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32)화 (32/95)

31화.

똑똑.

짧고 간결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제인이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문을 쳐다봤다. 델단은 도둑질하러 들어온 사람처럼 더 놀란 나머지 창틀에 재빠르게 다리를 올리고, 몸을 내던져 건너편 나무에 안착했다. 순식간에 몇 동작들이 마치 물 흐르듯 연결되어 제인조차 그가 그새 방을 빠져 나갔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곧이어 방문이 열리자 제인은 서둘러 몸으로 창틀을 가렸다. 인간들이나 누릴 수 있는 음식을 먹었다는 걸 들키면 안 될 것 같은 죄악감 때문이었다.

“제인, 이제 갈 시간입니다. 빠짐없이 기억해 두셔야 해요.”

“네….”

제인은 최대한 뒤꿈치에 신발이 닿지 않도록 하느라 엉성한 걸음걸이로 셰이단의 뒤를 따랐다. 창틀에 놓인 손수건의 끄트머리가 바람에 살랑였다. 델단의 금발이 더 이상 창가에서 보이지 않게 될 때쯤, 손수건이 바람에 날아가기 직전, 검은 손이 나타나 제인의 죄악감을 가지고 떠났다.

* * *

깊게 내려갈수록 습한 느낌이 피부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긴 팔임에도 서늘함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들리는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퍼졌고, 어두운 철창 안쪽에선 희미하게 앓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이런 참담한 광경은 익숙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곳이 제 거처였던 제인은 의외로 태연해 보였다. 철창 앞에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은 걸 제외하면, 그녀가 머물렀던 곳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지독하게 매캐한 분변 냄새까지도.

멀리서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과 검은 케이프를 두른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루이스와 녹스였다. 셰이단은 제인을 그들에게 인도한 후, 멀리 떨어져 마치 조각상처럼 흔들림 없는 자세로 서 있었다. 제인은 셰이단을 한 번 돌아봤다가, 녹스에게 다가갔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철창 안엔 초췌하고 지쳐 보이는 모습의 갈색 머리 남자가 머리만 벽에 기댄 채 누워 있었다. 체형보다 훨씬 큰 옷을 입고 있는 그 남자는 관리 안 된 수염이 윗입술까지 자라 입으로 수염을 후, 하고 불어댔다.

“가올테 백작. 그대를 위해 손님을 초대했으니 인사 나누게.”

녹스가 음의 높낮이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가올테는 눈알만 굴려 위를 바라보았고, 짙은 눈그늘에 반쯤 감겨있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너… 너…!”

제인은 그가 2년 전, 자신을 구매했던 인간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 당시 가올테는 얼굴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가면을 썼었던 데다가 체중이 그때보다 반 이상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의심조차 들지 않았다. 제인은 속도 없이, 그가 누구인 줄도 모르고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이런데에 갇혔을까. 자신을 2년 동안 가둬 두고, 학대했던 사람이란 걸 안다면 절대 이런 측은함은 들지 않았을 테지만.

“저는 지소나 출신으로….”

제인은 준비했던 대사를 읊었다. 거친 도로 위의 마차에 탄 사람처럼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염소가 사람 말을 한다고 하면 믿어질 만큼, 그녀는 과하게 긴장한 상태였다. 그래서 더욱 그 거짓말들이 진짜처럼 느껴졌다. 두려운 존재 앞에서의 떨림. 비록 그 두려운 대상이 앞의 추레한 남자가 아니라,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검은 늑대였지만.

“너, 이 망할, 찢어 죽일 짐승 새끼가…!”

제인으로 큰돈을 벌었었기 때문에, 그녀가 쏟아 내는 영롱한 보석들을 두 눈으로 확인했기에 가올테는 그 말이 모두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쇠약해진 몸이 분노를 막아섰다. 마치 피라도 토할 것처럼 연신 기침을 하던 그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다가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으흑, 으흐흐흑, 으하하하하…! 이보게! 녹스 공작, 아니… 산적 우두머리 놈한테 공작이라니, 내가 말실수를 했네, 했어. 이 치졸한 겁쟁이 새끼야! 나를 죽일 배짱은 없으니, 이깟 하찮은 쓰레기… 아니, 비싼 쓰레기지…! 내가 널 얼마를 주고 샀는데! 아니, 우리 가문의 복덩이지! 그렇지!”

가올테는 귀를 후벼 파면서 끊임없이 떠들었다. 말의 요점도, 문맥도 이상했다. 횡설수설하며 말을 마친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다시 소리치기 시작했다.

“내가 일곱 살 어린애도 아니고…. 내가 본 게 있는데 이딴 유치한 연극에 속아 넘어갈 줄 알아? 아주, 제대로 연극 배우를 만드셨어! 이 년은 그런 용도가 아니라고…흐흐….”

가올테는 갑자기 바닥에 있는 흙과 먼지들을 쓸어 담았다. 이미 새까만 그의 손은 더 더러워질 것도 없었다. 거친 돌바닥에 손날이 쓸려 상처가 났지만,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지푸라기며 젖은 흙들이 어느새 그의 앞에 모였다.

“이것 좀 봐, 이걸 보라고! 이게 다 내꺼야, 이 보석들이 전부 내꺼라고!”

루이스는 미쳤네.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녹스도 더 기대할 것도 없다는 듯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셰이단의 계획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미간을 누르며 두통을 호소하는 그는 일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되짚었다.

그의 계획은 도박이었지만, 가올테가 조금이라도 이성적인 사고를 했다면 그렇게까지 무리한 것도 아니었다. 여기서 속아 넘어간 척 손이 발이 되게 빌었더라면, 셰이단이 어떻게든 우겨 수도로 보내주었을 것이다. 수도의 재판 과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한다면, 비록 엑젤리스에 귀족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공문이 내려온다 하더라도 귀족을 죽이는 것보단 처리가 쉬웠다. 하지만 가올테는 셰이단의 예상보다 더 심하게 정신이 나가버린 듯 했다.

적어도 그가 자신은 귀족이니 아무도 죽일 수 없다는 멍청한 생각만 안 했어도, 녹스가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 호언장담을 한 상태에서 미치지 않았더라도…. 가올테는 머지않아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뒷일은 모두 셰이단이 떠맡게 될 것이고.

어쩌다 집무실까지 따라오게 된 제인은 자신이 이런 곳을 와도 되는지 싶어 불안해했다. 살짝만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구들이 즐비한 이런 중요한 공간에, 왜 자신을 데리고 왔는지 이들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눈치만 보면서 혹여라도 입고 있는 옷에 흙먼지가 묻어 혼날까 몸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셰이단이 정말 죄송한 목소리로 제 주인께 사과를 전했다. 하지만 녹스는 별로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집무실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댄 그는 목을 양옆으로 풀면서 책상을 두드렸다.

“괜히 시간 낭비를 하게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는 그만하면 됐어.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으니.”

“그래도 가올테가 정신이 나가 버린 건 알아냈네요.”

루이스가 머리 옆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했다. 술을 그렇게 마셨다고 하던데, 술이 없어서 미친 걸까요? 라는 말도 덧붙였다. 셰이단이 난처해하자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뱉은 농담이었다.

“미치던 말던, 다 나가.”

녹스가 턱짓으로 문을 가르쳤다. 귀찮음이 가득 묻은 말투에 셰이단은 굳은 얼굴로 문 앞에 서 있는 제인에게 방으로 데려다 주겠다며 말을 건넸고, 그들은 일절 말없이 방을 나갔다.

* * *

“답답해….”

텅 빈 방 안에 혼잣말이 퍼졌다. 가면 때문에 답답한 줄 알았지만, 벗어 내도 여전했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숨 막히는 기분이 녹스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결국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몇 바퀴 거닐었다. 그러다 문득, 방 안에 없었던 작은 구슬…. 보석을 발견했다. 문과 카펫 사이에 떨어져 있는 보석은 녹스의 그림자 안에서도 붉은빛을 내며 반짝였다.

‘저게 뭐지?’

그냥 두면 하녀들이 방을 치우면서 청소하겠지만, 궁금증이 생겼다. 어디서 굴러온 걸까. 가까이 다가가 보석을 주워 들자 신성한 기운이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 여자가 장신구를 하고 있었나? 기억을 되새겨 봤지만, 귀걸이나 목걸이는 본 기억이 없었다. 심지어 이렇게나 선명하고 잘 세공된 보석은 대륙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붉은 보석은 신성력이 모두 흩어져도 빛을 잃지 않았다. 녹스는 그 보석을 버리지 않고, 서랍에 챙겨 두었다. 몸에서 지하감옥의 불쾌한 냄새가 풍겼다. 저녁 만찬에 이 꼴로 갈 순 없지, 그는 서둘러 환복을 위해 제 방으로 향했다.

주방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음식들이 식당 가운데에 길게 위치한 식탁을 가득 채웠다. 황무지 땅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생선 요리들이 고소한 향을 풍기고, 육질 좋은 고기가 즐비하게 늘어섰다. 녹지화 계획은 진전이 더뎠지만, 그간 쌓아 온 부는 이곳에서도 신선한 음식들을 볼 수 있게 했다. 만찬에 초대된 스무 명 남짓의 기사단장과 기사들은 종종 있는 이 회식을 기다려 왔는지 무척이나 들떠있었다.

“대장님, 안녕하십니까!”

모든 이들이 착석한 뒤, 조금 늦게 녹스가 식당에 들어섰다. 청년들의 우렁찬 인사가 식당을 가득 메웠다. 음식을 나르던 하녀들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가슴을 쓸었다.

“그만하면 됐어.”

녹스가 식당에 들어서 상석에 앉을 때까지 그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박수를 쳐대는 통에 녹스는 부러 퉁명스레 말하며 자리에 섰다.

“일동 대기!”

루이스는 그가 들어오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은편, 해일러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씁쓸한 마음이 들어 눈으로 해일러를 찾았다. 가장 끝자리에 앉아 굳은 자세로 앉아 있는 그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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