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26)화 (26/95)

25화.

마네는 그 두려움이 과거의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라 넘겨짚었다. 그래서 그녀가 저주를 건 자의 정보를 알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종이엔 다시 유려한 필체가 적혀갔다.

「아는 사람이었어?」

제인은 그가 보석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당했던 학대에 비롯된 트라우마가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그러나 돌아온 질문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자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인간들에게 자신의 쓸모란 그 보석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전처럼 고문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어쩔 수는 없었다.

예전에야 그런 취급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포기했었지만, 평화로운 며칠을 보내고 나니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끔찍이도 싫었다. 하지만 마네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 보석에 관해선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왜 그래? 기억나는 거라도 있어?」

갑자기 주저앉는 제인의 모습에 놀란 마네가 물음표를 꾹 눌러쓴 글자를 휘갈겼다.

「어떤 인간을 말하는 거예요?」

「네게 봉인의 저주를 건 사람.」

「로브를 깊이 눌러써서 얼굴은 제대로 못 봤어요.」

「작은 특징이라도 좋아.」

몇 번의 대화를 더 주고받은 뒤에야 제인은 눈을 감고 옛 기억을 끄집어내려 노력했다. 지긋하게 감은 두 눈 위로 미간에 주름이 잡혀갔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 오히려 더 생생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노예 사냥꾼들에게 잡힌 직후의 일이었다. 그들의 몸에서 나던 지독한 술의 향이 이 방안에서 풍기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나무 바닥의 가시가 다리에 파고드는 줄도 모른 채 무릎을 꿇고 빌었던 것도 생각났다. 결국, 가시가 무릎 깊이 박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고름이 잡혔던 일도, 다리를 잘라내자는 인간들에게 매달려 평생을 울만큼의 눈물을 빼고야 풀려났던 일도. 어딘지도 모를 시골로 끌려가 매일 당하던 폭력도, 머리를 처박히던 벽에 언젠가 금이 가는 바람에 며칠을 굶어야 했던 것도. 항상 도망갈 궁리만 한다고 오해한 주인 때문에 마취제에 절여 살았던 날들도.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훌쩍 커버린 제 몸을 마주했던 날도.

마치 어제 겪은 일인 마냥 생생한 악몽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직후처럼 아파 왔다. 하지만 제인은 결국에 그 ‘노인’을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단단하게 주름 잡힌 손등에 그려진 초승달의 문신과 붉게 빛나는 서클렛. 희미한 기억 속에서 기어코 찾아낸 작은 단서.

제인은 종이에 초승달과 서클렛을 그렸다. 글씨보다도 더 형편없는 그림이었다.

「손등에 문신이 있었어요. 서클렛은 붉은색.」

“초승달 모양 문신?”

마네가 자연스럽게 제인과 눈높이를 맞추고 그녀의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손길이 무척 조심스러워 제인도 그가 나쁜 마음을 먹고 물어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없이 봐온 나쁜 인간들과는 다른, 친절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었다.

「왜 묻는 거예요?」

보나 마나 나쁜 사람일 게 뻔한데, 왜 굳이 알아보려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마네는 제인이 듣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음성으로 대답을 대신에 했다.

“나머진 신경 쓰지 말고 그동안 편히 쉬어, 제인.”

제인은 상냥한 손길이 제 이마를 떠나는 게 퍽 아쉬웠지만, 끝내 그 손목을 붙들고 대답을 종용하진 못했다. 몸을 일으키는 마네를 따라 제인의 고개가 점점 올라갔다. 램프의 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얼굴은 억지로 울음을 참아서인지 코끝이 붉게 물들었다. 한 줄기 빛이 내리던 방이 도로 어두워졌다.

* * *

녹스는 이른 아침부터 빅토르를 불러오라 했다. 덕분에 빅토르는 아침 식사를 위해 숟가락을 들었다가 도로 내려놔야 했다.

“밥도 안 먹이고 일 시키면 이 노인네는 기력이 쇠해 죽습니다.”

“아침부터 약한 소릴.”

못마땅한 기색이 다분한 목소리였지만, 녹스는 셰이단에게 손짓하여 다과를 준비시켰다. 곧이어 테이블에 따뜻한 차와 함께 빵이 가지런히 올려졌다. 식사를 못 한 빅토르는 빵을 보자 허겁지겁 손을 뻗었다.

“이 무능한 마법사에겐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빅토르는 입에 가득 들어있는 빵을 훌쩍 넘기기 위해 수프를 마시듯 차를 급히 들이마시곤 입가를 한 번 닦은 후 녹스에게 물었다.

“그 이종 여자의 저주, 진전은 있나?”

“노예 상회에서 일했던 마법사들 위주로 수소문 중입니다. 다른 방면으로는, 저주를 건 대상자의 정보 없이 풀 때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과 치료 방법을 찾는 중이고요.”

“아무런 진전도 없다는 이야기를 길게도 하는군.”

“애초에 시간을 2주나 주셨지 않습니까.”

빅토르가 허허, 하고 웃으며 실없이 웃었다. 녹스는 검지로 가면의 표면을 한 번 훑고 빅토르에게 새로 알아낸 정보를 말했다.

“초승달 모양의 문신이 있었다더군.”

“초승달?”

녹스가 손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허기를 참지 못하고 입안 가득 빵을 넣어 우스꽝스럽게 씹던 빅토르는 손에 들고 있던 걸 도로 내려놓고 되물었다. 놀라움, 반가움이 묻은 목소리였다.

“붉은 보석이 박힌 서클렛도.”

“초승달 문신이라고 하셨습니까?”

서클렛에 대한 건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초승달 문신에만 집착하는 빅토르의 그 주름진 얼굴에 오랜만에 의욕이 돋보였다.

“정확한 건 아닐세, 전해 들은 거니.”

“정확하다면, 훨씬 도움이….”

“아는 게 있나?”

급한 마음에 빅토르의 말을 자른 녹스는 몸을 한층 더 내밀은 상태였다. 빅토르는 입안에 들어있던 빵을 모두 삼킨 후 천천히 목소리를 가다듬곤, 전보다 더 진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달을 숭배하는 마법사 집단에 대해서 배운 기억이 있습니다.”

“배운 적이 있다니, 그렇게 무능하지만도 않군 그래.”

“하지만 워낙 폐쇄적인 집단이라 정보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 정돈 내가 알아내도록 하지. 마침 괜찮은 적임자가 있어.”

“그 집단은 ‘문허스’라고 불립니다. 명단만 있다면, 노예 상회에서 일했던 마법사들과 대조하여 확인할 수 있으니 명단을 받는 대로 저주를 풀 수 있을 겁니다.”

* * *

빅토르와의 만남 이후, 녹스는 정신없이 밀려 있던 일 처리를 하고 있었다. 비옥한 땅을 만들고자 하는 거창한 계획에 비해 진전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밑 빠진 독의 물 붓기 마냥 진행하던 이 모든 일이 비예단만 인신 공양하면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전만큼 스트레스를 받진 않았다.

“안녕하세요, 대장님.”

그렇게 온 마을 사람들의 불평불만을 담은 서류들을 하나하나 읽어보고 있을 때, 생뚱맞게도 인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책상 앞에서도, 문 바깥에서 난 소리도 아니었다. 애초에 문이 열린 적도 없었다. 녹스는 책상 밑에 숨겨둔 단검을 들고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창문에 매달려있는 사람의 목에 칼이 겨눠졌다.

“간도 크군. 안부 인사까지 전하다니.”

“대…장님…? 절 찾으셨다고….”

그 사람은 매달린 손 때문에 항복의 표시도 하지 못한 채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녹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칼날이 목을 파고들까 봐 힘껏 뒤로 빼놓은 모습이 인상적인 그 짙은 피부색의 여자는 보라색 머리에 검은 타이즈를 입고 있었다. 루이스에게 전해 들은 헤티아의 인상착의와 같았다.

“헤티아?”

“네……. 살려 주세요.”

헤티아는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리곤 웃으며 대답했다. 군기라곤 전혀 없는 모습에 녹스는 이번에도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닌가, 자신의 안목에 의심이 갔다. 단검을 책상에 꽂아 두고 한숨을 쉬자, 헤티아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창문을 올라왔다.

“죽을 뻔했네요.”

“정말 죽일 수도 있으니 다음부턴 문으로 다니도록 해.”

“역시 전쟁터에서 오래 지내셔서 그런가, 반응 속도가 엄청나시네요! 항상 동경해 왔습니다, 대장님! 멀리서 보는 거로 만족했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게 되다니!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녹스는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이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역시 사람을 잘못 뽑았군. 헤티아는 꽤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한 내일이나 올 줄 알았더니.”

“어젯밤에 해일러가 찾아왔더라고요. 대장님께서 절 찾으신다고. 그래서 쏜살같이 달려왔습니다!”

“네가 할 일이 있어. 필요하다면 다른 기사단원들을 갖다 써도 좋아.”

“힘쓰는 일 빼곤 뭐든 자신 있으니 시켜만 주세요! 근데, 이거 저 가져도 돼요?”

헤티아가 책상에 꽂힌 단검을 보며 말했다. 두 손을 모으며 눈을 빛내는 모습이 간절하기 그지없었다.

“하는 거 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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