼.

“용서해 주세요…제발….”

제인의 새카만 눈 속에 하녀의 웃는 낯이 비췄다. 옅은 와인빛의 리본 끈이 부드럽게 목을 감쌌다. 간지러운 느낌도 잠시, 모리나가 제인의 몸에 올라타 리본을 양옆으로 잡아당겼다. 어찌해볼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는 덫에 걸린 토끼처럼 버둥댔다.

고작 15살뿐이 안 됐지만, 모리나는 자신이 꽤 유능하고 영악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래서인지 같은 또래의 아이들은 늘 뭔가 부족해 보이거나 유치하게만 느껴졌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지금보다도 더 어린 시절부터 자기보다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걸 즐겼고, 또래의 아이들 위에서 군림하는 걸 좋아했다.

비록 수도에서 일하던 때에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쫓겨났었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쫓겨나 엑젤리스에 정착한 게 모리나에겐 잘된 일이었다. 수도에서 일했었다고 하면 다른 하녀들이 우르르 몰려와 치켜세워 주고, 자랑을 듣고 싶어 하니까. 그렇게 쌓은 것들로 이곳에서도 군림할 생각이었다. 고용인들 사이에서의 정치는 모리나의 전문 분야였다.

하지만 일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모리나가 전 가문에서 추천서도 없이 쫓겨난 이유를 알고 있었던 하녀장이 그녀를 매번 야단쳤고, 고용인들은 그걸 보면서 키득거렸기 때문이다. 이미 우스운 사람으로 낙인찍혀 버린 그녀는 제인을 호되게 괴롭힌 걸 기회 삼아 다시 한번 아이들의 우두머리 자리를 노렸다.

나는 이렇게까지도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나는 강해! 너희처럼 말만 지껄이는 애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래도 아예 제인을 죽여 버릴 마음은 없었는데, 이게 모두 술 때문이었다. 술기운이 올라 순간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저질러 버리고 말았다.

“커헉…컥….”

듣는 사람조차 괴로운 신음이 바닥을 발버둥 치는 소리와 함께 방안을 고요히 채웠다. 그 소음을 제외하곤, 적막이었다. 여태껏 참아 왔던 눈물이 맺혔다. 얼굴빛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괴로움에 눈을 찌푸리자 눈가를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은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 바닥에 떨어질 때쯤, 영롱한 보석으로 변해 맑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혔다.

“응…?”

하녀가 이질감이 드는 소리에 반응을 보였다. 손에 쥔 힘이 서서히 약해지면서, 눈으로 그 소리의 근원을 쫓았다.

“…이게 뭐야?”

제인이 발버둥을 멈추고 몸을 축 늘어트렸지만, 하녀는 네발로 기어 멀리 굴러가는 보석을 따라갔다. 미묘하게 푸른 빛이 돌며 생기를 내뿜는 그 보석은 마치 달을 형상화한 것처럼 반짝였다. 소중한 것을 감싸듯 두 손을 모아 보석을 올려 두었다. 어린 나이부터 귀족가에서 일하며 여러 보석을 봐왔지만, 이토록 선명한 영롱함은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신의 선물처럼 스스로 고귀한 빛을 내는 이 보석에서 그녀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제인, 들어가도 될까?”

밖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엉망이 된 이 방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음성이 하녀를 현실로 끄집어냈다. 술에 절어 있던 뇌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알딸딸한 정신을 벗어나 맑아졌지만, 이 순간을 빠져나갈 구멍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대답이 없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걱정이 깃들었다.

“제인?”

제인을 부르는 목소리가 마치 독촉처럼 느껴졌다. 문과 보석을 번갈아 바라보던 모리나의 등줄기로 차갑게 식은 땀방울이 흘렀다.

‘죽었나?’

시체처럼 누워 있는 제인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저 여자를 시간 내에 침대 밑에 숨기지는 못할 것이다. 리본 끈을 숨긴다 해도 목에 자국이 남아 있어 들킬 테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바보같이 무슨 일을 벌인 거야!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쓰러져 있는 제인에 대한 걱정보단 크게 혼날 자신이 더 걱정이었다. 모리나는 변명거리를 생각하는 대신 손에 쥐고 있던 보석을 입안에 숨겼다. 혹시나 해고당하게 되면 이거라도 팔아먹어야지. 차가워진 머리가 현실적으로 곧 닥칠 미래를 챙겼다. 하지만 그건 여태 남아 있는 술기운에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한 것임이 분명했다.

새끼손톱의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크기였지만, 혀 아래로 넣자 이물감이 느껴졌다. 혓바닥을 굴리며 입안에 자리를 잡아 둔 뒤, 손에 들고 있던 리본을 아무렇게나 던져놨다. 모리나는 늦은 손님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

“…….”

문이 열리는 소리에 다급함이 담겨 있었다. 시야에 익숙한 검은 머리카락이 들어오지 않자 방안을 눈으로 좇았다. 침대 끝으로 구두를 신은 발이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게 보였다. 제인의 이름을 부를 새도 없이 뛰어 들어가 쓰려져 있는 그녀를 부축했지만, 축 늘어진 손이 다시 바닥을 뒹굴 뿐이었다.

아주 천천히,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쳐 들곤 고개를 돌렸다. 옷장 옆엔 하녀가 반쯤 숨은 채로 울고 있었다.

“설명해.”

소름 끼치도록 무감각해 차갑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가 공포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 그게….”

이 남자는 누구지? 고작 잡일이나 도맡아 하던 그녀가 그를 알아볼 리 없었다. 하지만 낮에 봤던 그 금발의 남자와는 확실히 달랐다. 압도하는 분위기와 서리가 낀 듯 차가운 시선이 몸을 굳게 했다.

“오래 기다릴 생각 없어.”

마네가 제인의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침대에 기댈 수 있도록 했다. 행동은 무척 조심스러웠지만, 낮게 가라앉은 그의 표정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녀의 목과 머리 사이에 베개를 받쳐 준 그가 굽히고 있던 한쪽 무릎을 가볍게 털며 일어났다.

하녀가 주춤거리면서 옷장과 벽이 맞닿는 모서리에 몸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런다고 눈앞에 닥친 것이 피해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본능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서서히 다가오는 그림자가 하녀를 모조리 집어삼켰다. 어떻게든 해야 해. 어금니를 깨문 턱에 힘이 들어갔다.

“저도, 저도 정말 실수였어요, 일이 이렇게 될줄은….”

모리나가 진부한 변명을 지껄이며 조심스레 상황을 살폈다. 당황한 터라 제대로 살피지 못했지만, 저 이종 계집도 잠시 기절했을 뿐이고, 앞에 있는 이 남자도 신분만 좀 높은 곱게 자란 도련님처럼 보였다. 왜 이 밤 중에 여길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한밤에 이종 여자를 찾았다는 추문이 돌면 저쪽도 불편해질 것이다.

도련님이 기사도 정신이 갑자기 발휘됐나 본데, 조용히 끝내고 싶을 거야, 그렇지? 파악을 마친 모리나는 한결 여유를 찾았다.

“전 그저 이 아가씨의 환복을 도와드리라는 지시를 받고 온 것뿐입니다.”

어느새 눈에 눈물이 가득 들어찼다. 입술도 파들파들 떨려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정말 억울해 보일 지경이었다.

“제가 아가씨께 충분히 설명해 드리고, 손을 대는 순간….”

입에 머금은 보석 때문에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물론 그 덕에 좀 더 훌륭한 연극이 됐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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