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21)화 (21/95)

20화.

그 사내는 이미 루이스에게 웃돈을 받고 비예단을 베르티아에 돌려 보내기 위해 온 것이기에 목적지를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실수라면 실수였겠으나 비예단은 이 낯선 마을에서 조금이라도 아는 얼굴을 만났다는 감상에 젖어 그런 사소한 것을 알아챌 겨를이 없었다.

얼마 전 왔던 길을 내달리면서, 비예단은 그때와는 상이한 기분에 묘한 느낌이 들었다. 제인과 형을 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다시 데리러 갈 거니까. 모든 게 다시 잘 해결될 것이라 여겼다.

베르티아에는 먹고 살 걱정 없이 직장이 있고, 지친 제 한 몸을 눕힐 수 있는 집이 있었다. 제인은 겉보기에 완벽히 인간과 똑같으니 들킬까 봐 문제 될 일도 없었다.

제인의 보석을 팔아서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하여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들킬 위험이 너무 커졌다. 제인의 노예 증서는 가올테에게 있으니 그녀가 이종이라는 사실이 새어나가면 안 되었다.

어차피 신전에서 열심히 일하면 돈이야 금방 모을 수 있었다. 앞으로 더 나은 일상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희망찬 미래에 비예단은 엑젤리스에서 받은 수모를 모두 잊고 활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그 얼굴은 베르티아에 도착하자마자 창백하게 변했다.

* * *

마을 입구에서 내려 신전까지 걸어가는 도중에도 자신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없다는 게 의아하게 느껴질 때쯤, 점차 뒤통수가 따가워졌다.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정확히 무슨 내용 인지까진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은 확실히 자신을 두고 떠들고 있었다.

“착한 앤 줄 알았는데… 쯧.”

“그러게, 겉만 보고는 모른다니까요?”

“좀 수상하긴 했어, 얼마 전에만 해도 말이야….”

살짝 웃고 있던 얼굴이 금세 돌처럼 굳고, 시선은 갈피를 못 잡고 방황했다. 자신에 대한 비난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지자 비예단은 하마터면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모두 자신을 둘러싸고 저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을 뿐, 어린 사제의 손길을 받아 주는 이는 없었다.

비예단은 참지 못하고 결국 신전으로 내달렸다. 이 순간만큼은 배고픔도, 갈증도 느껴지지 않고 오로지 편안한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무언가 오해가 있을 것이다. 신전에 가서 상황을 파악하고 오해를 풀면 괜찮아지겠지, 머지않아 익숙한 정문이 보였다. 로테의 조각상이 반겨주는, 상아색 담장이.

“비예단 님?”

“케일 사제님!”

늘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기록관이 어째서 신전 정문까지 나와 있는지 궁금했지만, 그런 걸 물을 여유도 없이 숨을 몰아쉬며 케일의 이름을 외쳤다.

당황스러운 표정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에서 비예단은 안 좋은 예감을 느꼈고, 케일은 망설이는 기색으로 안 좋은 소식을 전했다. 마차를 타고 오면서 상상했던 미래가 모두 흩어지는 소식을.

비예단은 바싹 타버린 집을 마주했다. 집이라고 불리지도 못할 뼈대만 남은 건축물, 한때 부모님과 살았었던 그리운 집. 부모님의 마지막 남은 유품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것만큼은…!’

붕괴의 위험을 무릅쓰고 불타버린 집 앞에 섰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문고리를 잡았다. 잿가루가 쏟아지고, 손바닥이 새카매졌지만,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 내부에 온통 까만 연기가 가라앉아 연신 기침을 하다가 결국 무릎을 꿇었다. 기듯이 다가가 침대 옆 서랍장을 열었다. 나무로 만들어졌던 그 서랍은 손이 닿자마자 모두 바스러졌다. 그 잔해엔 가족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던 액자는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의 유품마저 모두 불타버렸다.

손으로 눈물을 훔치자 얼굴에도 검은 자국이 들러붙었다. 비예단의 마음도 이 집처럼 까맣게 타들어 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어린 소년에게 남아 있던 유일한 가치가 잿더미가 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비예단 님…. 이제 더 이상 여기 오시면 안 돼요. 오늘 아침에 대사제님께서 비예단 님의 사제직을 박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갑자기 무슨…?’

‘가올테 백작님께 뇌물을 받으신 정황이 확인되었습니다. 증인도 있는 상태고, 비예단 님께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럴 리가, 뭔가 오해가….’

‘그럼 가올테 백작님께 자주 들리신 건 어떻게 해명하실 생각이세요?’

‘치료…. 치료 목적으로….’

‘가올테 백작님께 받으신 치료비는 어떻게 하셨나요? 왜 신전에 제출하지 않으셨죠?’

‘그…그건…!’

‘아무튼, 집도 잃으신 분께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저도 힘들지만…. 횡령하신 치료비와 백작님께 받은 뇌물 금액을 포함하여 이번 달 월급을 감봉, 가지고 계신 짐들도 모두 신전 소유가 되었어요.’

‘집을 잃다뇨?’

‘어머… 모르셨어요? 새벽에 불이 나서….’

케일이 해준 이야기가 왈칵 내려앉는다. 마치 지붕이 무너지는 것처럼 하나씩 재생되는 그 단어들이, 그 문장들이 마주하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았다. 비예단은 속으로 몇 번이고 꿈일 거라고, 거짓말이라고 부정했다.

하지만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새카만 이 집이, 매캐한 냄새가 현실을 자각시켰다. 마차에서 떠올렸던 희망찬 계획들이 사실은 어제부터 실현될 수 없는 망상에 불과했다니. 그보다 당장 잠은 어디서 자고, 밥은 뭘 먹어야 할지. 주머니를 뒤져보자 동전 몇 개가 잡혔다.

동전들을 한 손에 꼭 쥐었다. 당장 하루도 버틸 수 없는 금액이었지만 지금 가진 전 재산이었다.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어 버린 자신의 신세에 비예단은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하하…. 진짜…꿈이지? 아니, 꿈이 아니야….”

혼자 미친 사람처럼 중얼대고 있다 보니 머리 위에 잿가루가 떨어졌다. 겨우 버티고 있는 지붕이 바스러지고 있었다. 비예단은 넋이 나간 꼴을 하곤 집을 나섰다. 허물어진 벽 사이로 나왔어도 됐는데, 소년은 굳이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방황하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참을 서 있었다. 갈 곳이 없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문득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지친 걸음으로 제인이 갇혀 있었던 폐저택을 향해 걸었다.

이젠 아무도 없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저택. 가로등 하나 켜져 있지 않았지만, 그딴 건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비척이며 걸어갔다. 돌부리에 걸려 몇 번이고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나 걸었다. 제인이 갇혀 있었던 방까지에 다다라서야 그 지친 걸음을 멈췄다. 엑젤리스의 병사들이 부순 문은 처참히 박살 나 안이 훤히 보였다. 제인이 누워있던 그 자리에 제 몸을 눕혔다.

드디어 쉴 수 있게 되자 많은 생각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그 수많은 생각 중에서도, 소년은 녹스에게 도움을 요청한 걸 후회하고 있었다. 엑젤리스에 가지 않는 게 나을 뻔했다고. 그랬더라면, 여전히 그녀를 이곳에서 계속 볼 수 있었을 테니까.

벌레가 마룻바닥을 갉아먹는 소리가 들렸다. 자장가처럼 편안했다. 남은 거라곤 아직 때 타지 않은 마음뿐이었던 소년이, 한때 누군가의 지옥이었던 곳에서 잠을 청했다.

* * *

제인은 인간 세상에 나온 뒤로 처음 느껴보는 호사에 평화로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비록 침대로부터 연결된 족쇄가 발목에 채워져 있긴 했지만, 원체 행동반경이 좁았던 그녀에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 널따란 방에서, 침대가 있어도 바닥에서 잠을 청했고 테이블이 있어도 바닥에서 식사를 마쳤다.

인간의 눈을 피해 숲과 자연에서 살아갔던 그녀의 과거는 이젠 기억에서조차도 희미했다. 그렇다고 인간 사회에 적응했느냐 하면 그건 더욱 아니었다. 인간들의 세상에 나왔어도 격리된 삶을 살았던 제인은 안쓰러울 정도로 순진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할 줄 몰랐다. 침대 다리를 부러트려 손쉽게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조련당한 짐승들이 그러하듯, 제인의 족쇄는 발이 아닌 마음에 채워져 있었다.

비록 변변치 않은 메뉴이긴 했으나 오랜만에 따뜻한 음식을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는 공간에서 먹으니 첫날엔 거의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 외에도 델단이 있는 방에서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귀가 들리지 않는 제인은 종종 꾸는 악몽을 제외하곤 누구의 방해 없이 숙면을 취했다.

하지만 문득 문 앞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진동이 느껴지면 검은 늑대가 온 건 아닌지 불안에 떨었다. 노예 시장에선 사람들이 모두 가면을 썼었고, 정신을 차린 후 봤던 그 검은 늑대 가면은 지위가 높아 보였으니 그녀는 당연히 그가 자신의 새로운 주인일 것이라 생각했다.

문득 금발에 청량한 눈을 가지고 있었던 그 소년이 떠올랐다. 보석을 만들 때 말고는 쓸모없는 자신의 신성력에 비해 소년의 신성력은 대단했다. 다른 주인에게 팔려 왔는데도 그 소년이 계속 있었던 걸 보면, 저번처럼 같은 일이 반복되겠지, 싶은 불안감이 들었다. 비예단은 그녀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한 적이 없는데도 비슷한 수준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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