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괜찮으시다면야…. 넌 이만 나가 봐, 다신 그러지 말고.”
다그칠 때와는 전혀 다른 고운 미성이 부드럽게 모리나를 달랬다. 제인에게 폭언을 퍼부었던 그 애는, 결국 눈물을 보이며 뒷걸음질 쳐 방을 나갔다. 그 남자와 제인은 하녀가 나간 뒤에도,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서로를 바라보며 같은 자리에 있었다.
“음, 멋대로 엿들어서 죄송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그는 멋쩍게 웃고 있었다. 청량하고 깔끔한 목소리 덕인지, 사과가 무척 진솔하게 느껴졌다.
“…….”
“전 델단이에요. 제가 불편하시면 도로 나갈게요.”
통성명부터 하고자 이름을 밝혔지만, 제인은 입을 열 기미가 안 보였다. 그러나 그런 침묵 속에도 그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했다.
나가는 시늉을 하는 델단의 모습을 보고도 제인은 그저 쭈뼛거리는 게 전부였다. 그 꼴이 퍽 측은해 보였던 델단은 안쓰러운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녀에게조차 그런 대우를 받고 있으니, 자존감이 떨어질 만큼 떨어졌겠구나. 그 또한 같은 경험이 있었다. 가올테 백작에게 처음 끌려갔을 때….
처음엔 저택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했었다.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와 소통을 하고, 눈을 맞추며 살아야 한다는 걸 그때 알았었다. 날마다 어두운 방에서 죽어 가고 있었을 때, 가올테 백작이 자신을 사람답게 대우해 주었다.
비록 대가가 따랐었지만….
그 뒤로 저택의 사람들과도 원만히 지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비예단은 백작을 두둔하는 델단의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었지만, 모두에게 무시당하고, 세상에 홀로 남겨졌을 때의 참담함, 누군가 다가와 줬을 때의 그 감격스러운 기분은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평생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델단은 제인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녀가 더는 우울의 계곡에 고립되어 있지 않게, 홀로 버텨 내지 않게.
“종종 꽃을 두고 갔었는데, 혹시 보셨나요?”
델단은 편안한 분위기로 가볍게 대화를 시도했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지만, 제인은 뻣뻣한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 델단이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려 보았다. 볼에 기다란 보조개가 패었다.
“다행이네요, 바람에 날아갈까 봐 걱정했었는데.”
“저…. 감사합니다.”
힘겹게 한마디를 건네자 델단은 뿌듯한 기분과 함께 안도감이 들었다. 딱히 자신을 내보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낯선 사람의 낯선 방문이 부담스러워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전제부터 틀려 있었다. 제인은 애초에 이 공간이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아 누가 오던 거부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고마우면 우리 친구 할까요?”
낯간지러운 말이라 생각했는지, 델단의 제안은 어색한 톤이었다.
“…….”
사실 제인은 오늘 창가에 꽃 한 송이를 올려놓을 생각이었다. 그 벌꿀색 머리의 인간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침대에 올려 둔 꽃다발에 눈길이 갔지만, 델단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이 상황을 불편하다고 여겨 시선을 돌리는 거라 생각했다.
“아! 오늘은 이거 두고 가려고 했는데.”
델단이 셔츠 주머니에서 손수건에 싸인 타르트를 건넸다. 겉면이 약간 바스러져 가루가 떨어졌다.
“오늘 아침 식사로 같이 나온 건데, 좋아할 거 같아서요.”
멀리서 손을 뻗어 건네자 제인이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처음 맡아 보는 달콤한 향기가 뿌리내린 것처럼 굳어 있던 다리를 움직이게 했다. 델단은 때를 놓치지 않고 뻗었던 손을 거뒀다.
“팔 아파요. 조금만 이쪽으로 와줄 수 있어요?”
제인은 내밀려던 손을 도로 제자리에 두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녹색 눈동자엔 어떤 악의도 없어 보였다. 대단히 잘생겼다고 할 수는 없지만, 쌍꺼풀 없는 길고 넓은 눈매와 미소가 서려 있는 얇은 입술은 먹구름 한 점 없이 밝아 보였다. 천천히 얼굴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누군가가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내가 저렇게 생긴 사람을 알고 있나? 제인은 머지않아 자신을 치유해 주던 소년을 떠올렸으나 인간 중에선 금발에 녹안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걸 기억해 냈다.
서쪽에 있는 창가에 햇빛이 강하게 비췄다. 역광 때문에 델단이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눈가 주변으로 결국 손우산을 쓴 채 인상을 찌푸렸다, 제인이 작게 웃음 지었다.
“눈이 부시네요, 햇빛 때문에.”
일그러진 얼굴에 대해 적당한 변명을 둘러댔지만, 금방 웃음을 지으며 턱을 매만졌다. 짧은 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델단은 창을 등지고 있는 자신 때문에 제인에게 그늘이 드리우는 걸 알아챘다. 몸을 살짝 비틀자, 져가는 태양이 방안을 비췄다. 슬며시 내리쬐는 햇빛을 받는 제인은, 마치 스르륵 커튼을 치는 것처럼 빛이 났다. 실제로 저 아가씨의 몸에서 빛이 난 건 아닐 테지.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자신의 무례를 눈치챈 델단은 얼굴을 붉혔다.
“아름다우세요.”
반사적으로 그녀의 외모에 대한 칭찬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한낮의 햇빛에 창백한 피부를 적시며, 어딘지 모르게 슬픈 분위기가 풍기는 그녀가 잠깐이라도 자신 덕분에 웃었다는 게 왠지 뿌듯하게 느껴졌다.
제인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마치 저요? 하듯 반문했다. 못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당황스러워 보였다.
“실수예요.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그만.”
분명 놀림을 당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지?
오랜 시간, 인간 사회에서 외딴 섬처럼 지내 온 그녀는 그의 진심이 담긴 말에 마음이 붕 떠 올랐다.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고향에서 구전 동화처럼 들어오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인간과 이종이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는 이야기.
“…어, 햇빛이 강한데 괜찮겠어요?”
“햇빛…. 받는 거 좋아해요.”
제인이 창가로 다가가 델단의 옆자리에 섰다. 옷이 구겨질까 차마 기대진 못했지만, 그 모습이 마치 늘 바른 자세를 강조하는 귀족처럼 보였다. 델단은 불현듯 이질감을 느꼈다. 자신의 심장 소리가 크게 느껴져서였다. 서로의 사이에 두 뼘은 더 넓은 공간이 있었지만, 심장 소리가 밖을 빠져나갈까 노심초사했다.
“타르트에요. 위에 올린 건 딸기라는 엄청 귀한 과일인데, 운 좋게 선물을 받아서….”
“직접 만드신 거예요?”
“아, 아뇨. 타르트를 선물 받은 거예요.”
“아….”
델단은 눈을 감고 향을 맡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햇빛에 반짝이는 그의 금발처럼, 그의 마음도 반짝였다. 아이들이 먹는 톡톡 튀는 사탕이 마음에 들러붙은 것처럼, 가슴 사이의 어딘가를 강아지풀로 간지럽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첫눈에 반하는…. 그런 건가?
뿌듯한 위선의 마음인지, 설레는 첫사랑의 심정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짐짓 심각한 얼굴을 했지만 도로 웃었다. 아무렴 어때.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최근 들어 가장 행복한 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어봐요. 맛있을 거예요. 만든 사람 솜씨가 아주 좋다던데.”
“제가 이런 걸 어떻게….”
사색이 되어 거절하는 제인이 타르트가 무서운 것이라도 되는 양 한걸음 물러났다. 델단은 손사래를 치는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도로 앞으로 당겼다.
“허락 없이 만져서 미안해요. 신발, 불편해 보이길래 넘어질까 봐요.”
“아….”
구두가 불편해 계속 엉거주춤했던 걸 봤구나. 쓰라린 뒤꿈치 때문에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었는데. 세심한 배려에 제인이 또 살짝 미소지었다. 아까보다 그와 더 가까이 붙은 걸 느꼈지만, 델단은 다른 인간들과는 달라 보여 안심이 되었다. 늘 꽃을 꺾어 3층이나 되는 이 높이를 기어 올라와 선물을 두고 가고, 괴롭힘을 당할 때 나서서 구해 주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태 만난 그 누구보다도 더 친절했다.
“가져온 성의를 봐서 한 입만이라도 먹어 주면 안 돼요?”
먹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제인은 태어나서 이런 향을 내는 음식을 처음 보았다. 보고만 있어도 군침이 돌만큼 맛이 궁금했다. 결국, 제인은 권유하는 손길에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제인이 입을 달싹이다 말고 장식 된 딸기를 집어 건넸다.
“전 괜찮아요.”
“구하기 힘들다면서요, 저희 마을엔 많았거든요.”
말을 마치고 타르트를 베어 물었다. 혀끝이 씁쓸할 만큼 단맛에 이가 시려왔다.
“맛있다.”
한쪽 볼이 풍선처럼 부풀어 웅얼대는 탓에 발음이 새어 나갔다. 델단도 그 모습을 보다가 딸기를 입에 넣었다. 생각과는 달리 아삭거리는 식감에 놀라기도 전에, 부드럽게 녹아 금세 사라졌다. 달다기보단 시큼한 맛이었다.
그는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면서, 아까 이야기한 내용에 대해 떠올렸다. 딸기는 키우기가 번거로워 비싸다고 했는데, 마을에 많았다니. 엄청 부유한 집 아가씨인가? 어쩌다 여기까지…. 속으로 그녀의 과거에 대해 상상을 하다가 제일 궁금한 하나를 물어보기로 했다. 어쩌면 당연한 질문이기도 한.
“혹시 이름을 여쭤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