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22)화 (22/95)

21화.

한밤, 성의 모두가 잠들어 있을 시간에 제인의 방에 손님이 찾아왔다. 따뜻한 빛이 나는 작은 램프를 들은 그는 흰 손등으로 가볍게 문을 노크했다. 하지만 제인은 청각이 봉인되어 노크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남자는 안에서 별다른 소리가 나지 않았음에도 문을 열었다.

“제인.”

그가 가져온 램프 덕에 방이 밝아지자 제인은 고개를 돌렸다. 마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응한 것 마냥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어른거리는 실루엣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제인은 얼어붙은 듯 움직임을 멈췄지만,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자 마음을 놓았다.

그 사람이구나.

그는 헛간에서 봤을 때처럼, 여전히 잠옷 차림에 그날과 똑같은 램프를 들고 서 있었다. 제인의 입이 달싹였다. 뭐라 말을 하려다가도 포기하고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며칠 꼬박 끼니를 챙겨 저번보단 나아진 몰골이었다.

그는 그 얼굴을 그대로 마주하고, 제인과 똑같이 웃었다. 여전히 무해한 미소였지만, 어딘가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뭔가를 흉내내는 것처럼, 그런 이질감이.

“잘 지냈나 보네.”

남자는 바닥에 앉아있는 제인을 보며 멀지 않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호기심과 경계심이 섞인 눈빛이 그의 행동을 집요하게 쫓았다. 미리 준비해 온 종이와 펜을 건네주자 손을 쭉 뻗어 받는 그녀의 팔엔 군데군데 흉터가 져 있었다.

「누구예요?」

제인이 반듯하게 종이를 펼쳐 건넸다. 흙바닥에 쓴 게 아닌데도 글씨체는 엉성했다.

「난 여기 살아.」

애매한 대답으로 회피한 그의 대답에 제인은 물러서지 않고 또다시 비슷한 질문을 적었다.

「검은 늑대의 형제죠?」

“형제라….”

두 번째 질문마저 애매하게 흘린 그는 건네받은 펜을 돌리며 대화 주제를 바꾸기 위해 고민했다.

「말 못 하는 거 안 답답해?」

주제를 돌리고자 던진 질문인데, 제인은 펜을 한참이나 잡고 생각에 빠졌다. 당연히 답답하다고 대답할 줄 알았던 그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시계도 없는 손목을 톡톡 치면서 답을 보챘다.

「상관없어요. 제가 기억하고 있는 소리는 이곳의 소리가 아니니까.」

다소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제인의 대답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녀가 처음 인간 세상으로 나왔을 때 했던 말은 ‘살려 주세요.’, ‘제발.’ 따위의 비참한 말이었고, 듣는 것들이라곤 자신을 상품 취급하며 경멸하던 말들이었으니까.

물론 살려 달라고 빌고 싶었던 적이 무수히 많았지만, 그렇다고 살려 줄 사람들도 아니었기에 꼴사납게 구걸하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제인은 자신만의 고요한 세계에서 과거에 들었던 새의 울음소리, 계곡의 물장구 소리를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눈을 감고 그 소리를 상기시킬 때면 잠깐이나마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 들어 조금은 위안이 됐다. 제인은 묘한 얼굴을 하는 그를 쳐다보다가, 제 손에 쥐어진 종이에 다시금 글을 적었다.

「여긴 왜 왔어요?」

그는 그녀의 대답을 완전히 이해 못 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보겠다는 몸짓에 벌써가냐는 표정의 제인은 제가 쓴 종이를 들곤 한 번 펄럭였다. 대답을 요구하는 행동처럼 보였다.

“네가…. 어떤 종족인지 궁금해서. 이종은 못 본 지 오래됐거든.”

그는 제인이 들었다면 상처 받았을 말을 뱉었다. 하나 다행인 점은 그녀가 듣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펜을 돌려 달라고 손을 뻗자 그녀는 아쉬운 마음으로 검은 만년필을 손에 쥐고 굴렸다. 그러다 문득 펜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글씨가 눈에 띄었다.

‘마네 로드게릭스’

그의 이름인 것 같았다. 누군가의 이름을 알게 된 게 너무 오랜만이었던 그녀는 속으로 몇 번이나 ‘마네 로드게릭스’를 되뇐 다음에야 만년필을 건네주었다. ‘마네’는 그녀가 펜을 돌려줄 때까지 얌전히 손을 뻗어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에 또 올게.”

그는 부드러운 저음으로 작별 인사를 했고, 제인도 그가 인사를 하고 있음을 짐작하고 일어서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마네도 두어 번 손을 흔들곤 방을 떠났다.

* * *

제인은 아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에 꽤 설렜는지,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다가 늦은 아침을 맞이했다. 문 앞에는 여전히 감자와 약간의 고기가 들은 수프 그릇이 놓여 있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다 식어 빠졌지만, 그녀는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양손으로 들곤 창가에 섰다.

손에 닿을 순 없어도 눈으로 보는 나무와 꽃이, 피부로 느끼는 햇빛과 바람이 갇혀 있다는 사실 속에서도 제인의 기분을 한결 나아지게 했다.

그녀와 같은 층에 있는 델단의 방에선 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침부터 델단을 찾은 셰이단이 그에게 동생이 엑젤리스를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비예단이 제게 말도 없이 떠났을 리가 없어요…!”

물기에 젖은 가느다란 미성이 계속해서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뱉었다.

“급한 일정이라 하셔서 델단 님께 미리 언질을 드린 줄 알았습니다.”

“저도, 저도 베르티아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동생이 그랬을 리가…. 늘 어디 가면 간다고 말을 하고 가는 애예요!”

“비예단 님께서 형님분을 잘 보살펴달라 부탁하셨습니다. 델단 님이 베르티아로 돌아가시면 저희가 면목이 없어집니다.”

뒷짐 진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난처한 기색을 숨기던 셰이단이 끝내 한숨을 내쉬었다. 비예단의 형이라 하여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지나치게 심약한 그의 심성이 셰이단의 신경을 건드렸다.

“하지만….”

“비예단 님도 어엿한 사제 신분에, 곧 성인이 될 나이인데 과보호하시는 건 아닐까요? 별문제 없을 테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셰이단은 계속해서 달래 보았지만, 델단은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강박적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탓에 셰이단은 절로 찌푸려지는 얼굴을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동생이 떠나기 전에 다른 말은 안 하던가요…?”

“따로 전해 듣기로 한 말이 있으셨나요?”

“그건… 아니지만, 얼마 전에 조금… 싸웠거든요.”

“델단 님께 화가 나서 떠난 건 아닐 겁니다. 분명 급한 일정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아마 신전에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이렇게 급하게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뭔가 이상해요.”

“델단 님….”

셰이단은 그가 무슨 말을 들어도 진정하지 않을 것이란 걸 깨달았다. 걱정이 태산인 심신미약자를 달랠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제대로 확인을 해야 했었는데, 제 불찰입니다.”

오랜 경력의 집사는 결국 깊이 허리를 숙이고 사과를 전했다.

“아, 아니에요……. 그래도 어떻게 연락할 방법이라도 없을까요? 동생이 저만 두고 떠날 리가 없거든요….”

“제가 신전으로 편지를 부쳐 보겠습니다. 답장이 오면 바로 델단 님께 말씀드릴 테니, 그동안 너무 염려치 말고 편히 지내주세요.”

델단은 셰이단의 진심 어린 말에도 그다지 수긍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짧은 손톱을 씹어대며 초조한 얼굴로 다리를 떠는 그 모습은 누가 곁에 있더라도 금세 질려 할 정도로 불안해 보였다.

“감사합니다. 꼭 좀 부탁드려요.”

드디어 셰이단은 그의 방에서 벗어났다. 최근 들어 가장 스트레스 받는 업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델단을 처음 보았을 땐, 친절하고 상냥한 말투에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었지만 몇 마디 말을 나눠본 후엔 그 평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기력을 빼앗아가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때 했던 말 때문에….”

셰이단이 아니라곤 했지만, 비예단이 제 말로 인해 상처를 받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동생이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서, 어린 나이에 신전에 들어가 곱게 자라는 바람에 세상이 얼마나 험한지 알지 못해서 형의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 거라 생각은 했지만, 갑자기 자신의 곁을 떠나 버릴 줄은 몰랐다.

셰이단이 방을 나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델단이 몸을 일으켰다. 얼굴에 짙은 그늘이 진 그는 창가로 보이는 나무 몇 그루를 바라보다가 방을 나섰다. 우울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 산책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비예단이 문을 박차고 나갈 때, 진작 따라가서 대화를 나눠 볼 걸, 사과라도 할 걸.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후회가 깊어졌다.

그는 늘 비예단과 비교되었던 과거가 떠올랐다. 가르쳐 주면 곧잘 배우는 총명한 동생과는 달리, 늘 느리고 아둔했던 어린 시절이.

‘그래서 어른이 되고 나서도 동생에게 계속 민폐만 끼치는 못난 형이 된 거야. 비예단에게 난 그냥 짐일 뿐이겠지.’

근심이 터질 듯 부풀어 정신을 좀먹어갔다. 그는 기본적으로 남을 배려하는 자상하고 상냥한 성정이라 모든 이들이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정작 자신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다.

* * *

제인은 여전히 한낮의 햇빛을 받으며 창가를 구경 중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 없이 오직 나무 몇 그루와 하늘이 전부인 네모난 풍경이었지만, 그녀가 이 작은 방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여가 생활이었다. 어김없이 몇 줄기의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는 나무를 구경하고 있을 때, 벌꿀 색 금발 머리가 끄트머리에 보였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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