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29)화 (29/95)

28화.

로브를 뒤집어쓴 노인과 녹스가 몇 마디를 나누는 걸 빤히 쳐다보다가, 손을 뻗으며 다가오는 노인의 손짓에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정돈 안 된 제인의 머리에 주름이 단단히 박힌 노인의 손이 올라왔다.

푸르스름한 빛이 주변을 맴돌고, 제인은 머리 위에 얹어진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그녀는 이들이 자신에게 또 다른 저주를 걸고 있다고 여겼지만, 입술 안쪽을 깨물며 다가올 공포를 참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불합리, 차별, 학대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늘 눈앞의 두려움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깨물고 있던 입안의 살점에서 결국 피가 흘렀다. 비릿한 맛이 혀에 닿았지만, 그녀에겐 그런 사소한 걸 신경 쓸 정신까진 없었다.

“…한 모양입니다.”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낯선 자극에 제인은 앙상한 손으로 두 귀를 막았다. 뭐지? 뭐야? 몇 년 만에 제 기능을 하게 된 귀가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잘 들리나 보네요.”

영락없이 노인이라고 생각했던 눈앞의 주술사에게서 생각보다 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성공했군.”

절대 선의로 저주를 풀어 주었다곤 생각할 수 없는 차가운 목소리도.

“으…. 아….”

제인이 의미 없이 목소리를 토해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것처럼 듣기 싫은 거친 목소리가 났다.

“시끄러워.”

녹스가 책상 위의 종이를 들며 날카롭게 말했다.

“대장님, 이종이라지만 이들도 다 자아가 있고 생각이 있어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길들이기가 힘들어집니다.”

시끄럽다는 녹스의 말에 다시금 입을 굳게 다문 제인은 눈알을 굴려 가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제 주인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파악하는 건 노예들의 본능이었다. 녹스는 빅토르의 말을 듣는 채도 안 하며 제인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제인은 녹스의 깨끗한 검은색 구두를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외워. 한 글자도 빠짐없이.”

녹스는 들고 있던 종이 다발을 제인의 머리 위에 뿌렸다. 종이 몇 장이 후드득 제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영문도 모른 채 무릎 위에 떨어진 종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힐끔 고개를 들어봤지만, 가면 속 무심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도로 눈을 내리깔았다.

몇 년 만에 듣는 소리인지 감탄하기도 전에 제인은 머뭇거리는 손으로 종이들을 주워 담았다. 눈대중으로만 보아도 꽤 양이 많아 보였다. 빅토르는 난처한 기색으로 녹스와 제인을 번갈아 보았지만, 자신이 나설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되었는지, 한걸음 물러나 지켜볼 뿐이었다.

* * *

“저, 저는 지소나 출신으로… 전 대륙을 유랑하며 돌아다니는 저희 민족 특성상 국…, 따로 국적이 없습니다. 가올테는 그러한 점을 이용하여 제 가족을 납, 납치했고…. 저는 가올테 백작에게 끌려가 강제로 노예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가족의 생사도 알 수 없고, 몇 년이나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고통의 나날들을 보냈지만 엑젤, 엑젤리스의 녹스 각하께서 절 불쌍히 여기시어… 돌봐 주었습니다.”

제인은 셰이단이 제 어깨를 붙들고 빙글빙글 돌리며 옷 매무새를 가다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외웠던 대사들을 읊었다.

어디에 필요한 것인지, 왜 이런 걸 시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착실하게도 그녀는 몇 마디를 더듬은 걸 빼곤 완벽히 외워냈다. 녹스의 표정은 가면 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셰이단은 꽤나 만족한 얼굴로 제인을 바라보다가 거울 앞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제인은 거울 앞에 서서 동그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짙은 와인색과 회색 원단으로 만들어진 단정한 드레스가 제 몸에 입혀져 있다는 게 놀라워서, 왜 이걸 자신에게 입혀 주었는지 인간들의 생각을 알 수가 없어서.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제인은 이런 옷들을 입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화려하고 값진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는, 인간 중에서도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었다. 인간 사회에 섞일 수 없는 자신이 입을만한 것은 아니었다. 복잡한 생각 때문인지 거울 속 그녀는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심란한 마음과는 달리 거울 속 비친 모습은 창백한 안색을 제외하곤 훌륭했다.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 아래로 마치 눈물이 고여있는 듯 반짝이는 검은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작게 솟아있는 코는 그녀를 순진해 보이게도, 어려 보이게도 했다. 병약해 보이는 창백한 피부를 장식한 연한 홍조와 붉은 입술은 화장이 없어도 선명했다.

제인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셰이단은 그녀의 모습을 뿌듯해하고 있었다. 줄곧 남자 주인만을 섬겨왔던 그가 꽤 정성을 쏟은 모양이었다. 제인의 이 모습은 본래 타고난 외모 덕이라고도 할 수 있었겠지만, 그의 뿌듯함은 나름대로 정당성이 있었다.

셰이단은 마지막으로 제인의 발 앞에 붉은 리본 장식이 달린 검은색 구두를 내밀었다. 그것이 신어 보라는 의미임을 알았으나, 그녀는 선뜻 발을 올리지 않았다. 걷지 못해 굳은살 하나 없는 뽀얀 발이 어찌할 줄을 모르며 드레스 자락 안에서 꾸물거렸다.

셰이단은 누군가를 꾸며 주는 것에 재미를 들린 탓에 제인이 이 모든 것들을 낯설어하고 어려워한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앞에 내려놓았던 구두를 도로 주워 들었다.

“신발이 좀 불편해 보이죠? 발 치수를 몰라 눈대중으로 맞춰 온 거라…. 걷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다른 구두를 가져오겠습니다.”

“아, 아니…아니요…!”

셰이단의 말에 제인이 다급하게 그의 손에 들린 구두를 빼앗듯이 가져왔다. 그 배려가 제인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건 아무리 오랜 경력의 셰이단이라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서로의 처지가 달라 만들어진 충돌에 둘 다 난처한 기색이었다.

결국, 셰이단은 자신을 불편해하는 그녀를 위해 혼자 신발을 신을 수 있게끔 녹스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녹스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책상에 걸터앉아 있었지만, 그가 불만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꽤 영특해서 금방 외워 내더군요.”

“….”

“옷도 썩 잘 어울리고요.”

“…이게 정말 통할 거라 생각하나?”

“가능성이 있다면 시도해 보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주인님께서도 그를 죽이는 건 피하고 싶을 테니까요.”

“…빨리 데리고 나와. 저녁 만찬 전에 처리하고 싶으니.”

“오랜만에 있는 기사님들과의 만찬이니 늦으시면 안 되죠. 준비하겠습니다.”

* * *

“3층에 있는 여자 손님의 시중을 들 사람을 구한다.”

하녀장이 쉬고 있는 하녀들의 휴게실에 찾아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날이 더워지고 있는데도 그 중년의 여자는 긴소매를 입은 채였다. 하얀 손수건으로 이마에 난 땀을 닦아내는 얼굴은 몹시 고단해 보였다.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던 휴게실에 일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쉬는 시간에 일하러 가라니, 싫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3층 손님의 정체에 대한 꺼림칙함이 더 컸다. 어느 날 다 죽어 가는 채로 실려 오더니, 요즘은 경비병들이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그녀에 대한 가십이 날이 갈수록 퍼지는 탓이었다.

처음엔 대장님의 첩이니, 노스어의 귀족이니 하면서 말이 많았었는데, 제인을 진찰했던 의사와 친한 하녀가 그 여자 손님이 이종이라는 소문을 내고 다녔다. 하녀들은 참새처럼 소문을 날라 반나절 만에 모든 고용인은 제인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었다.

“제가 할게요.”

군데군데 비웃음이 들려왔다. 누가 이종 수발을 들어?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던 그때 15살 정도 되었을 단발머리의 아이가 버쩍 손을 들었다. 하녀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름이?”

“모리나에요.”

“…모리나?”

기쁜 얼굴도 잠시, 하녀장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모리나라고 자신을 소개한 아이의 얼굴에도 불안이 스쳤다.

“어쩔 수 없지,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마당에.”

모리나는 예전 일하던 귀족가에서 보석함을 훔쳐보는 바람에 해고되었던 아이였다. 하녀장은 그녀가 가져온 추천서가 하도 엉성하여 기억하고 있던 터라 영 미덥지 않았지만, 어차피 그 손님도 이종인데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데리고 3층으로 향했다.

“3층 손님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가 도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엑젤리스의 손님이니… 너무 불쾌하게 굴진 말고.”

모리나를 훑어본 하녀장이 주의를 주었다. 그래봤자 어린애인데 못되게 굴어봤자 얼마나 그러겠어. 누가 3층 손님의 시중을 들던 진심을 다할 사람은 없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나마 어린애가 가면 괴롭힘 때문에 뒷말 나오진 않겠지. 하녀장은 어린아이의 순진한 잔인함을 모르는 듯했다.

문 앞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그들을 확인하고 살짝 비켜 주었다. 모리나는 눈을 반짝이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종에 대한 혐오는 있었지만, 눈앞에서 가까이 본 적은 없었기에 잔뜩 기대에 부푼 상태였다. 궂은일도 직접 지원해서 한 덕에 자신에 대한 하녀장의 평가도 오를 것이다. 일거양득이라는 게 이런 건가? 모리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모리나라고 합니다.”

* * *

제인은 옷을 구기지 말라는 셰이단의 말에 따라 조심스럽게 구두를 신고 걷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 뒤엔 단발머리의 어린 여자가 따라붙었다. 그녀를 잘 돌보라는 지시를 받은 하녀, 모리나였다. 등에 꽂히는 눈초리가 따가웠지만, 억지로 무시해 가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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