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이유가 뭔지부터 이야기해.”
“지금 가올테는 심신미약 상태입니다. 그 여자가 인간이라고 말한다면…. 알아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종 노예를 사다가 부려 먹었는데 그게 사실은 인간이었으니 마땅히 벌을 받아라?”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는지 녹스가 피식 웃으면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셰이단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다. 그는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었으며, 감으로 무언가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무리한 이야기를 한다면 분명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진짜 이유가 뭐지?”
“…주인님께서는 가올테를 죽일 작정이시잖습니까.”
셰이단이 머리를 짚으며 신음하듯 말했다. 날조한 서류에 서명까지 받았으니 그의 사지가 멀쩡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당연하다는 얼굴로 앉아있는 녹스를 보면서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귀족은 살해하면 안 됩니다. 더 사고 치면 황실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내가 언제 사고를 쳤다고 그래?”
“허가 없이 무단으로 도시를 만드셨고, 그에 맞는 세금도 내지 않으셨죠. 공작 신분이 박탈되었는데도 사병을 꾸리신 데다 유배 당한 것 치곤 너무 잘살고 계시잖아요.”
“유배가 아니라 추방이야. 말은 바로 해야지.”
“뭐든 간에요.”
“도시를 만든 적도 없지 않나. 여긴 내 집이니까.”
“그럼, 사람들은 길바닥에서 살고 있습니까?”
“내 마당에서 살고 있지.”
“…….”
“더 할 말 없으면 이 얘긴 끝난 걸로.”
“가올테를 죽이는 건 안 됩니다. 그가 아무리 이름도 안 난 시골 출신이어도 주인님을 경계하는 귀족들이 탄원하기 시작하면 저희가 위험해요. 여기가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잖아요.”
“그대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워 오는 건 그대답지 않은데. 가올테의 비웃음을 사는 건 결국 나겠군.”
“말이 안 되진 않습니다.”
“어차피 서류에 지장까지 받았는데, 당장 내려가서 죽여도 문제없어, 어차피 죽을 놈 미리 선수 친 거지.”
“선수 치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가올테는 정신이 온전치 않으니,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을 거예요.”
“정신이 아무리 나갔다 하더라도 개와 사람은 구분하지.”
셰이단은 한숨을 내쉬고 나서야 대답을 이었다.
“어차피 저주는 풀어 주실 생각이셨잖아요, 청개구리 심보가 왜 나옵니까? 사람 죽이지 말라는 게 그렇게 노발대발하면서 반대할 극악무도한 짓도 아닌데.”
녹스도 마찬가지로 바로 이어지던 대답을 한 박자 쉬었다.
“그대는 그냥 그 이종의 저주를 하루라도 빨리 풀어주고 싶은 것 아닌가?”
그가 관철하는 눈빛으로 셰이단을 바라보았다.
* * *
점심도 거르고 일에 몰두하던 녹스 앞에 생각지 못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도 적지 않게 놀랐는지, 들고 있던 펜을 잠깐 멈추고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중요한 게 아니라면 셰이단에게 보고해도 돼.”
“중요한 거라 직접 왔어요.”
헤티아였다. 포니테일로 묶은 보랏빛 머리가 흙먼지에 뒤덮여 어두운 남색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빠르군.”
“대장 밑에 있으면서 이런저런 걸 배웠으니까요.”
그녀는 끼고 있던 검은 가죽 장갑을 벗고, 품에서 꺼낸 종이 뭉치를 건넸다. 가벼운 말투와는 달리 정중한 몸짓이었다.
“정보 길드에서 얻어 왔나, 그런 거라면 좀 실망인데.”
화난 듯 말하는 녹스의 시선은 건네받은 종이에 집중되어 있었다. ‘문허스’에 가입한 마법사들의 명단이었으나, 대부분은 죽어버린 것인지 붉은색으로 빗금이 쳐져 있었다.
“‘어떻게든’ 구해 오기만 하면 상관없잖아요?”
“그래. 하인들을 보냈어도 됐겠지. 그 뒤엔 불이라도 질러서 흔적을 감추고 말이야.”
“소문이 여기까지 퍼졌어요? 불났다고?”
그녀가 들린 곳은 여기서 곧장 반나절을 달려야 도착하는 도시였다. 길드 건물에 불이 났다는 사실을 녹스가 벌써 전해 들었을 리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헤티아는 당황한 채 계속해서 소문이 빠르다며 주절거렸다.
“잿가루 냄새라면 지긋지긋해.”
헤티아는 놀란 눈치로 제 몸에 코를 킁킁거렸다.
“종일 달려왔는데 신기하네, 늑대라 그런가?”
가면 속 험악하게 굳은 얼굴을 떠올리며 나름의 농담을 던져 봤지만,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헤티아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다 죽었나?”
“네, 모두 잠든 시간이라 대피할 시간은….”
“눈으로 봤냐고 물은 거다.”
“확인은 못 했지만…….”
녹스가 읽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고 느리게 일어났다. 헤티아는 뒷걸음질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몸이 굳어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기사단에 입단하기 전 서명했던 계약서, 5항.”
“엑젤리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할 것.”
녹스는 한 걸음씩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어느새 코앞까지 와 있었다. 당당하고 장난기 넘치던 헤티아의 목소리에 떨림이 느껴졌다.
“그대를 기억하고 있어. 유난히 체력이 떨어져 입단 시험 때 모두가 널 비웃었었지.”
“…….”
작은 체구와 가벼운 몸 때문에 좀처럼 근육이 잘 붙지 않던 헤티아는 모두가 체력 시험을 끝내고 쉬고 있을 때도 여전히 운동장을 돌고 있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승부욕이 강한 그녀는 그 기억을 회상할 때마다 이가 갈렸다.
“내 앞에서 유난히 격을 차리지 않은 것도 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함인가?”
“…….”
열등감에 둘러싸인 자신을 장난스러운 모습인 척 꾸민 것이 모두 들통나는 순간이었지만, 변명 한마디 나오지 않았다. 그저 꼿꼿이 들고 있던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앞으론 더 자랑하는 게 어떻겠나?”
“…네?”
“이제 내게 직접 명령받도록.”
녹스가 이전에 헤티아를 겨눴던 단검을 건넸다. 헤티아의 눈이 놀라울 만큼 커졌다. 건네주는 단검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꿈은 아닌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대장님께…. 직접이요?”
헤티아는 자신이 속해있는 ‘제1 기사단’ 소속에 자부심을 가진 멍청이들을 보면 진저리가 났다. 영리한 그녀는 그런 기사단 소속이 그저 인원을 나누기 위해 구분해 놓은 것일 뿐, 아무 의미가 없는 숫자임을 진작 알고 있었다.
다만, 아직도 바보같은 기사 놀이를 벗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제1 기사단에 속해있어야 루이스라는 밧줄을 잡고 대장에게 갈 수 있었다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헤티아가 잡은 밧줄은 튼튼한 동아줄이었다. 머리는 의심과 당황으로 제 기능을 못 하는 듯했지만, 마음은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차올랐다.
녹스는 헤티아의 내면에서 무슨 난리가 벌어지고 있는지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감격한 채 서 있는 헤티아를 두고 책상에 걸터앉아 이만 나가보라 손짓했다. 헤티아는 그 축객령조차도 기쁘게 받아들이며 건네받은 단검을 진귀한 보물 모시듯 두 손에 올려놓고 방을 떠났다.
* * *
제인은 반쯤 넋을 놓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늘 같은 하늘과 같은 풍경은 자그마한 달빛에도 감사했던 그녀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그 마음이 죄가 되었을까, 제인으로서는 최대한 만남을 미루고 싶었던 사람이 찾아왔다.
‘검은 늑대….’
저번처럼 떨지도 않았고, 짐승처럼 굴지도 않았으나 그에게서 못마땅한 기색이 흐르는 건 굳이 그녀의 본능을 빌리지 않아도 되었다. 벌컥 방문을 열고 들어온 새로운 주인 앞에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눈치를 보는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처량함도 차가운 가면 앞에선 그저 궁색할 뿐이었다. 녹스는 거만하게 제인을 내려다보다가, 뒤에 있는 병사들에게 손짓하여 제인을 묶어 두었던 족쇄를 풀게 했다.
시원한 느낌을 만끽하기도 전, 병사들이 제인의 팔을 각각 붙들었다. 기어코 시작되었구나.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났지만, 제인은 기억을 떨치고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척거리며 끌려가는 그녀의 왼쪽 발목엔 족쇄의 모양을 따라 붉은 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제 발로 걸어 나갈 수 없을 거라 여겼던 문을 지났다. 해가 지면 빛이 들어오지 않아 캄캄했던 방과 달리, 문밖은 밝고 생기가 넘쳤다. 복도의 난간 아래로 아래층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보였다.
인간들은 이렇게 사는구나.
빠짐없이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 벽을 보며 참 손재주가 좋은 종족이야. 하는 감탄도 잠시, 불현듯 안 좋은 예감이 들어 팔에 소름이 돋아났다.
갇혀 있던 곳을 나올 땐 늘 안대를 썼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도망갈까 봐 그랬던 거겠지. 제인은 모든 종족을 통틀어 가장 잔인하고, 가장 강대한 인간들이 머지않아 제 두 눈을 뽑아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눈을 가리지 않는 거라고. 그래도 눈물은 흘릴 수 있을 테니.
그런 불길한 미래를 예감하면서도 결국 반항 한 번 못해 본 제인은 경비병들에 이끌려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올랐다. 앞서가는 검은 늑대의 넓은 등이 마치 커다란 벽처럼 느껴졌다. 제인은 제 방과 달리 관리가 잘 되어 반질반질한 바닥에 무릎이 꿇린 채 앉혀졌다. 발끝에 닿는 카펫이 간지러워 지저분한 발가락을 괜스럽게 꾸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