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33)화 (33/95)

33화.

“그런 게 아니라….”

해일러는 이런 분위기가 싫었다. 옳다고 생각한 일이 모두를 불편하게 만드는 상황. 어쩌면 정말 자신이 이상한 걸 수도 있는 이 맥락.

“…어차피 그 사제가 날개를 재생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변명거리를 늘어놓게 되는 이 결말. 이럴 때마다 늘 자신은 엑젤리스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스어 병사들은 날이 갈수록 아르모단의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물론 첨탑을 더 건설하여 경계를 강화할 수는 있지만, 유동적으로 하늘을 살필 수 있는 파수꾼이 있다면 더 안심될 겁니다.”

사람을 닮은, 무력한 무언가를 죽인다는 게 석연치 않아 반드시 말리고 싶었어도, 이런식으로 돌려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녹스는 해일러가 길게 말을 하는 와중에도 와인잔을 흔들며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

헤티아는 일부러 편을 들 듯 녹스의 가까이에서 늘어지는 하품을 했다. 마치 고양이가 사자의 옆에서 기세등등한 꼴이라 얄밉기 그지없었다. 울화가 치밀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태연히 말을 끝마쳤다.

“대장님께서도 원래 그럴 생각이셔서 처음에 파수대로 보내신 것 아닙니까?”

* * *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싸해지는 걸 못 견디고, 결국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함이 쌓였다는 핑계로 만찬이 파하기도 전에 자리를 뜬 해일러를 누군가 붙잡았다. 숨결에서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겨와 반사적으로 코를 막자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원래 술을 안 먹던가?”

보라색 머리카락이 어두운 시야에 잡혔다. 헤티아는 방으로 돌아가려는 해일러를 굳이 따라와 앞을 막아섰다.

“비켜 주시죠. 내일 일찍 나가야 해서.”

냉정한 목소리는 나름의 정중함이 느껴졌다. 불쾌했지만,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불편하게 구는 건 그녀의 성격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급히 걸음을 옮기던 해일러를 붙들고 헤티아가 던진 말은, 해일러의 선한 심성에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아득히 선을 넘는 것이었다.

“기사단을 나가지 그래?”

“…뭐라 하셨습니까?”

텅 빈 복도에서 둘의 신경전이 일어났다. 멀리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다른 세상의 일인 양 둘 사이에 치밀한 고요가 대립하였다.

“있지, 얼마 전에 내가 사람을 죽였어.”

침묵을 깬 건 헤티아의 도발이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펼쳤다가 하나씩 접어 보이며 숫자를 셌다.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넷, 다섯…. 손가락이 모자라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해일러의 감정적 동요를 막아주는 유일한 방패였던 냉정이 자극적인 도발에 무너지고 말았다. 격정적인 그녀의 목소리가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한 느낌을 담아 따져 물었다.

“내가 정보를 사 왔거든. 근데 우리 일, 밖으로 새어 나가면 대장이 곤란해지잖아?”

헤티아가 주먹을 쥔 손을 다시 펼쳐 손바닥 위에 입바람을 불었다.

“그래서 내가 다 태워 죽여 버렸지. 바싹 구워서.”

말을 마치고 웃겨 죽겠다는 듯 웃어대는 통에 해일러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천사와 악마처럼, 열기와 냉기처럼 그들은 섞이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일방적인 대화가 흘러갔다.

“대장님께서 허락하셨습니까?”

“응? 당연하지. 나는 말 잘 듣는…뭐랄까, 여우니까. 알지?”

해일러의 얼굴이 험상궂게 구겨졌다. 자신이 아는 대장은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없었는데. 이제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를 제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있는 걸까 봐.

“그건 엑젤리스의 방법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엑젤리스에 어울리지 않는 건 너 아냐? 해일러. 당신은 ‘우리’ 중에서도 좀, 물렁하잖아?”

해일러는 헤티아가 제 어깨를 두드릴 때도,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윙크를 날릴 때도,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부자연스럽게 다시 어두운 복도 안쪽으로 계속해서 걸어 들어갔다.

* * *

제인은 한참이나 어두운 방 안에서 혼자 서있었다. 환복을 도와줄 사람이 곧 갈 거라고 전해 들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몇 시간이고 옷이 구겨질까 앉지도 못한 탓에 종아리가 저렸다. 처음 신는 구두 때문에 뒤꿈치는 모두 까지고, 꼼짝도 못 하는 발가락은 감각이 없을 지경이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오래 기다렸지만, 결국 그녀는 등에 있는 리본을 풀기 위해 어두운 방 안에서 손을 버둥댔다. 태어나서 처음 입어 보는 드레스는 혼자 입기에도, 벗기에도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인간들은 왜 이런 옷을 입고 다니는 거지?’

애초에 귀족들이 입는 의복은 당연히 누군가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가정하에 디자인되기 때문에 혼자의 힘으로 리본을 풀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혹시나 옷이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결국 손을 거뒀다. 신발이라도 벗고자 허리를 숙이는데, 때마침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누구…?”

죄라도 지은 양 깜짝 놀라 숙이고 있던 상체를 세우자 낮에 보았던 하녀가 심통이 잔뜩 난 얼굴로 서 있었다.

“아, 진짜 짜증 나.”

모리나가 들어오자 방 안에 술 냄새가 풍겼다. 만찬 이후 남은 술과 음식으로 몰래 파티를 즐기던 중 제인의 시중을 들기 위해 빠져나온 터라 짜증이 난 상태였다.

“차라리 개밥을 챙겨 주라 하지, 내가 너 같은 거 시중이나 들려고 이 성에 들어온 줄 알아?”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불평을 듣고 있던 제인은 하녀가 자신의 바로 뒤에 다가올 때까지 숨도 쉬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등에 낯선 손길이 닿았다. 해치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거칠었다. 모리나는 제인이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경직된 등에서 떨림이 전해져 왔다.

‘그냥 말로만 뭐라 한 게 전부야?’

‘난 또 뭐라고, 모리나가 그럼 그렇지.’

조금 전, 술을 마시면서 자랑거리인 양 제인에게 폭언했던 걸 떠들자 동료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었다. 시시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지루해하기도 했다.

‘그럼 내가 손찌검이라도 해야 한단 거야?’

‘뭐 어때? 어디 이를 곳도 없을 텐데.’

‘모리나는 마음이 약해서 탈이라니까?’

술을 먹은 탓에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그들의 야유가 들려오는 듯했다. 뭘 어떻게 해야 그들이 멋있다고 추켜세워 줄까? 이 여자한테 무슨 짓을 하면 좋을까? 제인의 떨림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 미약한 진동을 느끼고 있자니 모리나는 마침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귀찮게 하지 말고 똑바로 서.”

애매하게 서 있던 몸을 똑바로 펴자 상체를 조이고 있던 리본이 풀어지면서 서서히 숨통이 트였다. 시원한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지만, 가시가 돋친 말들이 속속히 박혀와 계속해서 마음을 졸였다.

“하여간 너네 같은 애들은 하등 쓸모도 없으면서 인간 도움 없이는 살아가지도 못하지.”

너네 같은 애들? 귀가 솔깃해졌다. 혹시 이곳에 자신 말고도 다른 이종들이 있다면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는 덜덜 떨렸지만, 용기 내 질문을 꺼냈다.

“여기…저 말고도 다, 다른 종족도 있는 건가요…?”

하녀가 리본을 헤집다시피 풀어놓다가 질문에 손을 떼었다. 그러곤 앞으로 고개를 빼내어 제인과 눈을 맞추었다.

“왜? 있으면 어쩌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괜히 물어본 게 아닐까 싶은 불안함에 옷을 구기면 안 된다는 말도 잊고 옷자락을 쥐어 잡았다. 하지만 걸었던 기대가 무색하게도 돌아오는 건 비웃음뿐이었다.

“너 웃긴다. 고기로 쓰지도 못하는 짐승을 왜 하나도 모자라서 둘씩이나 데려다가 입히고 먹이기까지 하니? 우리가 자선사업가, 동물 보호 단체 뭐 그런 거라도 되는 줄 알아?”

먹지도 못하는 고기. 여러 혐오의 말들을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무뎌지는 건 아니었다. 왜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억울했다. 하지만 반항도, 해명도 할 수 없었다. 입 밖으로 나온 건 용서를 구하는 말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있지, 우리 부모님은 너희 같은 들개한테 사냥 당했다?”

하녀가 묻지도 않은 내용을 술술 내뱉었다. 알맹이는 잔인했지만, 목소리는 평온했다.

“산적들이 고용한 이종 용병들에게 사지가 찢겨 죽었어. 팔다리가 사방 천지에 널려 있어서 난 돌아가신 부모님 시체 앞에서 구역질했지.”

하녀의 손이 제인의 어깨선을 따라 올라갔다.

“너흰 시키는 일이면 뭐든 하지? 양심의 가책, 지켜야 할 도리. 그딴 거 없잖아.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을 그렇게 토막 내 죽일 수가 있어? 어디 네가 한번 말해 봐.”

손이 점점 위로 올라가 가느다란 제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흐윽…!”

자신의 목을 쥐어 잡은 손을 떼어놓고자 모리나의 손등을 긁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손아귀의 힘이 더욱 거세져 갔지만, 손 놓고 가만히 목 졸라 죽을 수는 없었다.

“네 목숨만 목숨이지? 살 수만 있다면, 숨만 붙어 있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지?”

평온했던 아이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점차 격양되어 갔다. 술기운 탓인지 점점 흥분되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막힌 둑이 뚫린 것처럼 쏟아지는 가짜 분노는 대화의 흐름에 따라 손가락 마디에 힘을 실었다.

“아악!”

제인이 저보다 작은 하녀를 떼어놓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벽에 부딪혔다. 쿵 소리가 나면서 함께 쓰러진 그들은 각자의 목과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아…아흑… 잘, 잘못했어요….”

제인이 연신 기침을 뱉다가 간신히 말을 꺼냈다. 침대에 등을 기대 몸을 일으킨 그녀는 자신보다 한참 작은 애를 어찌할 생각은 전혀 없는 것인지, 머리를 두 팔로 감싸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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