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비예단은 샤워를 한 후에도 편안한 잠옷이 마음에 들어 사제복으로 갈아입지 않았다. 살짝 문을 열어 바깥을 살피자 발소리도 없이 고요한 공기가 맴돌았다. 델단에게 들릴까 했지만, 형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고개를 흔들곤 방을 나섰다.
“하아….”
뿌연 안개가 희미하게 정원을 감싸고 있었다. 막 해가 떠서 그런지 날이 아직 쌀쌀했다. 양팔을 비비며 실내화를 신고 정원을 거닐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 후 화단으로 향했다. 발등으로 잔디에 맺힌 이슬이 묻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시들어가고 있는 꽃으로 손을 뻗었다.
“오늘 잘릴 뻔했는데, 다행이다. 그치?”
흰빛이 손에서 뿜어져 나와 꽃으로 스며들었다. 축 처진 꽃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싱싱하게 활짝 핀 모습에 비예단이 꽃을 툭툭 치며 말을 걸었다. 하지만 대답은 꽃이 아닌 뒤에서 들려왔다.
“그 꽃은 아침에 피는 꽃이라 이 시간에는 그렇게 늘어져 있는답니다.”
마치 경기를 일으키듯 놀라 뒤를 돌아본 비예단이 대답한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곤 가슴을 쓸어내렸다.
“셰이단 님….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요.”
“라카르 지방은 해가 일찍 떠서 다들 이 시간에 일어나죠. 어릴 때 습관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저도 아침 기도 때문에 이 시간이면 눈이 떠지더라고요.”
“아침 기도를 드릴 복장은 아니신데요?”
위아래로 그의 옷차림을 훑은 집사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비예단은 자신이 잠옷을 입고 나온 것을 깨닫곤 부끄러움에 손사래를 쳤다.
“아…. 이, 이게…. 옷이 편하더라고요!”
“며칠 더 머무르실 예정이라면, 입고 지내실 옷을 몇 벌 준비하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이렇게 신세 지고 있는데 곧 베르티아로 돌아가야죠. 마을이 잠잠해지면 형도 곧…….”
어서 방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에 셰이단을 지나쳐 다시 성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셰이단이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만한 말을 꺼냈다.
“제 이야기를 들으시면 돌아갈 마음이 사라지실 텐데, 말씀드리지 말까요?”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비예단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제인, 제인. 머릿속에 그 이름이 가득 들어찼다. 셰이단 님이 제인을 찾아봐 주신 걸지도 몰라.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네…?”
“전에 여쭤보신 분 말입니다. 도움이 될까 싶어 찾아봤는데, 가올테 백작 저에서 데려와 치료 중인 여자가 있다고 하더군요.”
기대는 현실이 되었다. 한달음에 셰이단의 코앞까지 다가온 비예단은 녹색 눈을 빛내며 어린 애처럼 보챘다.
“정말인가요? 만날 수 있을까요? 지금 어디 있나요?”
“주인님께 여쭈니 비예단 님께서 그 환자분을 치료해 주시면 어떨까 하시던데, 돌아가신다면 다른 사제를 알아보겠습니다.”
“안 돌아가요…!”
비예단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짧게 웃음을 터트린 셰이단은 퉁명스러운 말투를 바꿔 다시금 친절하게 대답했다.
“농담입니다. 파수대에서 보호하고 있다던데, 괜찮으시다면 치료를 부탁드립니다.”
“어디가 다친 건가요…?”
“설명하자면 길지만, 날개가 있는 비행 이종으로 확인되는데 그 날개가 잘린 것 같다 하더군요.”
“….”
날개가 있었다고? 제인을 처음 봤을 때부터 날개 따윈 없었다. 오래전에 잘렸었겠지. 손가락 자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겠지. 비예단은 자신이 대체 무슨 짓에 가담한 것인지, 제인에게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뼛속 깊이 와닿았다. 어떻게든 그녀에게 제대로 된 삶을 주어야 한다고, 그리고 그 삶을 주는 건 녹스가 아닌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예단 님의 능력이 시간 역행이니, 날개를 재생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계십니다.”
“한 번 해 볼게요. 오래된 상처라면 힘들 수도 있지만….”
“그럼 방에 올라가 계세요, 입을 옷을 몇 벌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비예단은 이제 방금처럼 반짝이는 눈이 아니었다. 제인의 삶이 어땠는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얼마나 그런 생활을 지속했는지도 몰랐다. 자신이 제인을 처음 본 것은 2년도 채 안 되었는데, 언제부터 그런 지옥 같은 삶을 살았던 건지…. 그동안 무슨 기분으로 매일을 버텨냈었는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를 내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태연히 방으로 걸어갔다. 비예단은 엑젤리스에 온 순간부터, 아니. 형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들었던 그 날부터 강해지기로 결심했다. 형과 제인을 지키려면 앞으로도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방에 들어가자 그새 티 테이블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아침거리가 차려져 있었다.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들고 거울에 섰다. 이곳, 엑젤리스에서 본 사람들과 자신은 너무 차이가 났다.
예를 들어…. 촌티라거나.
속으로 자학적인 농담을 하며 피식 웃고는 거울을 보며 붉어진 눈가를 꾹꾹 누르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입을 옷을 가져왔습니다.”. 어젯밤, 잠옷을 가져다준 하녀의 목소리였다.
“의상실에 의뢰를 맡겨 두었다 하셨으니, 우선은 이 옷부터 정리하겠습니다.”
“아… 아뇨, 옷 정리는 제가 할게요. 감사합니다.”
짧게 목례한 후 도로 문을 닫은 비예단은 두툼한 옷더미들을 들고 침대에 내려놨다. 사제복과 비슷한 흰옷들이 대개였고, 신기 편한 신발도 함께였다. 아마도 셰이단이 자신을 배려해 골라준 것 같았다.
소고기 수프와 갓 구운 빵, 베이컨이 차려진 아침 식사를 앞에 두고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평소라면 감사하며 먹었을 식단이었지만, 제인의 아픈 과거를 들춰 본 기분에 알 수 없는 역겨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예단은 침대에 팔을 얹고 무릎 꿇은 채 아침 기도를 하곤,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방을 나섰다.
비예단이 다시 방을 나왔을 땐, 성안의 사람들이 모두 분주했다. 낯선 환경에서 자신만 동떨어진 기분을 느끼자니 새삼 신전에서 눈뜬 첫날이 떠올랐다. 그땐 아무것도 못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몇 시간이나 가만히 서 있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지나가는 사람 중 기사로 보이는 사람에게 파수대로 가는 길을 물었다.
“저기…. 파수대로 가려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 기사는 비예단을 훑어본 후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이 파수대라며 친절히 답변해 주곤, 정중히 인사를 했다. 비예단 또한 당황한 나머지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그는 이미 등을 돌린 상태였다. 무례할 수도 있는 행동이었으나 비예단은 그저 바쁘신가 보다. 친절하신 분이네. 라는 생각만 했을 뿐 불쾌함이라곤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사용인이 사용하는 문으로 나갔지만, 온통 빨래하는 하녀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찾아 성을 반 바퀴 정도 돌았을 때, 멀리서 회색 연기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제인을 만날 생각에 웃음이 지어졌다. 왜 손님방이 아닌 파수대에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디든 가올테 백작의 저택보단 낫겠지. 이런저런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파수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여기…. 제가 치료할 환자가 있다고 해서 왔는데요.”
파수대 입구엔 갑옷을 입은 기사가 아닌 가죽옷 차림의 사냥꾼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비예단이 용건을 말하자 빤히 쳐다보더니 턱짓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빼먹지 않고 고개를 숙인 뒤 그가 가르쳐 준 방향으로 다시 한참을 걸었다. 꽤 외진 곳에 있어 가면 갈수록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 마음이 적중이라도 한 듯, 도착한 곳은 불안 속 남아 있던 희망을 송두리째 잠식시킬 만큼 낡은 헛간이었다.
탄식이 섞인 한숨이 비명처럼 흘러나왔다. 다급히 헛간 문을 잠그고 있는 나무판자를 들어 올려 문을 열었다. 그 안엔 발이 묶인 채 누워있는 제인이 있었다. 가올테 백작의 저택에서와 똑같은, 그 모습 그대로.