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23)화 (23/95)

22화.

제인은 낯선 사람의 등장에 놀라 창가 밑으로 몸을 숨겼고, 머지않아 머리를 살짝 들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몰래 확인하려는 속셈이었겠지만, 금발 머리를 가진 그 낯선 사람, 델단은 빤히 제인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델단은 사랑받고 자란 이들이 으레 그렇듯, 스스럼없이 제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거리가 멀어 안 들린다고 생각했는지, 딱히 무어라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야생에서 자라왔던 제인에게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위협이 되었다. 델단이 손을 듦과 동시에 제인은 창가 밑으로 주저앉아 다시 몸을 숨겼다. 잠시 앉아 숨을 고르다가, 창문턱을 더듬으며 일어나 창문으로 손을 뻗었다. 창문을 닫으려는 몸짓이었다.

그러나 침대에 묶여 있던 족쇄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움직임을 방해했다. 몇 번이나 손을 공중에서 허우적거린 다음에야 결국 창문 닫기를 포기하고,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방 모서리에 가 앉았다.

델단은 왜 저 여자가 몸을 힘껏 내밀고 손을 휘저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정한 성격과 준수한 외모로 늘 사랑받으며 살았던 델단은 설마 누군가가 자신을 무서워할 거라곤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내가 저 사람을 무섭게 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보다는 오히려 그 모습에 호기심이 일었다.

제인의 방이 있는 3층을 겨우 고개를 쳐들어 바라보던 델단은, 강한 햇볕에 눈이 부셔 인상을 쓰다가 결심한 듯 창가 앞으로 다가갔다. 손우산으로 햇빛을 가린 채 골똘히 생각하다가, 곧이어 앞에 있는 나무를 두드렸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나무타기는 별일이 아니었다. 솜씨 좋게 3층 높이까지 나무를 오른 델단은 창을 노크했다. 하지만 두드림에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무례함을 무릅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새 어딜 간 건가?’

어두운 방안을 한참이나 둘러보던 그는 구석에서 팔로 몸을 감싼 채 떨고 있는 여자를 찾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마치 보호색처럼 그녀를 숨겨주고 있었다. 그제야 델단은 저 여인이 두려워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자각을 했다. 자신의 행동이 이름 모를 아가씨를 괴롭히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함께.

마을에서 함께 나고 자란 친구들과 서슴없이 했던 행동들이 버릇처럼 튀어나와 부끄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대화 몇 마디를 나누고, 금세 친해질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건 자신의 착각이었다. 이곳은 베르티아가 아니었다. 델단은 사과의 의미로 나무에 자란 꽃을 꺾어 제인의 창가에 올려두곤 훌쩍 나무를 내려왔다.

제인은 한참을 고개 숙인 채 몸을 감싸고 있다가, 점점 다리가 저리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건 창문이었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느린 걸음으로 한 걸음씩 창문 쪽으로 다가가자 전엔 없던 것이 놓여 있었다.

제인이 늘 눈으로만 바라보았던, 창가 앞 나무의 꽃이었다. 어린 시절을 숲에서 자란 그녀는 꽃의 언어에 능숙했고, 당연히 그 꽃의 꽃말을 알고 있었다. 안쪽으로 갈수록 노랗게 되는 하얀 꽃의 의미는 ‘안녕’이었다. 누군가에게 인사를 받아본 게 너무 오랜만이었던 그녀는 그 꽃을 마치 소중한 보물인 것처럼 손 위에 올려놓고 울음을 참았다.

델단은 그녀가 자신과 그리 멀지 않은 방에 있음을 알았다. 그 이름 모를 아가씨가 제가 준 선물을 잘 받았는지, 버리진 않았는지 궁금했다. 20대 초반의 청년인 델단이 이성에게 호기심이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런 순간적인 호기심보다는 다른 의미로 마음이 쓰였다. 공포에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가올테 저택에 강제로 끌려갔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감금되다시피 끌려가 지내던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일지,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지고,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던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많이 나아져 잊고 싶은 과거일 뿐이었지만, 델단은 같은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을 모른척할 정도로 냉혈한은 아니었다.

아무리 작은 시골 마을에서 평생을 나고 자라 세상일에 대해 모르는 델단이지만, 이 성의 주인인 녹스에 대해선 뜬소문으로라도 들은 적이 있었다. 전쟁광이니, 포로를 잡아 잔인하게 고문한다느니…. 그 아가씨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자신 또한 백작에게 잡혀 몹쓸 짓을 당했던 기억이 있으니 더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를 지켜줄 능력은 없지만, 고통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했다. 어떻게든 작은 도움이라도 주리라, 위안이라도 되어주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온전히 제인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동생이 말도 없이 떠나 외롭고 심란한 마음, 그 마음을 어떻게든 채우고 싶었다.

* * *

녹스는 아침부터 기분이 저조한 상태였다. 셰이단은 전날 형님이 오신 것 때문이라 짐작했고, 매년 그래왔기 때문에 괜히 제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말을 아꼈다.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문밖에서 대장을 뵙길 청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안감이 스몄다.

“대장님. 해일러입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정갈한 노크 소리가 몇 번 들리고, 해일러가 숨을 고르며 말하는 게 들려왔다. 녹스의 눈매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짜증이 치민다는 신호였다. 그가 책상을 두어 번 두드리다가 책상 위에 올려진 가면을 썼다. 셰이단은 문을 열어 해일러에게 용건을 물었다.

“가올테 백작이 대장님을 뵙길 청합니다.”

녹스가 찡그린 눈을 도로 감았다. 셰이단도 마찬가지로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이럴 때 와서는. 주인의 기분에 따라 그날의 근무 환경이 달라지는 집사는 그녀가 살짝 원망스럽기도 했다.

“어떻게 할까요?”

“나더러 죄수가 할 말이 있으니, 찾아오라?”

해일러도 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이기에 어쩔 수 없이 처분을 기다리고 있을 때, 녹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해일러, 함께 내려가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중 들려온 긍정적인 대답에 해일러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가면 뒤 숨겨져 있는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없었지만, 셰이단은 고개를 저으며 해일러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녹스가 먼저 방을 나간 후, 그녀가 따라 나가려 하자 셰이단이 조언을 전했다.

“때가 안 좋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해일러는 그 조언을 귀담아들으면서도,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가올테는 수도로 송환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거로 알고 있는데.”

“네, 이번 달 말에 송환 예정입니다. 그 전에 꼭 대장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가올테가 쓸데없는 말을 한다면, 네 기사 작위를 박탈하겠다.”

“예…?”

“기사보단 심부름꾼이 네게 딱 어울릴 테니.”

해일러는 녹스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함께 있을 때면 늘 식은땀이 흘렀다. 축축한 손을 허리춤에 닦으며 또 뭘 잘못한 것인지 되새겼지만,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내가 또 뭘 잘못했을까, 자신을 자책하며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오…셨습니까….”

바닥에 널브러진 가올테가 녹스를 보자 몸을 일으켜 철창으로 다가왔다. 가올테는 그간 몹시 수척해져 있었다. 상한 음식물을 먹고, 제대로 씻지도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던 결과였다. 보기 싫을 정도로 뚱뚱했던 그의 몸이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간이 화장실로 쓰이던 양동이가 넘쳐 바닥을 넘실거렸다. 역겨운 냄새가 코끝을 찔러 해일러는 자연스레 코를 움켜쥐었다.

“내 심부름꾼이 워낙 성실하지.”

“제가… 각하께서 왜 그러시는지, 한참을… 종일을 생각했, 했습니다….”

가올테는 갈라진 목소리 사이사이로 간신히 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비예단…, 그 녀석의 능력이 탐나시는…거겠죠.”

녹스는 말 없이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해일러는 제 일도 아닌데 몸을 움츠렸다. 가올테는 그녀의 반응을 보고 제대로 짐작했음을 눈치챘다.

“수도로 송환되어 재판에 서, 서게 된다면, 비예단의 능력을 공개하겠…습니다…. 그 애는 이런 시골구석에 있기엔 아까우니까요….”

갈증에 괴로워하면서도 꾸역꾸역 말을 멈추지 않는 가올테는 그 말을 끝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승리를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감히 내게 협박을 하는 건가.”

가올테의 승리에도 녹스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바꾸지 않았다. 그는 전혀 다급해 보이지도, 패배에 분해 보이지도 않았다. 비예단을 협박해 제 일을 돕게 했다면, 그 능력을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이미 예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가올테가 귀족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 보니, 직접 죽이지 못해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을 뿐.

“제, 제가 어찌…. 그저, 거래를 하자는 겁니다. 각하.”

매일 밥만 축내며 뒷간을 구르던 돼지처럼 살던 가올테의 몸에도 귀족의 피는 흐르고 있었다. 가올테는 태생이 멍청했지만, 그래도 평민들과는 다르게 어려서부터 귀족 수업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거래는 재고 따지는 걸 좋아하는 귀족들의 특기였으며, 가올테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단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간과했다. 녹스는 이미 모든 걸 잃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더 잃을 게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잘 활용할 줄 알았다.

“거래라…. 그럴 필요 없이 난 그대를 죽일 수도 있어.”

“하, 하하하…!”

가올테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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