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27)화 (27/95)

26화.

마네는 어렸을 때부터 습관처럼 저녁 산책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 습관대로 오늘도 어김없이 져가는 노을을 구경하고자 성 밖을 나섰다. 하인들이 모두 잠자리와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시간이라 그런지, 성 외부는 큰 인기척이 없었다. 마네는 이 고요한 시간을 사랑했다. 어렸을 때 추억을 회상하기에도, 충동에 사로잡히기에도 좋은 시간이었으니까.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정원에 시원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어렸을 적엔 정원에 있는 분수에서 함께 놀기도 했었지. 옛 생각을 하면 마음이 뭉클해졌다. 물소리의 원인을 찾아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정원사가 아직까지 일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늦은 시간까지 일하시네요.”

정원사는 마네를 돌아보지 않고 물뿌리개를 든 채 대답했다. 워낙 사람과 마주칠 기회가 적은 직업이라 그런지, 그는 숫기가 없어 보였다.

“얘네는 게으른 놈들이라 해가 질 때쯤 물을 줘야 하거든.”

“그래야 새벽에 꽃을 피우죠.”

“이 꽃을 아는가 보군.”

“디에스 로드게릭스. 늦은 밤에 적들을 급습해 새벽이면 어김없이 승리의 깃발을 꽂는 그분을 기리기 위해 가져온 꽃이잖아요. 게으르다고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정원사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청년은 어느새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가장 눈에 띈 건 그의 고귀함이 담긴 은빛 머리카락이었고, 두 번째로는 자신을 바라보는 제비꽃을 닮은 눈이었다. 순간 늙고 상한 정원사의 몸이 경직되며 움츠러들었다. 그는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마네는 겁먹은 정원사를 눈치챈 것인지, 친절로 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마저도 이질적인 느낌 탓에 완벽하진 않았지만, 생각보단 잘 통했다. 예쁘게 자리 잡은 미소를 보자 한결 마음을 놓은 정원사가 헛기침을 몇 번 하곤, 물뿌리개를 고쳐 잡았다.

작년 이맘때쯤이었을까, 정원사는 같은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을 가진 남자를 본 기억을 떠올렸다. 출근을 위해 나온 이른 새벽, 정원 앞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넋 없이 서 있던 엑젤리스의 대장. 정원사는 그가 쓰고 있는 가면 뒤로 보이는 외로움을 느꼈다.

정원사 또한 전쟁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엑젤리스로 이주했었기에 느낄 수 있었던 동질감이었다. 무언가에 휩쓸릴 듯 위태로운 녹스를 보며, 위로 한 마디 전해주지 못했던 게 늘 마음에 걸렸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여유로워 보였고 평화로워 보였다. 쳐진 눈매가 전혀 위험한 사람이 아니니 경계하지 말라는 듯 곱게 접혔다. 작게 웃은 입매 옆엔 흐릿한 볼우물이 패었다.

무례할 만큼 눈앞의 남자를 빤히 바라보던 정원사는 결론을 내렸다. 대장과 이 사람은 전혀 다른, 닮은 사람이라고. 가면 속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그 뒤에 이런 얼굴이 있을 거라 상상하니 절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형제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던가. 전쟁귀니, 뭐니 악명을 떨치더니만 형제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구먼. 정원사가 마네를 다시 힐끔 훑었다.

마네는 이 경계심 많은 정원사가 자신을 충분히 탐색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기 위해 가만히 마주 본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충분히 생각을 마쳤는지 몸의 긴장을 풀자 느린 걸음으로 정원 안쪽에 한 걸음 더 내디뎠다.

“꽃을 구할 수 있을까요?”

정원사는 꽃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이 마을 우두머리의 형제가 부탁하는 요청에 차마 거절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마네가 꽃을 꺾기 위해 몸을 숙여 손을 내밀자 궂은일이라곤 해 본 적이 없어 보이는 하얗고 가는 손이 드러났다. 정원사는 그를 제지했다. 그러곤 흙 묻고 주름진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마네는 그 행동의 의미를 깨닫곤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마네의 손에는 싱싱하고 아름다운 아이들로만 채워진 꽃다발이 들려졌다. 진심으로 꽃을 사랑하는 정원사 덕분이었다. 감사합니다, 짧게 인사를 전한 마네는 꽃다발에 얼굴을 묻었다. 진한 향기가 몸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당연하게도, 마네의 수려한 외모는 꽃과 무척 잘 어울렸다.

작은 선물을 준비하다 보니, 노을 구경은커녕 어느새 해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도 아쉬운 기색은 없었다. 꽃다발을 손에 쥔 채 곧장 목적지로 향했다. 어쩌면 충동적일지 몰랐지만, 이 시간이 아니었다면 그녀에게 꽃을 선물해 줘야겠다는 생각조차 안 했을 것이다. 마네가 걸어간 자리 뒤로 꽃잎 몇 장이 떨어졌다.

분주히 움직이던 하녀와 하인들이 꽃을 든 마네를 한 번씩 뒤돌아봤다. 제인의 방 앞에서 경비를 서던 기사들도 놀란 눈치였지만, 짧게 목례를 하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또다시 어두운 방 안, 둘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침대에 턱을 괴고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제인은 침대가 움푹 꺼지는 느낌에 들개처럼 예민하게 반응했다. 순식간에 고개를 치켜든 제인의 눈앞에 오색의 풍경이 펼쳐졌다. 놀라움에 커진 눈에 마네가 비쳤다.

“안녕.”

한층 더 상냥해진 목소리가 인사를 건넸다. 제인은 마네의 방문보다도, 코를 찌르는 강렬한 향기에 매료되었다. 사람의 손을 타 조금의 결함도 없이 자라난 꽃 중에서도 정원사가 고심하여 골라낸 완벽한 작품들. 제인은 손을 동동 구르며 펜과 종이를 요구했다.

「제게 주는 건가요?」

“그럼.”

마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꽃을 무척 좋아하나 봐.」

마네는 제인이 여느 귀족가 영애들처럼 꽃 선물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조금은 우습다고 여기고 있었다. 제인이 이종이기에 낮잡아 본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깟 비싸고 쓸데없는, 적어도 마네가 생각하는 그런 선물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좋아한다기보단 그리워요. 제가 고향을 기억할 수 있게 해 주거든요.」

이종 주제에 인간 여자와 취향이 같은 게 아니었다. 마네는 자신이 제인을 낮잡아 봤던 사실이 좀 미안해졌다.

「내가 나갈 수 있게 도와줄게.」

제인은 그 글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끝으로 글자를 만져 보기도 했다. 결국, 손가락에 덜 마른 잉크 자국이 묻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지, 두어 번 글씨를 쓰다듬던 그녀는 결국 아무것도 적지 않은 채 종이를 다시 돌려주었다. 건네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네는 궁금하다는 느낌이 다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종잇조각은 결국 받지 않은 채, 한참 동안 눈을 내리깐 제인을 바라보았다. 결국, 그는 방을 나섰다.

‘이게 아닌데.’

제인이 좋아할 거라 생각해서 했던 말이 왜 즐거웠던 분위기를 망쳤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를 망친 건 마네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오랜 시간에 거쳐 그녀가 쌓아온 인간에 대한 불신.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호감을 사고, 신뢰를 주면 비로소 돌변해서 대가를 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제인은 두려웠다. 고작 인간들의 돈벌이 수단에 불과한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는 마네와 선물을 두고 가는 금발 머리의 남자가 어느 날 돌변할까 봐. 여느 인간들과 똑같을까 봐. 그래서 또다시 기대하고, 실망하게 될까 봐.

그간 당해온 것들을 모두 떠올리면 마음이 남아나지 않았을 텐데도, 남을 미워할 줄 모르는 그녀에게 희망이 자리 잡는다. 결국, 손에 쥔 종이는 구겨진 채 바닥을 뒹굴었다.

* * *

셰이단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부산을 떠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남들이라면 평소와 다른 그 작은 차이를 알아챌 수 없었겠지만,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녹스는 서류를 내려놓고 티 나게 눈치를 보는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지 지금 이야기하면 들어 주지.”

그답지 않게 말을 머뭇거리는 걸 보며 녹스는 무슨 문제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거의 하루 종일을 함께하는 사이인데, 나 몰래 무슨 비밀이라도 만든 건가. 녹스는 아닌척하며 제 기분을 살피는 그를 위해 조금 더 부드러운 말투로 보챘다.

“당장 말하지 않으면 무조건 안 된다고 할 거란 것만 알아 둬.”

“제가 괜히 참견하는 건 아닐까 해서요.”

셰이단은 녹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반듯한 안경을 괜히 한 번 올리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억지로 회피했다.

“그대는 늘 과하게 참견하고 있어.”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지만, 셰이단은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약간의 정적이 흐른 뒤, 생각을 정리한 듯 조리 있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용은 녹스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 제인이라는 여자. 저주를 풀어서 가올테 앞에서 연기를 시키는 건 어떨지 생각해봤습니다.”

“…연기?”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별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녹스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냈다. 검은 가면과 대비되는 흰 얼굴이 드러났다. 눈가에 찌푸려진 인상과 못마땅해 보이는 입이 셰이단을 긴장하게 했다.

“이미 빅토르 님께도 여쭤봤습니다. 문허스의 명단만 찾는다면 당장이라도 저주를 해제할 수 있다고 하셨으니….”

녹스가 셰이단의 말을 듣다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말을 멈추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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