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19)화 (19/95)

18화.

그녀는 자신에게 해가 없다고 판단된 이 손님이 반가운 것인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순진하게 바라보는 그 얼굴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마주 앉았다.

그는 제인 쪽으로 몸을 숙여 그녀의 가는 손목을 가볍게 붙들었다. 차가운 손길에 몸을 들썩일 만큼 놀랐지만, 해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아까처럼 두려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반듯하게 펼친 손바닥을 제 입에 가져다 대곤 작게 말했다.

“…….”

그가 소리 없이 입 모양을 전했다. 제인은 그가 뱉은 여섯 음절의 입 모양을 손으로 느꼈지만 무슨 뜻인진 알 수 없었다. 그 또한 그녀가 알아채길 기대했던 건 아닌지 모호한 제인의 표정을 보고도 퍽 아쉬운 느낌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걸려있던 미소가 더욱 번졌다. 차가워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웃을 땐 무척 아름다웠다. 그는 몸을 다시 일으키고, 램프를 집어 들었다.

“또 봐.”

제인이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지만, 문가에서 작별 인사를 하곤 망설임 없이 떠났다.

* * *

남들보다 이른 아침을 맞이한 녹스는 셰이단이 두고 간 가올테의 조작 된 서류를 한 번 훑었다.

탈세, 뇌물수수, 암시장 인간 노예 거래….

거짓이 포함된 화려한 이력이 줄줄이도 적혀 있었다. 아직 마르지 않아 물기가 떨어지는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린 그가 익숙하게 얼굴에 가면을 덮어썼다. 서류에 물방울이 떨어져 잉크가 번졌다.

아침 식사를 하러 가기 전 가올테에게 들릴까 싶어 서류를 챙겼다. 이 종이 한 장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녹스가 빼앗긴 모든 것도 바로 이런 종이 한 장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자신이 당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짓밟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는지 꽉 다문 입술이 비틀렸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대장님.”

“그래. 가올테는?”

“루이스 단장이 오전 일찍 베르티아로 떠나 해일러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갔습니다.”

지하 감옥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는 그가 편히 갈 수 있도록 횃불을 들고 앞장섰지만, 녹스는 기사를 제지하곤 컴컴한 어둠 속을 능숙하게 걸어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대장님.”

횃불처럼 붉은 해일러의 머리가 옅은 어둠에서 일렁였다. 깍듯하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모습에 눈인사로 대답을 대신한 그는 철창 안의 가올테를 살폈다.

“가올테 백작에게 잠시 전해줄 말이 있는데, 깨워 주겠나.”

기절한 것인지, 잠든 것인지 지친 얼굴로 누워있던 가올테의 얼굴에 해일러가 양동이를 들어 끼얹었다. 더러운 얼굴이 한결 깨끗해짐과 동시에 가올테는 번쩍 눈을 뜨곤, 앞에 마주한 녹스를 바라보았다.

“각, 각하…!”

“아침잠이 많은 편이군, 백작.”

“송, 송구합니다….”

가올테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쭉 뻗고 있던 다리도 금세 접어 무릎을 꿇고는 공손히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할 말은 내가 있어서 찾아왔는데, 자네가 더 급해 보이는군 그래.”

“각하! 저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 못 배워먹은 사제 놈이 각하께 무슨 말을 했는진 몰라도,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그놈의 형제는 제 발로 제게 온 것이지, 제가 억지로 취하려 했던 적은 한순간도 없습니다. 직접 불러 하문하시면 아실 겁니다. 정말 저는 결백합니다!”

“아아…. 그 이야기. 자네의 죄는 그게 아니야.”

녹스가 들고 있던 서류를 펼쳐 가올테가 볼 수 있도록 들어 주었다. 풀려날 수 있을 거란 희망에 황급히 철창 앞으로 다가간 가올테는 침침한 눈으로 까만 글씨들을 읽어 내려갔다.

“길게 말할 것 없어. 아래에 서명만 하면 수도로 보내 주지. 여기보단 그곳이 한결 낫지 않겠나.”

가올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암시장 인간 노예 거래’라는 죄명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각하! 이건 안됩니다. 말도 안 됩니다. 전 결코 인간 노예를 거래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에 서명하면, 서명하면 저는…!”

인간 노예는 살인보다 더 위중하게 다루고 있는 범죄로, 법 위에 군림하다시피 하는 귀족들조차 교수형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수도와는 연이 없는 시골의 영주조차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단 한 명만이 풀려나 추방되었는데, 그는 타국의 귀족이라는 이유로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잔뜩 겁먹어 웅얼대는 가올테 백작의 위로 차가운 시선이 꽂혔다.

“그대는 수도로 가서 사형당할 거야.”

저를 잡아 온, 이 미치광이 사생아의 속내를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 아니, 그걸 왜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것인지 자신의 멍청함을 깨달았다.

이 자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데려온 것이었다.

녹스가 만년필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강압적인 눈빛에 어쩔 수 없이 주워들은 가올테의 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떨리고 있었다. 건네받은 종이와 펜을 양손에 들고 있는 가올테는 찰나가 영겁처럼 느껴지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왜 하필 나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수많은 물음표가 머릿속을 헤집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뱉었다. 공손하기 그지없는 질문이었다.

“제…제게 왜 이러십니까?”

“비예단이 내게 부탁하더군. 자네가 저지른 죄에 대해 합당한 벌을 받길 원한다고.”

“하지만 전 결코 인간 노예를 사고판 적이 없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장부를 공개하겠습니다. 베르티아로 돌려만 보내 주신다면…!”

“그건 내가 그대에게 내리는 죄일세. 내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아. 하단에 서명하게.”

“그 어린애는 각하께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오, 오히려 제가… 시키시는 건 뭐든 다 하겠습니다! 비예단이 각하께 얼마를 드린다고 하던가요? 제가 그에 10배…100배는 더…!”

“코르도 가올테 백작.”

작은 목소리였지만, 단호한 한마디에 결국 가올테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서명은 하지 않았다. 그저 만년필을 다시 녹스에게 건네줄 뿐이었다.

“저는 이런 부당한 서류에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수도로 보내 주십시오. 가서 정당한 재판을 받겠습니다.”

녹스는 철창 밖으로 나온 가올테의 손목을 붙들었다. 애를 쓰며 빼내려 했지만,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비해 놀라울 정도의 악력은 그의 팔을 꿈쩍도 하지 못하게 잡아두었다.

“내가 지금 부탁하는 걸로 보이나?”

등골이 서늘할 만큼 차가운 음성이 가올테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녹스는 한 손으론 그의 팔을 붙들고 있으면서, 다른 손으론 해일러를 향해 뻗었다. 그녀는 뭘 뜻하는 것인지 몰라 멀뚱히 서 있다가 그가 시선을 돌려 저를 바라보자 다급히 검을 꺼내 건네주었다. 이 상황에 검이 왜 필요한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들고 있는 거라곤 횃불과 검밖에 없었으니 좀 더 그에게 어울리는 물건을 골라 준 것뿐이었다.

“각, 각하!”

해일러의 선택은 옳았다. 검을 건네받은 녹스는 능숙하게 손잡이를 돌려 수직으로 세웠다. 가올테는 미래를 예상하고 비명을 지르며 손목을 뒤틀었지만, 잡힌 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녹스는 세워 들고 있던 검으로 가올테의 두꺼운 엄지손가락을 그대로 내리쳤다. 검 자체가 무언가를 찌르는 용도는 아니라 그런지, 몇 번이나 찍어 내린 뒤에야 가올테의 손가락이 떨어져 나왔다. 퀴퀴한 바닥에 피가 쏟아졌다. 가올테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지만, 녹스는 잘라낸 손가락을 피 웅덩이에 묻혀 서류에 지장을 찍었다.

“말을 안 들으니, 어쩔 수가 없군.”

잘린 손가락이 용도를 다하자 녹스는 철창 안으로 가올테의 엄지를 던졌다.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듯 무릎을 꿇고 기어가 이제는 용도를 잃은 손가락을 주워들은 가올테는 울음 섞인 비명을 질렀다.

해일러는 그 광경을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다. 지난 겨울, 훈련장에서 봤던 그 녹스 엑젤리스가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검은 늑대와 동일한 인물이 맞을까? 진짜 본모습은 어느 쪽일까? 루이스라면 하지 않았을 생각들이 정리도 되기 전에 피 묻은 칼이 해일러를 겨눴다. 날카로운 칼끝에서 몇 방울의 피가 떨어졌다.

“해일러.”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해일러가 시선을 녹스에게 맞췄다.

“정신 차리게.”

굳어버린 몸을 그제야 움직이며 고개 숙인 해일러는 죄송하다는 한마디가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용서를 구하기보단 다른 말이 하고 싶었다. 자꾸만 그 검은 가면에 그때 그 녹스의 흰 얼굴이 겹쳐 보여서일까.

“…괜찮으십니까.”

해일러가 숙인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어느새 목까지 다가온 검 끝을 바라보았다. 목을 타고 뺨으로 쓸 듯이 올라온 검은 기어코 그녀의 뺨에 상처를 냈다.

“루이스가 그대에게 주제넘은 행동은 삼가라는 말은 않던가?”

“경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대장.”

“루이스가 돌아오면, 그대 덕에 벌을 받게 될 거야.”

녹스는 거리낌 없이 해일러에게 죄책감을 안겨 주고는, 가올테가 수도로 송환되기 전 죽으면 곤란하니 의사를 보내 치료하라는 말을 남기곤 서류를 챙겨 자리를 떴다.

해일러는 지난번, 녹스가 평소의 딱딱한 목소리가 아닌 다정한 목소리로 격려를 해 주었던 것 때문에 마음이 무척 심란했다. 그리고 그 심란함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미숙한 모습을 보이는 자신이 한심했다.

‘주군을 좋아해서 어쩌자는 거야?’

마음을 다잡기 위해 바닥을 뒹구는 가올테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가 자른 손가락까지. 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태생부터 권력을 가지고 태어나, 비틀린 정서를 키워나간 녹스는…. 누구에게도 연민의 대상이, 애정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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