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심기가 불편한 사람답지 않게 나른한 미소를 지은 녹스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할 일은 비예단을 엑젤리스에서 쫓아내 베르티아로 돌려보내는 것밖에 없었다. 제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고향에 돌아가 절망을 느끼면, 제 발로 다시 돌아올 것이 분명하니까. 비예단은 결국 갈 곳을 잃고 다시 엑젤리스로 돌아올 것이다. 델단이 있고, ‘제인’이 있는, 녹스의 성으로.
“그래. 이만 가봐.”
루이스는 바로 인사를 하고 나갔지만, 셰이단은 그러지 않았다. 아주 중요한 손님을 대접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주인님. 오늘 형님께서 오시니 일정을 조금 앞당기셔야 합니다.”
“아, 벌써 날이 그렇게 됐나.”
녹스가 책상 위에 올려진 달력을 흘깃 바라보았다. 오늘 날짜에 셰이단이 그려 놓은 반듯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오늘 저녁은 형님께서 좋아하시는 메뉴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오랜만인데, 진수성찬으로 대접해.”
오래간만인 형의 방문이 즐거울 법도 하지만, 그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어쩐지 비예단과 델단이 떠올랐다. 그들이 내심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예, 회포를 푸셔야지요.”
“요즘 딱히 즐거운 일이 없어서. 형에게 전할 말도 없군.”
“재미있는 일이 없었긴 했죠.”
녹스는 가면을 벗어내며 형이 오기 전까지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아, 마침 새로운 장난감이 생기긴 했지.”
“장난감이라면….”
셰이단의 말을 무시한 녹스는 책상 위에 올려둔 가면을 톡톡 두드리며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 * *
비예단은 마을을 나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를 걷고 있었다. 역시 세상은 믿을 사람이 없구나. 이따위 생각을 하는 마음마저 황무지에 있는 것처럼 허무했다. 그러다가도 아까 그렇게 화를 낸 걸 떠올리면 무슨 염치로 다시 성에 돌아가나 싶었다.
피는 못 속인다고, 사리 분별 못 하는 건 형이랑 다를 것도 없었던가.
비예단은 심란한 마음을 못 이기고 아무도 없는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민망함에 계속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은, 여태 보았던 녹스가 속이 넓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착각이었다. 가서 상황을 다시 설명한다면 용서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인의 거처도 바꿔 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큰 용기가 필요했다. 비예단은 앉았던 바닥에 도로 누워 한숨을 내쉬면서 먼저 부끄러움을 지우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생각을 시작했다.
‘난 제인을 위해서 그런 것뿐이야. 비록 각하께서 도와 주셨지만, 제인의 처지를 바꿔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비예단은 해가 뉘엿뉘엿 질쯤, 허기를 참지 못하고 성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오는 길에 마주친 하녀와 기사들이 전처럼 제게 인사를 하지 않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너무 예민한 탓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마침 저녁 식사 때라 아침처럼 방에 식사가 차려져 있겠지, 생각했는데 방은 아침 그 모습 그대로 청소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대충 침구를 정리하고, 도로 방을 나섰다. 녹스와 저녁 식사를 했었던 기억을 더듬어 주방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아, 저…. 혹시 식사할 수 있을까요?”
식당에 들어서자 하녀들이 식기를 나르고 있기에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식사를 내주거나, 방으로 올려 주겠다고 답할 터였다.
“그런 지저분한 차림으로 식당에 오는 걸 자제해 주십시오.”
하녀들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고, 뒤에서 대답이 들렸다. 뒤를 돌자 흰옷과 모자를 쓴 주방장이 음식을 들고 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며 엉겁결에 사과했지만, 주방장은 얼굴을 구겼다.
“정말 예의라곤 없으시군요. 음식이 있는 곳에서 흙먼지를 터시면 어떡합니까?”
식탁에 내려놓으려던 음식을 도로 머리 위까지 들고 비예단을 타박한 주방장은 옆에 있던 하녀에게 “무례한 손님을 밖으로 모셔라.”라고 말했다.
“오늘은 중요한 손님이 오시는 날이라, 이만 나가 주시지요.”
하녀는 친절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차가운 태도로 비예단에게 나가라 요청했고, 그는 대꾸도 못 한 채 밖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옷차림의 문제라 생각했지만, 저녁 시간이 다 지나고 나서도 아무도 식사를 가져오지 않자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음식뿐만 아니라 새로운 양초도, 목욕물도 없었다.
설마 내가 낮에 부린 성질 때문일까?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심란했다. 이 냉골 같은 방에서 자다간 감기라도 걸릴 것 같아 옷장의 옷을 죄다 꺼내 이불처럼 덮고 겨우 잠이 들었다.
* * *
늦은 밤, 가벼운 잠옷 차림의 남자가 램프를 들고 성벽을 따라 걷고 있었다. 밤과 낮의 온도가 무척 다른 지역이다 보니, 성벽을 걷는 남자의 입에선 하얀 연기가 흘러나왔다. 군데군데 가로등이 켜져 있긴 했지만, 여전히 어두운 밤길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걷는 거로 보아 그에겐 무척 익숙한 길임이 분명했다.
정돈된 산길을 걷는 와중에 만난 경비들은 그에게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했고, 그는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걸음걸이, 손짓조차도 우아함이 묻어나 실루엣만 보아도 귀족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는 파수대의 낡은 헛간에 도착했다. 잠겨 있는 문틈으로 안을 살피자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확실히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검은 머리카락의, 그래. 그 여자가 있었다.
제인이라는 여자는 갇혀 있음에도 울거나 발악하지 않고, 그저 창가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나오려고 시도한다면 못 나올 것도 없었는데 왜 그녀가 가만히 있는지 의아했다. 허리를 숙여 갈라진 문틈 사이를 더욱 집중해서 보았다. 어두웠던 시야가 적응돼 안이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제인의 검은 머리카락이 반사되어 희게 반짝였다. 흰 피부와 대비되는 그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고요하고 처연한 눈이… 묘하게 중독적이었다.
제인은 몇 년 전, 노예 시장에 있을 때가 문득 떠올랐다. 그곳도 지금 있는 곳처럼 나무로 된 낡은 헛간이었다. 물론 그땐 철창에 갇혀 있긴 했었지만, 밥을 나무 그릇에 숟가락도 없이 주거나, 호스로 물을 뿌려 씻기는 방식은 똑같았다. 그리고 자신을 사 갔던 사람들이 모두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점도.
검은 늑대…. 제인은 어제 보았던 늑대 가면을 쓴 남자를 떠올렸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두근거렸다. 저를 앞에 두고 뭐라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차오르는 공포심은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라 이런 류의 불길함에 대해 이종의 직감이 틀린 적이 거의 없었다.
제인은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움츠러든 몸을 더욱 말았다. 다친 저를 치료까지 해주고, 먹을 것도 줄 땐 그리 나쁜 사람들은 아니겠거니 했지만, 뼛속까지 각인 된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몇 번의 호의로 녹을만한 것이 아니었다.
‘들어오지마…. 제발…….’
그녀는 속으로 간절히 빌었지만, 그녀가 여태 살아온 세상은 늘 그렇듯 그녀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인기척이 그대로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이 무색하게도 제인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따라 서서히 문이 열렸다.
그가 문을 열자, 높게 나 있는 창가로 비치는 달빛을 한 몸에 받으며 앉아 있는 제인이 보였다. 검은 머리칼이 바닥에 널브러져 지푸라기며 흙이 들러 붙었지만, 제인은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흑요석 같은 눈이 주체를 못 하고 흔들리며 낯선 방문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남자는 이 헛간이 예전에 무슨 용도로 사용됐었는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사냥개를 넣어 놓는 공간으로 쓰였던 헛간. 그래서 그런지 문을 열자마자 꺼림칙한 비린내가 풍겨와 불쾌감에 저절로 이마가 찡그려졌다.
그가 인상을 쓴 게 무서웠는지,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제인은 점점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일어서려는 모양이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자꾸만 미끄러졌다. 결국, 벽 끝까지 가서야 몸을 기대 일어섰다. 발목에 달린 족쇄가 거친 소리를 내자 그가 눈길을 돌려 제인의 발을 살폈다.
“정말 갇혀있네.”
무채색 같은 낮은 저음이 적막한 헛간을 채웠다. 그는 제인이 겁에 질린 것을 알고 있었으나,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둘은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졌다.
“제인.”
제인은 성인 여성 중에선 작은 키가 아니었는데도, 그의 앞에서는 무척 작아 보였다. 키에 걸맞지 않은 앙상한 뼈마디를 보고 남자가 이마를 찌푸렸다. 누가 제인의 어깨를 쥐고 흔드는 것처럼 멈추지 않는 떨림이 그의 눈에도 보였다. 남자가 피식대며 웃었다. 연보라색 눈이 보기 좋게 반달로 휘었다.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어.”
이종과 사람은 엄연히 다르고, 그들은 짐승과 더 가깝다 들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사람과 다를 것도 없어 보였다. 똑같이 손가락이 있고, 입이 있고, 눈이 있었다. 개중엔 물갈퀴나 뿔이 달린 종족도 있다 들었는데 눈앞의 제인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널 해치지 않을 거야.”
그는 대답 없는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갔다. 제인 또한 입을 오물거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손에 아무런 무기도 없는 데다가 잠옷 차림의 이 남자가 편안한 얼굴로 자신에게 무어라 말하는 것을 보니, 해를 가할 것처럼 느껴지진 않아 두려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셨다.
「누구세요?」
제인이 도로 주저앉아 흙바닥에 손글씨를 적었다. 거꾸로 적은 글씨라 삐뚤빼뚤했지만 녹스는 들고 온 램프를 비춰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