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20)화 (20/95)

19화.

비예단은 눈을 뜨자마자 마당의 빨래터로 나갔다. 우물에서 겨우 물을 길어 간단히 얼굴을 씻자 얼음처럼 차가워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주변에 있는 성의 사용인들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비예단을 쏘아보았지만, 그는 눈치를 보면서도 의미 없는 ‘감사합니다.’를 중얼대며 자리를 벗어났다.

다시 방으로 올라가 거울을 보며 머리와 옷을 매만진 비예단은 어제 받은 하얀색 신발을 신고, 냉대로 쫓겨났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서 녹스와 함께 식사했었기 때문에 그가 아침 식사던, 저녁 식사던 하루에 한 번은 식당에 들를 거라는 짐작을 했기 때문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녹스는 오늘 아침 가올테에게 들리느라 아침 식사를 식당에서 할 예정이었다. 눈총을 받으며 문 앞에서 버티던 비예단은 멀리서 ‘대장’이라는 말을 듣곤 땅에 꽂힌 시선을 돌렸다.

그가 오고 있었다. 검은 늑대 가면에, 붉은 휘장이 장식된 케이프와 금빛 자수로 고급스럽게 꾸며진 제복이 멀리서 봐도 한눈에 띄었다. 비예단이 녹스를 알아본 것처럼 녹스 또한 비예단을 알아보았다.

“각, 각하…!”

녹스는 그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에 직접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 예상하진 않았었다. 다만, 이렇게 마주치게 된 기회에 확실히 비예단을 엑젤리스에서 쫓아내야겠다 생각했다. 소년이 엑젤리스를 떠나 베르티아로 돌아가 제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고향을 확인한다면 이후부턴 일이 더 쉽게 풀릴 테다.

결국, 돌아올 곳은 이곳뿐일 테니.

“비예단.”

“잠…잠시 제게 시간을….”

비예단이 겨우 더듬거리며 말을 뱉었고, 녹스는 심기가 불편한 척 연기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누구의 시간을 뺏고 있는지, 자각은 하고 있겠지.”

“죄, 죄송합…. ”

“따라 나와.”

“네?”

“여기서 대화하고 싶다면, 그대 좋을 대로.”

녹스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비예단도 그제야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흘깃거리며 쑥덕댄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녹스의 곁에 붙어섰다. 차가운 말투이긴 했지만, 비예단은 그가 자신을 배려해 주었다고 느꼈는지 내심 고마움을 느꼈다.

비예단은 멀찌감치 떨어져 그를 따라가다가 인적이 드문 성 밖에서 멈춰 섰다. 오는 길 내내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하는 말을 정리했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 그게….”

방에 양초를 가져다주지 않은 것, 청소를 해주지 않은 것, 주방에서 더럽다고 쫓겨난 것, 고용인들이 제게 인사하지 않은 것. 모두 고자질할 생각이었으나 입 밖으로 꺼내기엔 너무 작고 사소하다 못해 치졸한 내용이었다.

“편하게 얘기해.”

사용한 지 오래되어 보이는 벤치에 앉은 녹스가 비예단에게도 앉기를 권했다. 말투는 아까보다야 훨씬 친절하고 차분했지만 형용할 수 없는 불편함과 거북함 때문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게….”

그 일들이 치졸하건 아니건, 자신이 느낀 서운한 감정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게다가 이 무거운 침묵을 더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또다시 자기합리화를 마친 비예단이 녹스의 옆자리에 앉아 하나씩 이야길 꺼내놓기 시작했다.

“어제부터 제 방에 청소도 안 되어있고, 양초도 가져다 주지 않고 있어요.”

무슨 대답이라도 해줄 거라 예상했지만 녹스는 맞장구도, 공감도 없이 그저 비예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왠지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 느껴졌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어제 내내 식사도 가져다 주지 않아서 직접 식당에 갔더니, 옷이 더럽다고 매몰차게 쫓아내질 않나….”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언성을 높였다. 내가 지금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고 있구나, 어린애처럼 생떼를 부리고 있구나. 싶은 자각은 있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으니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인사도…해 주지 않는다니까…요….”

녹스의 커다란 손이 비예단의 꿀 같은 머리를 한 번 쓸었다. 관리도 없이 마구잡이로 자란 머리칼들은 거칠었지만 풍성한 느낌은 부드러웠다. 머리를 쓸던 손이 서서히 얼굴로 내려와 뺨을 한 번 쓸었다. 비예단은 그 시원한 촉감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고작 그런 불평 때문에 날 부른 건가.”

다정한 손길과는 달리 돌아오는 말은 냉정했다. 자신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린 것인지 이미 자각하고 있었던 비예단은 결국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대가 어제 내게 보인 언행들이 성에 소문이 난 모양이야.”

“아….”

어제의 패악질 본 사용인들이 나를 싫어하게 된 거구나. 어디서 단 한 번도 미움을 사본 적 없는 비예단이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채곤 마음이 따끔거렸다.

“내가 해결해 줄 수는 없을 것 같군. 내가 일일이 그대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돌봐 줄 수 있는 노릇도 아니고.”

명백히 귀찮다는 표현이었다. 어젯밤 각하나 셰이단에게 말씀드린다면 해결될 거라는 안일한 생각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보호자가 아니었다.

“비예단, 난 그대가 내게 사과를 할 줄 알았네. 고자질이 아니라.”

녹스의 말은 구구절절 틀린 게 없었다. 물론 초대한 손님을 이대로 내버려 둬선 안되는 게 맞았지만, 손님이 지켜야 할 선을 아득히 넘어버린 건 비예단이었다. 제인에 대한 내용을 좀 더 정중하고 예의 있게 말했어야 했는데, 어제의 그 충동이 결국 이렇게 화를 불러왔다.

“어제 일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요.”

기가 죽어 고개를 푹 숙인 비예단을 본 녹스가 소리 내 웃었다. 딱히 용서한다거나, 괜찮다는 말은 없었다.

“사용인들이 무례했던 것은 맞으니 합당한 벌을 주지.”

“아뇨!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자신 때문에 그들이 벌을 받는다면 오히려 더 역효과가 날 것이다. 물론 식사나 양초 같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의 평판이었다.

“그래봤자 제게 남은 인식은 좋지 않을 거예요, 절 불편해하지 않을까요?”

그의 어물쩍거리는 태도에 녹스는 슬슬 짜증이 났다. 어차피 쫓아낼 생각이었으니 슬슬 쐐기를 박을 때도 되었다.

“글쎄, 그런 대접이 싫다면 이곳을 떠나는 수밖에.”

“…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다. 남을 대하듯 차가운 말투는 비예단의 여린 마음에 기어코 상처를 냈다.

“비예단, 자네는 참 뻔뻔해. 본인이 잘못해 놓고 피해자인척하는 그 정신머리가 놀라울 정도야. 다시 한번 말해 주지, 그런 대접을 참을 수 없다면 떠나게.”

다음날, 비예단은 또다시 새벽에 가까운 아침에 눈을 떴다. 정원이 보이는 창가를 내려다보았지만, 셰이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목욕물과 식사를 가져오는 하녀도 여전히 오지 않았다. 그는 한참을 하녀가 오길 기다리다가 결국 옷장에서 제 사제복을 꺼내 입었다.

부드러운 잠옷과 달리 까슬한 면이 몸을 긁듯이 지나갔다. 밤새 생각했던 계획을 정리했다. 우선, 신전으로 돌아가 휴가를 연장한 다음, 모아둔 돈을 가지고 다시 엑젤리스로 돌아온 뒤 제인과 형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셋이서 아껴 쓴다면 한두 달은 어렵지 않게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이었다. 그 뒤 신전에 복직하고, 형도 누군가와 결혼하고 나면 제인과 둘이 살게 될 것이었다. 몇 년 앞을 내다본 계획은 완벽했다. 제인의 의견 따윈 전혀 반영되지 않은 계획이었지만 비예단은 당연히 그녀가 자신을 따라올 것이라고 자만했다.

밤새 켜 둔 양초가 모두 녹아 버려 어두웠던 방엔 창가로 들어오는 희미한 아침 햇살이 시야를 밝혔다. 낡은 천 가방에 로테의 책과 옷가지 등을 챙겼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속이 배고픔에 아우성을 쳤다.

형에게 잠시 베르티아에 다녀온다고 말을 해둘까 했지만, 또 들러붙어서 징징댈 거라 상상하면 배고픔에 예민해진 신경이 그 스트레스를 못 버틸 것 같아 그만두었다. 마차를 타면 한낮쯤엔 베르티아에 도착할 테니, 당장 식사부터 한 뒤 형에게 편지를 보내 놓기로 했다.

성을 나서는데도 문 앞의 경비병들은 비예단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마차를 구하고자 주변 여관으로 가도 냉대는 마찬가지였다. 녹스가 한 말처럼, 엑젤리스의 사람들은 외부인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바쁘다며 무시당하기 일쑤인 데다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사람들 덕에 심신이 지친 비예단은 찾아온 두 번째 여관에서조차 거절당해 근처 골목에 주저앉아 눈가를 훔쳤다. 별일도 아닌데 자꾸만 얼굴이 구겨지고 눈물이 나오려 했다.

“어이, 마차 구하쇼?”

배고픔과 서러움이 한데 어우러져 폭발하려던 찰나,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제 얼굴 꼴이 어떤지 생각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처음 엑젤리스를 방문할 때 탔던 마차와 마부가 골목 바깥에 서 있었다.

“아저씨!”

제대로 말도 못 나눠본 사이지만, 비예단은 반가운 마음이 들어 한달음에 달려갔다.

“저번에 탔던 손님이구먼. 탈 거요?”

“네, 네!”

반가움이 무색하게 시큰둥한 말투로 대답한 그 사내는 비예단이 뒤에 타자 목적지도 묻지 않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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