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17)화 (17/95)

16화.

비예단은 헛간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제인이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일으켜 비예단을 바라보았다.

“…!”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던 커다란 눈이 공포에 물들었다. 제인은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 줄 알았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면 누구나 그렇듯,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인….”

비예단은 한 걸음씩 다가가며 제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듣지 못함을 알고 있었어도, 그 이름을 부르면 마음속 허전했던 무언가가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만나면 마냥 기뻐질 줄 알았고, 모든 게 잘 해결될 줄 알았다. 녹스는 지금으로선 자신에게 신보다 더한 사람이었으니까. 만난 지 얼마 안 됐더라도 녹스의 친절을, 엑젤리스를 믿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비예단이 분노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었다. 인간 사회에서 이종이 받는 취급을 생각하자면, 제인이 있는 이 거처 또한 ‘지극히’ 마땅했다.

엑젤리스의 모두가 비예단을 깍듯하게 대해 주는 바람에 제인도 좋은 대우를 받고 있을 거라 은연중에 했던 착각이 현실과 너무나 대비 되어 화가 끓었다.

“제인, 해치려는 게 아니에요. 나쁘게 굴 마음 전혀 없어요. 제가 당신을…. 제가….”

‘구해줬어요.’

마지막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아 집어삼키듯 입술을 짓이겼다. 비예단은 제인이 공포에 질려 떨고 있음에도, 가까이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몇 번이고 치유해 주었지만, 날개가 있었던 건 전혀 몰랐던지라 그녀의 몸 상태를 좀 더 자세히 살폈다. 흰빛이 제인의 몸을 감쌌다. 제인의 떨림이 서서히 점점 잦아들었다.

집중이 계속되자 드디어 갈피가 잡혔다. 한참을 집중해야 겨우 인지가 될 정도로 오래된 흉이라면 치료가 단박에 되지 않을 것이었다. 비예단은 감정이 요동쳐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음을 느끼고 금세 손을 거두었다.

“오늘은 이만 갈게요. 각하를 만나서…. 지내시는 곳을 바꿔 달라고 부탁드릴게요. 다시 만나서 정말…. 기뻐요.”

비예단이 화난 얼굴로 씩씩대며 파수대를 나섰다. 그러곤 곧장 성으로 내달렸다.

녹스는 매일 오전, 기사들이 찾아오기 전에 늘 혼자 검술 훈련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지속한 일상이었다.

“주인님.”

훈련에 집중하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셰이단이 젖은 수건을 들고 빅토르와 함께 와있었다.

“그래.”

녹스가 연습용 목검을 바닥에 던지고 셰이단에게 다가가 수건을 받았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고, 곧 기사들이 올 시간임을 생각해 소지품을 올려둔 목제 테이블 위에서 가면을 들어 썼다. 운동으로 인해 덥혀진 숨이 답답할 만도 했지만, 녹스는 그 가면이 원래 제 얼굴인 양 불편한 기색 따윈 없었다.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빅토르, 노인네라 아침잠도 없나?”

“대장님만 하겠습니까?”

녹스와 빅토르의 신경전이 일어났지만, 셰이단은 이 둘이 서로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방식이라는 걸 알고 있어 구태여 말리지 않고 한 걸음 떨어졌다.

“그래서, 토질 문제인가?”

“그 사제에 관한 내용입니다.”

“집무실로 가면서 듣지.”

“처음에 생각한 방법은, 사제의 시체를 가루로 만들어 땅에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응축된 신성력이 메마른 토양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줄테니까요.”

“그래.”

“하지만 그건 저주의 일종입니다.”

“저주?”

“네. 사제의 마음가짐에 따라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모르는 일인 거죠, 더 황폐해질 수도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사제 스스로 엑젤리스를 위해 죽는 건데, 연고도 없는 이 땅에 그 사제가 그렇게 해 줄지도 문제입니다. 가능하겠어요?”

“그게 되겠어?”

“그건 대장님께서 해결하셔야죠.”

빅토르가 허허, 하고 웃으며 대꾸했다. 녹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실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비예단은 아주 다루기 쉬운 사람이었으며, 사람을 휘두르는 데엔 자신이 제격이었으니까.

“다른 건? 마취나 정신 지배로는 해결이 안 되는 문제인가?”

“외부의 압력이 가해지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할 확률이 높습니다.”

“일단 신경 쓰지 말고 우선 진행해. 제 손으로 목숨을 끊을 만큼 내게 충성하도록 만들 테니.”

녹스와 빅토르는 이야기를 나누며 어느새 성의 정문까지 다다랐다. 문을 지키는 기사들이 막 문을 열어주려는 찰나, 멀리서 무례한 외침이 들렸다.

“각하!”

녹스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시뻘개진 비예단이 무릎에 손을 짚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온 방향을 보아하니, 파수대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 여자를 만나고 왔음을 짐작했다.

“아, 비예단. 그 이종 여자 치료는 잘 끝냈나?”

빅토르와 이야기할 때와는 전혀 다른 친절한 어투가 가면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비예단은 몰아쉰 숨을 한 번 크게 내뱉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답했다.

“각하, 제인은 환자입니다! 그 어느 마을에서 환자를 닭장만 못한데에 두고 치료를 하라 합니까?”

그 공간에 있던 셰이단, 빅토르, 기사들까지 모두가 일제히 침묵하며 비예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더 씩씩대며 분을 풀었다.

“직접 가 보셨습니까? 제인이 있는 곳을 각하께서 보셨는데도 아무 말씀 없으셨던 건가요!?”

비예단은 성으로 오면서 계속 상황을 곱씹다 보니 화가 더욱 쌓인 상태였다. 난생처음, 형이 아닌 다른 이에게 화를 냈지만, 그 상대가 녹스 엑젤리스였다는 사실을 당장은 깨닫지 못했다.

“더 이상 무례를 범하지 마십시오!”

빅토르가 보다못해 호통을 쳤다. 하지만 그게 시발점이 된 마냥 비예단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셰이단이 제지하기 위해 다가가자 녹스는 손을 들어 올려 그를 막아섰다.

“모든 생명은 평등해야 합니다. 저는 사제의 신분으로 도저히 이 상황을 넘어갈 수가 없어요! 직접 구해주신 생명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끝까지 편의를 봐주시고, 책임을 지셔야죠! 제인이 있었던, 가올테 저택에서 제인이 당한 수모를! 어떻게 똑같이 재현해 주십니까!”

제인, 제인이라. 녹스는 앞에서 분노를 표하는 비예단의 모습을 그저 감흥 없이 바라보면서 ‘그 여자의 이름이 제인이군.’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용인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자신에게 큰 소리를 낸 것이 꽤 불쾌하게 느껴졌다. 녹스는 상응하는 모욕을 돌려주기로 했다.

“그대의 신, 로테는 이종들을 인간과 같은 생명이라 가르치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

“내가 잘못 알고 있다면 지적해 주게.”

녹스는 비예단에게 한 걸음씩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친절한 말투는 여전했다.

“난 그저 그대의 수준에 맞게 배려해 준 거지, 그 여인을 일부러 괴롭힐 마음은 없었어.”

녹스가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비예단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엉망이었다.

“각하께선 정말…. 참으로 교양 있는 경멸을 보내십니다. 저나, 제인에게도.”

비예단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더니, 코를 훌쩍이는 소리를 억지로 참으며 겨우 말을 뱉곤, 녹스를 등져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제 분을 못 이긴 것인지, 아니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화를 낸 것이 부끄러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허, 이거… 자발적 인신 공양은 힘들어 보입니다.”

빅토르는 제가 낄 자리가 아님을 느끼곤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녹스는 대꾸하지 않고 셰이단에게 명령을 내렸다.

“셰이단. 루이스를 불러라.”

노련한 집사는 괜한 불똥이 튈까 곧장 루이스가 있는 기사 숙소로 뛰듯이 걸어가 명령을 전달했다. 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내용도 함께.

“주인님. 루이스 경이 왔습니다.”

집무실에 들어온 녹스가 하녀가 준비해준 차를 한 모금 마셨을 때, 루이스와 셰이단이 찾아왔다.

“그래. 아까 있었던 일은 들었겠지.”

차를 마저 마신 후, 느긋이 말을 뱉은 녹스는 조금의 화도, 짜증도 묻어있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였다. 이미 그의 기분이 얹짢음을 알고 있었던 루이스는 오히려 그 모습이 더 무서웠다.

“네. 셰이단 님이 전해 주셨습니다.”

“지금 베르티아로 가라. 매수해 둔 신전의 사제에게 비예단이 가올테 백작에게 뇌물을 받았다고 소문을 내라고 전해.”

“예.”

“대사제에게 비예단을 사제직에서 박탈하라 전하는 것도.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그 외에 내리실 명은….”

“집도 태워 버려.”

비예단의 버릇없는 행동에 대한 유치한 복수 따위가 아니었다. 잘 쌓아 가고 있던 신뢰가 무너져 비예단이 훌쩍 떠나 버릴지 모를, 만약의 대비책이었다.

루이스는 베르티아에서 온 사제가 제 주군께 큰 소리를 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부터 이미 이런 명령을 받을 것이라 예상하였다.

녹스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비열한 방법을 써서라도 결국은 제 손에 넣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감정의 동요가 심한 해일러와 같이 부르지 않고 자신만 부른 것이리라. 녹스는 명령에 대해 이유를 묻지 않는 루이스를 가장 신뢰했고, 루이스 또한 녹스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점을 존중했다.

“알겠습니다.”

“셰이단,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겠지.”

“네. 주방에 물 한 모금 주지 말라 이르겠습니다.”

녹스는 조만간 비예단이 엑젤리스를 떠나리라 예상했다. 도덕적으로 옳은 방법을 통해 비예단을 엑젤리스에 남겨 놓았다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그의 방법대로 잡아 둘 수도 있었다.

오히려 그편이 더 쉽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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