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24)화 (24/95)

23화.

“각하께서 저를 죽이신다고요? 하하…. ‘감히’ 아무런 작위도 없는 미천한 사생아 따위가 대대로 베르티아를 관할한 코르도 가문의, 이 가올테를 죽이시겠다고요?”

가올테는 여태 쌓인 불만을 토로했다. 목을 내놓아야만 할 수 있는 말이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뱉은 불만은 틀린 것이 없었다. 녹스는 표면적으로 어떤 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외부에서 보기엔 그저 도적 떼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한 마을의 영주를 함부로 가두고, 해한다는 건 큰 범죄임이 당연했다. 해일러는 가올테의 입을 막으려 철창에 다가섰지만, 녹스가 손을 뻗어 그녀를 제지했다. 가올테는 계속해서 정도를 모르고 계속해서 지껄였다.

“황제 폐하께서 각하의 방종을 왜 용서해 주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를 죽이신다면 각하의 앞길도 평탄하진 않을 겁니다.”

가올테의 마지막 말이 녹스를 자극했는지, 가볍게 쥐었던 주먹에 어느새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확실히, 그대는 유서 깊은 백작가의 가주일 테지. 난 몰락한 귀족일 뿐이고.”

굳게 쥔 주먹과는 다르게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흥분해 있던 가올테는 고장 난 것처럼 지껄이던 입을 멈추고 가만히 앉아 그의 경고를 들었다.

“내가 손에 쥔 걸 모두 빼앗기고, 수도에서 추방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 대륙에 없어, 가올테.”

녹스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다정해졌다가도 금세 위협적으로 변했다. 그는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바꾸며 가올테를 농락했다.

“그럼에도 내가 실체 없는 권력을 쥐고 있는 건.”

녹스의 손이 차고 있던 검의 손잡이로 향했다. 가올테는 굳어 버린 몸으로 눈알만 굴려대며 그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황제의 가호 때문도, 옛 가문의 빛바랜 후광 때문도 아니야.”

“안, 안돼….”

가올테는 차분히 이야기하는 녹스 앞에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오로지 내가 이루어 낸, 공포 덕분일세.”

검을 빼 들자, 가올테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애초에 죽일 생각도 없이 골려주려는 속셈이었던 녹스는 그의 반응이 즐거운 듯 웃음을 흘렸다. 가올테 또한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살면서 평생 겪어본 적 없는 수모에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는지, 그는 철창을 붙들고 미친 듯이 흔들어대며 소리쳤다. 쇳소리가 나는 악에 찬 비명이 지하 감옥의 복도를 감싸며 메아리처럼 울렸다.

“절 다시 베르티아로 보내 주십시오. 델단 그놈은 어떻게 해도 상관없으니, 제발 돌려보내 줘!”

해일러는 최소한, 나쁜 뜻으로 가올테의 부탁을 들어 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녹스를 데려옴으로써 가올테의 수명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곱게 수도로 보내 사형시키려 했던 계획은 순식간에 무산되었다. 가올테는 녹스의 손에 죽게 될 것이었다.

* * *

델단은 평범한 인간과 사고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뼛속 깊이 자리 잡은 이종에 대한 혐오 또한 다른 이들과 같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그저 제인을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제인에 관한 생각 때문에 밤이 깊어도 마음이 무거웠다. 비예단이라도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는 동생이 과거에 종종 이야기했던 ‘이종 여자’가 그 ‘아가씨’라는 건 까맣게 모른 채 계속해서 동생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걸 아쉬워했다.

“안녕하세요.”

델단은 제게 매일 식사를 전해주던 사용인에게 처음으로 말을 붙여 보았다. 하녀는 늘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던 델단이 말을 거니 꽤 놀라는 눈치였다.

“오늘 식사를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매번 감사합니다. 혹시…. 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

하녀는 식사를 테이블 위에 올려둔 뒤 정갈한 자세로 그를 마주 보고 섰다. 물어보라는 고갯짓을 보내자 델단이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이 성에 검은 머리의 아가씨가 계시죠?”

“잘 모르는 일입니다.”

“아…….”

흔쾌히 질문을 허락한 하녀는 생각보다 쌀쌀맞게 대답했다. 델단은 괜히 멋쩍어 턱을 매만졌다.

“더 궁금하신 거라도?”

“아뇨. 괜찮아요. 식사 감사합니다.”

델단은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하녀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테이블로 다가갔다. 평민에겐 분에 넘치는 식사였지만, 가올테의 저택에서 이미 진수성찬을 받아 본 그는 큰 기쁜 없이 식기를 들었다.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끝마친 후에 방에서 나와 층을 살폈다. 그녀가 있는 방이 어디인지 확인하려는 속셈이었다. 문 앞에 경비병이 지키고 있는 곳을 확인하곤, 저기구나. 싶었다. 차마 들어가도 되겠냐고 묻지는 못한 채 도로 성을 나섰다.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어제와 같은 장소에 도착한 델단은 3층의 창가를 살폈다. 어제 놓았던 꽃이 없어져 있었다.

‘그 아가씨가 들고 갔구나.’

여전히 열려있는 창문을 빤히 바라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도 과거, 가올테 백작의 저택에 잡혀있을 때, 하녀가 이따금 몰래 가져다 주던 작은 쿠키며 케이크 조각들이 큰 위로가 되었었다. 그녀에게도 제가 가져다 주는 꽃들이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혹시 꽃을 조금 꺾어가도 될까요?”

델단은 내친김에 더 예쁜 꽃들로 그녀에게 희망을 주고자 성의 정원을 방문했다. 마침 정원사가 있어 조심스레 질문했지만, 정원사는 누추한 델단의 옷을 보곤 단박에 안 된다며 핀잔을 두었다.

“이 정원이 어느 분을 위해 가꿔지는지 알고 있소?”

“이 정원의 주인이라면….”

“비단, 이 정원뿐 아니라 엑젤리스에서 나고 자라는 모든 것들은 모두 그분을 위한 것이니 감히 눈독 들이지 않는 게 좋을 거요.”

“하지만, 어떻게 안 될까요?”

델단의 서글서글한 눈매가 초롱한 빛을 띠며 끔벅거렸다. 나무가 좋아 정원 일을 시작하게 된 정원사는 그 숲을 닮은 푸른 눈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는지, 칼같이 거절한 걸 번복하며 이미 잘라냈던 꽃이며 나뭇가지를 한 쪽에 던져두었다.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시던가.”

연신 감사 인사를 한 뒤에야 더미를 뒤져 찾아낸 몇 송이의 꽃은 조금 시들긴 했지만, 아직 활기가 있었다. 곱게 모아 나뭇잎으로 묶으려 노력했지만,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아 엉성하게 만들어진 꽃다발은 어린아이의 소꿉장난 같았다.

모양새가 어떻든 간에, 완성했다는 것에 의의를 둔 델단은 우물 양동이에서 물기를 모아 꽃잎에 조심스럽게 털은 뒤 허리춤에 매달곤 어제처럼 단숨에 나무를 올랐다. 어두운 방 안쪽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델단은 조심스럽게 꽃다발을 창가에 올려 둔 뒤 소리 없이 내려갔다. 물기를 머금은 꽃들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그 시각, 제인 또한 문 앞을 지키는 기사가 건네준 수프 그릇을 홀짝이며 마시고 있었다. 감자와 질 나쁜 고기 몇 덩이가 전부인 수프는 걸쭉한 게 어딘가 찝찝한 맛이 났다.

그래도 굶었던 시절을 떠올리면 이만한 음식은 진수성찬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구석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며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창가 쪽으로 불쑥 흰 손이 튀어나왔다.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느라 수프가 옷이며 손에 모두 튀어 버렸지만, 개의치 않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창가엔 귀하게 자란 티가 나는 꽃들이 보기 좋게 묶여 있었다. 씁쓸한 풀냄새가 덜한 거로 보아 떨어진 꽃들을 주워 만든 것 같았다. 그 마음 씀씀이가 좋았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나도 챙겨주는 걸까? 뒤늦게 주변을 살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제인은 고이 접어 올려 두었던 마네와의 필담을 적은 쪽지를 손바닥으로 눌러 폈다. 그걸로 꽃다발을 만들 심산이었다. 꽃에 비해 화려하거나 고급스러운 종이는 아니지만 둘러보니 제법 그럴싸했다.

음울한 회색빛 방에 어울리지 않은 화사한 꽃이 이질적이었지만, 제인은 꽃을 올려 둔 탁자에 비스듬히 얼굴을 기대곤 행복에 겨운 얼굴을 했다. 종일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 * *

녹스는 가올테를 만나고 온 후부터 계속해서 기분이 저조했다. 셰이단은 그 낌새를 일찌감치 알아채고, 최대한 주인의 신경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곁을 지켰다. 노크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철렁했지만, 여태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아 마음을 놓고 있던 찰나였다.

“대장님. 루이스입니다.”

셰이단은 정적을 깬 노크에 저도 모르게 흠칫했으나 이내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마음을 놓았다. 해일러가 아니라 다행이다, 싶었다. 녹스가 문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셰이단은 그가 가면을 쓸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랜만에 돌아온 루이스를 맞이했다. 제 주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믿는 부하가 왔으니 분위기가 한결 나아질 것을 기대했다.

“안녕하십니까, 대장님.”

루이스의 뒤에 따라온 해일러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셰이단은 그녀와 녹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몰라도, 수족으로서의 신뢰를 잃었다고 짐작했었다. 그 짐작이 맞았는지 녹스는 해일러의 인사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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