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비예단은?”
“가올테의 폐저택으로 향했습니다. 종일 먹지도 않고 잠만 자기에 매수해 두었던 사제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주라 일러두었습니다.”
쯧, 녹스가 혀를 찼다. 쓴소리 몇 마디 들었다고 곧장 도망가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그렇게 틀어박혀 있는 것도 그의 입장에선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상을 벗어나질 않는군.”
“덕분에 편하게 됐습니다. 생각보다 고집이 있어 보이는데, 다시 돌아올까요?”
루이스는 남의 집에 방화를 저지르고,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낸 사람답지 않게 허허, 하고 웃으며 품에서 낡은 초상화를 꺼내 녹스의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 애가 달리 갈 곳이 어디 있다고, 그 애의 전부는 이미 엑젤리스에 있는 마당에.”
갓난아기와 지금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델단, 그리고 처음 보는 중년 부부가 그려진 손바닥만한 그림을 흘깃 쳐다본 녹스는 대충 무엇인지 짐작했는지 따로 묻지 않았다.
“혹시 몰라 헤티아에게 살피라 해 두었는데, 제가 걱정이 지나쳤나 봅니다.”
루이스는 이미 방에 들어오기 전부터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인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루이스가 엑젤리스로 돌아와 해일러에게 가장 먼저 들은 보고는 대장께 크게 혼났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제대로 용서를 구하길 바라는 마음에 같이 데려왔지만, 생각보다 더 가라앉은 느낌에 잘못 판단했음을 깨달았다. 노력이 무색하게도 녹스는 해일러에겐 관심조차 주지 않고, 그저 헤티아가 누군지 되물을 뿐이었다.
“눈에 띈 적이 없어 대장님께선 잘 모르시겠군요. 제 기사단 소속인 아이입니다. 워낙 민첩하고 체구가 작은 편이라 이런 일에 적합합니다.”
“몇 년이나 됐지?”
“이제 들어온 지 1년 되었습니다. 해일러와 동기죠.”
루이스는 헤티아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녹스에게 은근히 해일러에 대해 언질 주었다. 옆에 있음에도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게 기분 나쁠 법도 하나, 지금 당장은 높은 사람에게 먼저 잘못을 해놓고 납작 엎드리지 않는 해일러의 사회성이 의심되었다.
“그 애 말고, 해일러를 보내라. 비예단은 워낙 둔해 누가 가도 눈치채지 못할 테니.”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해일러는 입술을 짓이기며 감정을 참아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티가 났다. 녹스를 제외한 방 안의 모두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헤티아, 그 아이는 복귀해서 내게 오라 전하도록.”
녹스는 난처한 기색의 루이스를 보면서도 봐주지 않고 마지막 말을 뱉었다. 늘 그의 곁을 보좌하는 기사 중 해일러를 내치고, 헤티아로 바꾸겠다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대장님!”
참다못한 해일러가 반발심이 가득한 채로 눈을 치켜뜨며 녹스를 불렀다.
“그대는 이제 심부름꾼이지 않나.”
“제가, 제가 뭘….”
“뭘 잘못했냐고 묻지 말게. 난 말 잘 듣는 개를 키우고 싶은 거지, 아양 떠는 강아지는 필요 없으니.”
루이스는 녹스가 왜 이렇게 모질게 구는지 알고 있었다. 물론, 해일러가 주제넘게 나선 게 큰 잘못이긴 했으나 녹스는 이런 일로 측근이었던 사람을 내칠 만큼 자비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지금 이 냉대는 그저 교육의 일종이었다. 복종하고, 따르는 개를 만들기 위한 교육. 따뜻할 정도로 다정했다가 냉기를 품으면, 상대는 그 온기를 다시 한번 느끼기 위해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게 된다. 그게 녹스의 사람을 솎아내는 방법이었다.
“가올테가 수도의 재판에서 비예단의 능력을 공개하겠다 하더군.”
“예? 하지만 가올테는 우리가 베르티아의 땅이 필요해서 이러는 거로 알고 있을 텐데요.”
“아랫것들 입단속을 제대로 못 시킨 내 잘못이지.”
해일러의 어깨가 유난히 경직되었다. 감옥에서 가올테의 말에 흠칫했던 자신을 겨냥한 말이었다.
“해일러.”
“대장님, 저는 그저…!”
“네 탓을 하진 않겠다. 가올테도 바보는 아니니까.”
해일러는 아직도 억울함이 가시지 않는 듯 씩씩거렸다. 녹스가 뒤이어 말을 붙였다.
“가올테는 내 손에 죽는다. 수도로 송환시킬 필요 없어.”
“대장님,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무언가 더 반발하려는 해일러의 팔을 잡은 루이스가 억지로 그녀를 끌고 나갔다. 집무실에 남은 녹스는 둘이 나간 자리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다.
루이스 또한 녹스의 곁에 있으면서 그가 측은하게 느껴졌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몇 년을 괴로워하며, 가족을 살해했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도 계속 견뎌야만 하는 이유가 뭘까. 왜 모든 풍파를 홀로 버텨내는 걸까. 늘 의문이 들었고, 늘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한 번도 그러지 않았었다.
루이스는 그저 주인의 뒤를 묵묵히 지켜줄 뿐, 그가 가는 길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가 외로워 보여도 늘 거리를 두었다. 그게 제 주인이 원하는 것이었고, 그를 따르는 것이 자신이 지켜야 할 도리이기 때문에.
“네가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하니까, 대장님이 불편해하시는 거야.”
집무실을 나온 둘이 성을 나가면서 잠깐의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주로 루이스가 해일러를 타박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런 얼굴로, 그렇게 서 있는데… 어떻게….”
해일러는 이미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지난 겨울, 가족의 무덤 앞에서 마주했던 대장의 얼굴이 잊히지 않아 그저 사무적으로만 대할 수가 없다는 게 변명이었다.
“대장님은 우리가 지켜 주길 원하지 않아.”
“우린 그럼…. 우리의 존재가 대장님께 무슨 의미입니까?”
해일러가 무엇을 원하는지 루이스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다 같이 얼싸안고 지난 과거를 기억하며 눈물을 쏟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 왜 매번 감정적으로 굴어서 일을 망치는지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그만해. 네가 징징대는 거 받아 줄 사람 아무도 없어. 우린 엑젤리스를 위해 일한다.”
결국은 반쯤 짜증을 내며 타박했다.
“……네. 녹스 엑젤리스요.”
울지 않으려 애쓰는 그녀를 루이스는 달랠 수도, 혼낼 수도 없어 답답했다.
* * *
해가 저물고도 한 참이 지난 시각이었다. 반쪽짜리 달이 하늘 높이 솟아있는 늦은 밤. 제인의 방엔 손님이 찾아왔다. 문 앞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왜 이 남자를 제지하지 않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늦은 시간 자신을 찾아와 주는 이 손님이 매일을 무료하게 보내는 제인에겐 더없이 반가운 존재였다.
‘마네 로드게릭스’
제인은 만년필에 쓰여 있었던 그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반가운 마음에 입을 달싹거렸다.
“너무 늦게 왔지?”
지금 시간의 방문이 무례임을 아는지, 슬쩍 사과의 뜻을 전했다. 흰 얼굴에 붉게 홍조가 올랐다.
“응?”
제인은 뒷짐을 진 손에서 파스락, 작은 부스럼 소리가 들렸다. 그는 본능처럼 경계했지만, 제인은 깜짝 선물인 마냥 손을 앞으로 내놓았다. 저번에 필담을 주고받으며 적은 종이에 둘러싼, 델단에게 받은 꽃다발이었다.
엉성하기 그지없는 모양새였다. 잔풀이 제대로 정리되지도 않은 꽃들과 이미 잔뜩 구겨진 포장지의 조화는 우스꽝스러운 편이 더 맞았다.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제인은 어린아이가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장난감을 자랑하는 것처럼 뿌듯한 모습이었다.
“근데, 이거….”
남자는 꽃들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만지며 몇 번을 확인하다가 의미심장하게 운을 떼었다.
“정원의 꽃들이네.”
주변을 가득 채운 꽃 향이 둘에게 스며들었다. 그는 정원에서 가꿔지는 꽃들이 왜 여기 있는 건지 궁금했다. 귀하디귀한 종자들만 모아 애써 키워내고 있다고, 기후에 맞지 않아 마법이며 영약을 들이붓느라 관리비도 꽤 많이 깨진다고 들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는 엑젤리스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소중히 여기는 정원의 꽃이 엉성하게 묶여 있는 걸 보고 노여움이 생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인기가 많은가 봐.”
하지만 온실 속 화초만큼 가치 없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애써 노여움을 풀었다. 너무 귀하게 여기면 천한 게 된다나. 어린 시절 언젠가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제인은 여전히 기쁘게 웃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시들어 꺾여 버릴 것들, 좋아하는 사람이 가져가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
“오늘은 궁금한 게 있어서 왔는데, 알려줄 수 있어?”
그가 주머니에서 고이 접은 빈 종이와 만년필을 꺼냈다. 꽃다발을 얌전히 테이블에 내려놓은 제인은 냉큼 펜과 종이를 받았다.
「자랑하고 싶었어요.」
「예쁘네.」
꽃다발만큼이나 엉성한 글씨와 꽃만큼이나 화려한 글씨가 나란히 써졌다. 제인은 그가 입은 옷이나 행색으로 미루어보아 인간 중에서도 귀족이라 불리는 높은 신분임을 짐작했지만, 종종 손끝에서 보이는 오래된 흉터가 의아했다. 물어볼까 했어도 혹시나 트라우마를 건드리게 되는 건 아닐지 지레 겁먹어 결국 질문이 되진 못했다. 누군가 자신에게 흉터에 관해 묻는다면, 그때의 학대당했던 기억이 떠올라 괴로울 테니, 자신의 경험을 지표로 삼은 일종의 배려였다.
“이 꽃은 누구한테 받았대?”
「뭐라고요?」
“아냐.”
그는 습관적으로 대답하다가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는 제인의 얼굴을 마주하곤 ‘아, 너 못 듣지?’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펜을 건네받은 그가 단정하고 화려한 글씨로 그녀에게 오늘 온 목적을 적어 보여 주었다.
「저주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
제인이 눈에 띄게 굳어 버렸다. 펜을 잡은 손이 허공을 맴돌다가, 잉크 자국이 크게 번질 때까지도 쓰지 못했다. 커다란 눈에 두려움이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