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30)화 (30/95)

29화.

‘외운 내용을 제외하곤 다른 말은 하면 안 됩니다.’

셰이단이 마지막에 남긴 조언, 혹은 명령들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으면 차라리 입을 다무십시오.’

‘긴장되더라도 최대한 사람처럼 구세요. 바닥에 앉는다거나 이상한 걸음걸이를 하면

안 됩니다. 가령 네 발로 걷는다거나….’

네 발로? 내가 왜 네 발로 걸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되새김질하듯 셰이단의 말을 떠올리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이종에 대한 편견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자신이 어떤 종족으로 보이기에 그런 말을 했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다음 말을 생각해 냈다. 혹여나 까먹을까 유심히 들은 덕에 쉽게 마지막 말까지 기억해냈다.

‘그분의 심기를 거스르지 마세요.’

하나도 까먹지 않고 전부 머릿속에 담아 놓은 것에 안도의 한숨도 잠시, 하녀가 처음 신어 보는 구두 때문에 걸음이 느린 제인을 밀치듯 떠밀었다. 갑작스럽게 떠밀린 등에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녀는 제인의 긴 머리카락을 붙들어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놀란 탓에 작은 비명을 낸 제인은 순간 자신의 소리에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조용히 해. 네가 소리 지른다고 누가 도와줄 것 같아?”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는 방법은 참 쉬웠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것, 큰 소리를 내지 말 것.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에게 들어와 뼛속에 새겨진 말이었다.

자연에서 인간을 피하는 방법은 노예가 된 이후에도 통했다. 인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방법. 무슨 말을 들어도, 무슨 짓을 당해도 조용히…. 가만히 있을 것.

모리나는 팔을 양 옆구리에 올리고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그러곤 반쯤 열려 있던 방문을 보란 듯이 더 활짝 열어 재꼈다. 앞엔 제인의 방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있었지만, 하녀의 행동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은 제인이 도망가게 하지 못하도록 할 뿐이지, 그녀를 보호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하녀는 마치 봤지? 라고 말하듯 어깨를 으쓱한 뒤 재빨리 돌아서서 경비병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전했다. 하녀가 발로 밀자 문이 닫혔다. 유독 큰 소리가 났다.

“너 벙어리 아니라며? 뭐라고 말이나 해봐.”

“죄, 죄송합니다….”

제인의 사과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방안을 한 바퀴 걷는 걸음걸이는 소풍을 나온 아이처럼 경쾌했다.

“내가 네 밥 당번인 거 알아? 네가 먹는 거, 내가 가져다 주는 거야.”

“…….”

제인은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까 생각했다가도 괜히 불똥이 튈까 침묵을 택하고 시선을 회피했다. 불안한 마음에 모은 두 손이 손톱을 뜯기 시작했다.

“어머.”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라는 모습이 과장되게 보였다. 종종걸음으로 제인에게 다가온 하녀의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 웃음기가 흘렀다.

“얘, 버릇없기는. 감사하다고 해야 할 것 아니야.”

퍼석거리는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어설픈 귀족 말투를 흉내 내는 게 남이 보았다면 우스워 보였겠지만, 제인은 자신보다 한 뼘은 작은 하녀에게 순종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네 밥그릇에 넣을 벌레 잡으러 다니는 게 여간 고생이 아니야. 난 벌레라면 끔찍하거든.”

그간의 희멀건 수프들의 어딘지 찝찝한, 알 수 없는 검은 건더기들이 떠오르자 자연스레 인상이 찡그려졌다. 아차 싶을 땐, 이미 하녀가 손을 머리 위로 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맞겠구나, 싶은 마음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기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았던 눈을 살짝 떠보자 그가 보였다.

델단은 오늘 늦은 아침 식사를 받았다. 주방장이 오늘 있을 만찬을 준비하다가 늦잠을 자버렸다나, 뭐라나. 매일 자거나 산책하거나 하는 여유로운 일상에서 그에게 시간은 큰 의미가 없어서 상관없다고 전했는데, 그게 주방장으로선 꽤 감동이었는지 식사와 함께 작은 선물이 딸려왔다. 이런 곳에선 금보다 구하기 힘든 과일인 딸기가 장식된 타르트. 비록 말린 딸기였지만, 실제론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부유했던 가올테의 백작에서 지낼 때도 한 번을 못 본 과일인데, 역시 수도 출신 귀족은 다르구나. 델단이 식사보다도 타르트에 더 큰 관심을 보이자 하녀가 가까이 붙어 설명했다.

“저희 성 주방장님이 디저트에도 일가견이 있으시거든요. 위에 올라간 건 호두를 갈아 넣은 살구 잼이고, 이건 딸기라는 과일인데, 정말 구하기 힘들대요!”

“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요.”

침이 꼴깍 넘어갔지만, 델단은 타르트를 먹지 않았다. 눈으로 음미하듯 살피다가 달큰한 향기를 맡고, 손수건에 조심스럽게 포장했다. 혹시라도 남으면 치울 때 몰래 주워 먹을 작정이었던 하녀가 울상을 지었다.

“셰이단 님은 언제쯤 뵐 수 있을까요?”

아쉬운 얼굴로 이만 물러가려던 하녀의 얼굴에 잠깐 짜증스러운 기색이 비쳤다. 겨우 감춘 감정은 옅게 삐져나와 목소리에 날카로움을 서렸다.

“집사님은 바쁜 분이세요. 뵙고 싶다고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그, 동생이 연락하면 전해 주신다고 하셨거든요. 근데 아무런 말씀이 없으셔서….”

“조금 더 기다려 보세요. 조만간 기별이 오겠죠.”

매일 식사 시간만 되면 끈질기게 동생의 안부를 물어대는 통에 그간 성에서 안 좋은 이야기가 돌던 델단은 사용인이 싫어하는 걸 알고 있음에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베르티아로 돌아간다 해도 안 된다, 동생에 관해 물어도 알아보고 있다. 껍데기뿐인 말들에 그 또한 지쳐가고 있었다.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주방장의 솜씨를 자랑스럽게 늘어놓던 쾌활한 하녀는 이제 없었다.

‘이 사람 원래 좀 이상한 사람이었지.’

작게 읊조리는 혼잣말이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마른 손을 하얀 앞치마에 닦은 하녀는 더 시킬 일이 없다면 이만 나가 보겠다 말했고, 대답이 없었음에도 기다리지 않고 방을 나갔다.

방에 혼자 남은 델단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고운 미간에 깊게 주름이 잡히고, 턱 근육이 경직되어 있었다. 화가 난 듯, 울고 있는 아리송한 표정.

“괜찮아, 델단.”

깊게 몰아 쉰 숨을 내뱉으며 꺼낸 위로엔 금세 평온이 느껴졌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가 밝고 선한 성격임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쓸모없는 자신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을 수 없다는 것도. 의지할 것도 없고, 낯선 곳에 떨어져 모든 게 두려운 이 상황에서조차 늘 같은 모습을 유지해야 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자신을 존중해 줄 테니까.

‘정말 괜찮아?’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방에 혼자 있는데? 주변을 둘러보고, 창문을 내다봐도 아무런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비예단 걱정에 최근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잠도 설쳤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이해했다. 그는 문뜩 귀신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유치한 생각을 했다가도, 다 큰 어른이 이런 어린애 같은 생각을 한다고 속으로 웃었다. 웃어? 이 상황이 재미있어?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내 처지가 웃겨서. 넌 이제 혼자야, 혼자 버틸 줄도 알아야지. 타르트는 비예단 주려고? 아니, 이건….

잠깐, 나 누구랑 대화하고 있는 거지?

* * *

“저기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제인과 모리나가 동시에 눈을 돌렸다. 창가에는 언젠가 보았던 벌꿀색을 닮은 금발 머리가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그가 창가 옆 나무에 올라탄 채로 풀잎이 붙은 머리를 털어 냈다.

“누, 누구…?”

“그러는 당신은 누구신데 그렇게 함부로 말합니까?”

제인을 욕보이던 하녀가 서서히 창가에서 멀어졌다. 금발의 남자는 기어코 나무를 건너와 위협적으로 물었다.

“딱 봐도 사용인 같은데, 이곳은 사용인 교육을 엉망으로 시키나?”

가올테의 저택에서 사용인을 부렸던 경험이 되살아났다. 남을 하대하는 말투, 거만한 눈빛. 모든 게 불과 얼마 전 경험에서 비롯된 연기였다. 아랫입술을 깨문 하녀는 남자의 언행에 저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충분히 안타까울 만큼 비굴해 보였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빌어도 될까요?”

“사과는 내가 아니라 저 아가씨께 해야지.”

두 손을 모아 진심인 것처럼 용서를 구하던 모리나는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서 있는 제인을 흘겨보았다. 시선이 느껴질 만큼 표독스럽게 바라보는 눈은 아까의 경멸보다 한층 더 거센, 증오가 서려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가지런히 가라앉았다.

차라리 계속 들리지 않았다면 좋았을 걸.

제인은 혹여나 제게 불똥이 튈까 조마조마한 마음을 한 손으로 꾹 눌러댔다.

“저, 저는 괜찮아요.”

갈라진 입술 사이로 새된 소리가 기어 나왔다.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도 괜찮다고 말하는 그 목소리는 너무 작아 귀 기울이지 않았다면 듣지 못할 정도였다. 그가 흘러내린 앞머리를 위로 쓸면서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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